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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권홍의 '중국, 중국인' ... 중국역사에서 보는 중국인의 처세술(12)

지모가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타인이 작은 일에 주의를 기울일 때 큰 것에서 착안한다. 다른 사람이 가까운 것을 보려할 때 먼 곳을 본다. 타인이 바빠서 일을 망칠 때 감정을 얼굴에 나타내지 않고 자연스럽게 일을 바로잡는다. 다른 사람이 속수무책일 때 힘들이지 않고 여유 있게 일을 처리한다. 식은 죽 먹기처럼 솜씨 있게 일을 처리한다. 어떤 낌새도 없이 작은 부분까지 사고한다. 행동은 타인이 생각지도 못한 부분까지 고려한다. 그렇게 어떤 어려움도 여반장으로 처리한다. 아무리 많은 문제도 일소에 부친다.

 

중국역사에서 작은 일에 몰두해 큰일을 그르친 인물이 수두룩하다.

 

가장 일찍 보이는 인물이 춘추시기 노(魯)나라 장공(莊公)(★)이다. 그는 노래도 잘하고 춤도 잘 췄다. “연주가 틀리면 주랑이 돌아본다”는 경지를 넘어섰지만 국가를 다스리는 데에는 엉망진창이었다. 백성이 안심하고 생활할 수가 없었다. 사람들은 『폐구(蔽笱)』를 써서 그를 풍자하였다.

 

남북조(南北朝, 420~589)시대에 양(梁) 원제(元帝) 소역(蕭繹)(★★)은 어릴 적에는 총명하며 준수하고 쾌활하였다. 하늘이 낳은 인재랄까. 다섯 살 때 『곡례(曲禮)』를 암송하였고 여섯 살 때에는 부친을 위하여 시를 지었다. “연못 부평초 생겨나자마자 모이고 숲 속 꽃 피니 잠깐은 촘촘하다. 봉황이 들어가니 꽃가지 흔들리고 해가 물위를 비치니 풍경이 떠오른다.”

 

성장해 성인이 된 후 여러 책들을 섭렵하니 문재(文才)가 뛰어났다. 붓을 대기만 하면 당장에 문장을 이뤘고 글은 더 손댈 데 없이 훌륭하기 그지없었다. 군대의 서신, 책령이나 사령 모두 다른 사람의 손을 빌릴 필요 없이 손수 휘호하였다. 평생의 저술이 방대해 전후로 『금루비결(金樓秘訣)』, 『고금동성명록(古今同姓名錄)』, 『강주기(江州記)』 등 서적 42종, 도합 700여 권을 저술하였다. 서화에도 정통하였다. 공자상을 그리고 찬어(贊語, 찬미하는 말)를 지어 자신이 직접 쓰니 사람들은 ‘삼절’이라 칭송하였다. 소역이 전업해 예술가가 됐다면야 길이 이름을 남겼을 것이다. 황제에 자리에 앉아있었으니, 국가는 쇠락하고 백성은 도탄에 빠졌다.

 

 

진(晉, 266~420)나라 혜제(惠帝)(★★★)도 총명한 태자였지만 글 읽기를 싫어하였고 정치도 좋아하지 않았다. 그저 장사에만 몰두하였다. 즉위한 후에 궁에 시장을 모방해 점포를 지었다. 자신은 장사꾼으로 분장해 큰소리 외치며 물건을 팔았다. 총애하는 비를 주인으로 삼고 자신은 종업원 행세하였다. 궁원(宮苑)에 인공수로를 만들어 물을 끌어들인 후 기슭에 푸줏간을 만들어 자신이 칼을 잡고 고기를 썰며 총애하는 비에게 술을 팔게 하였다. 오랜 기간 돼지 잡고 술 파니 손으로 고기의 근수를 어림치어 헤아리면 조금의 오차도 없을 정도가 되었다. 황제가 돼서는 안 됐다. 결과는 엉망진창이 되어버렸다. 결국 자신도 목이 잘리었다.

 

송(宋, 960~1279)나라 때 휘종(徽宗)(★★★★)도 전형적인 사례에 속한다. 역사기록을 보면 송 휘종 조길(趙佶)은 천부의 자질이 있었지만 황실에서 제정한 유가경전이나 역사서에는 흥미를 전혀 두지 않았다. 그저 붓과 벼루를 들고 단청하거나 말 타고 공놀이 하는 것을 매우 좋아하였다. 고구(高俅)가 바로 공놀이에 일가견이 있어 휘종의 총애를 받아 중용되었다.

 

조길은 서화를 미칠 듯이 좋아하였다. 궁에 전문적으로 어전 서화소를 설립해 유명한 서화가 미불(米芾) 등에게 관리하도록 하였다. 수만에 이르는 진품을 소장하였다. 고대의 종정(鐘鼎)도 1만여 개나 되었다. 모두 상나라, 주나라, 진나라, 한나라 때의 기물이었다. 문방사우를 저장한 대연고(大硯庫)에는 3천여 개나 되는 단연(端硯)(★★★★★)을 소장하였다. 휘종은 역대 유명 서화가의 자료를 정리하도록 하여 후대 미술 연구에 진귀한 사료가 된 『선화서화보(宣和書畫譜)』를 편찬하였다. 친히 소장하고 있는 고대 청동기를 고증하고 감정해 친히 『선화전박고도

 

(宣和殿博古圖)』를 편찬하였다. 그는 회화 부분이 “천하의 으뜸”으로 만들고자 결심해 국정은 뒷전에 두었다. 3년이란 세월을 투자해 궁에 소장하고 있는 한나라 때 모연수(毛延壽) 등 명가 37명의 대대로 전해져오던 뛰어난 작품 모두를 모사하였다. 예술에 조예가 있었다. 수준은 최고라 할 만하다. 독자적인 풍격을 이룬 ‘수금서(瘦金書)’는 천하 일절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1126년에 금(金, 1115~1234)나라가 변경(汴京)을 점령해 선후로 조길과 그의 아들 흠종(欽宗) 조항(趙桓)을 포로로 잡아 금나라 도성 대정부(大定府, 현 요녕성 영성[寧城])로 압송하였다. 오래지 않아 부자 둘과 함께 북녘 땅에 포로로 잡혀간 신민 900여 명은 한주(韓州)로 이송되었다. 금 왕조는 그들에게 토지 15경(頃)을 내주고 농사를 지어 자급자족하도록 하였다. 조길과 조항은 그곳에서 죽을 때까지 살았다.

 

조길을 걸출한 예술가라고 한다면 명(明) 가종(嘉宗)(★★★★★★) 주유교(朱由校)는 뛰어난 목수라 할만하다. 주유교는 총명하였고 손제주도 좋았다. 평생 토목건축과 목공예 제작을 가장 좋아하였다. 목공일에는 어느 하나 정통하지 않은 게 없었다. 칠공예는 기묘하기 그지없었다. 목기 용구, 정대 누각을 한번 보기만 하면 제작할 수 있었다. 특히 영조(靈鳥)를 무척 좋아하였다. 궁에서 직접 톱과 도끼를 들고 회랑과 밀실을 제작하면서 흥겨워했다.

 

주유교가 가장 잘하는 것은 정밀한 조각이었다. 벼루 대, 화장 상자는 자신이 직접 조각하고 색칠하였다. 오색찬란하고 아름답고도 교묘하였다. 그가 조각한 팔목 병풍은 1척도 되지 않는 화면에 그려 넣은 화조와 고기, 벌레, 인물, 동물은 생동감이 넘쳤다. 주유교는 목공 제작에 몰두하면서 조정에는 관심조차 두지 않았다. 문무백관이 3년 동안이나 그를 보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태감 위충현(魏忠賢)(★★★★★★★)은 그의 그런 특징을 교묘하게 이용해 목공예 제작에 몰두할 때에만 상소문을 올렸다. 황제는 상소하는 내용을 듣고는 늘 “알았으니 그대들이 알아서 하게”라고 말했다. 그렇게 권력을 내려놓으면서 결국 대명 강산을 매장시켰다.

 

이런 까닭에 사람들은 제왕의 재능은 마땅히 문덕(文德)과 무공(武功)을 표현하는 데에 써야한다고 개탄하기도 한다. 문(文)을 논하면 마땅히 자연법칙을 세심하게 살피고 정통해 지도적 사상으로 정책과 법령을 제정해야 하고 ; 무(武)를 논하면 폭동을 제지하고 전란을 가라앉히며 사회를 안정시키고 백성을 단결시켜야 한다. 이것이 제왕의 웅대한 계획과 책략이라고 말한다. 고슬취생(鼓瑟吹笙)은 누가 하는 것인가? 시를 창화하고 곡을 짓는 것은 또 누가 하는 것인가? 문인묵객이 하고 예인이 하는 것이다. 황제가 된 자는 어떻게 국가를 다스리느냐를 탐구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강산은 지키지 못할 터이니.

 

 

유방(劉邦, BC256~BC195)은 큰일을 할 때면 다재다능할 필요가 없어도 성공할 수 있다는 이치를 우리에게 보여준다.

 

초한쟁패(楚漢爭霸) 이전에 유방은 여전히 작은 관리에 불과하였다. 출중한 재능이라 할 게 없었다. 반면에 다른 능력은 가지고 있었다. 장량(張良)이 제정한 국책과 전략을 쓸 줄 알았다. 소하(蕭何)에게 경제 계획을 맡겨 전시에 군수물자를 해결할 줄 알았다. 특출한 전략가요 전술에 능한 한신(韓信)을 쓸 줄 알았다. 타인이 가지고 있는 재능을 써서 자신의 ‘무능’을 메꾸고 천하의 주인이 될 수 있었다. 서화에 능했고 목공일에 뛰어났으며 공놀이에 몰두한 제왕과는 다르지 않은가. 자신이 재능이 없으면 타인의 재능을 활용할 줄 아는 능력! 망국으로 이끈 제왕과는 다르지 않은가.

 

큰일에 몰두하면 작은 것에 소홀하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조그마한 일에 착안하는 사람은 큰 이득을 놓치는 것은 당연하다.

 

아테네의 장군 테미스토클레스(Themistocles, BC528?~BC462?)에게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온다. 어느 날 연회석상에서 그에게 하프를 연주해 보라고 요청하자 대답하였다. “나는 그 방면에 정통하지 못합니다. 나는 작은 도시를 큰 도시로 만들 줄밖에 모릅니다.” 말을 할 때 그의 태도는 지극히 오만했지만 일반적으로 이 말을 가지고 정치가를 평할 수 있다.

 

우리 한번 역대 정치가를 관찰해보자. 정치가는 두 부류가 존재한다. 하나는 작은 도시를 큰 도시로 만들 수 있지만 하프는 잘 연주하지 못한다 ; 하프 연주에는 능통하지만 작은 도시를 큰 도시로 만들지는 못한다. 아니 오히려 큰 도시를 작은 도시로 만들어버리거나 아예 폐허를 만들어버리기도 한다.

 

★ 장공(莊公, BC706~662), 성은 희(姬), 이름은 동(同), 춘추시대 제후국 노나라의 16대 군주다.
★★ 소역(蕭繹, 508~555), 즉 양(梁) 원제(元帝, 552~554 재위), 자는 세성(世誠),자호 금루자(金樓子), 남란릉군(南蘭陵郡) 난릉현(蘭陵縣, 현 강소성 무진武進) 사람으로 원적은 동해군(東海郡) 난릉현(蘭陵縣, 현 산동성 난릉)으로 남북조시기 남조(南朝) 양(梁)의 제6대 황제다. 양(梁) 무제(武帝) 소연(蕭衍)의 일곱째아들이요 간문제(簡文帝) 소강(蕭綱)의 동생이다.
★★★ 혜제(惠帝, 사마충司馬衷, 259~307), 자는 정도(正度), 하남성 온현(温縣) 사람으로 서진 제2대 황제290~307 재위)이다. 진(晉)무제(武帝) 사마염(司馬炎)의 둘째아들이요 회제(懷帝) 사마치(司馬熾)의 이복형이다.
★★★★ 휘종(徽宗), 조길(趙佶, 1082~1135), 송나라 제8대 황제로 호는 선화주인(宣和主人), 서화가이다. 송(宋) 신종(神宗)의 열한번째아들, 철종(哲宗)의 동생이다. 전후로 수녕왕(遂寧王), 단왕(端王)에 봉해졌다. 철종이 원부(元符) 3년(1100) 정월에 아들 없이 병으로 죽으니 태후 향(向) 씨가 조길을 황제에 앉혔다. 이듬해에 연호를 ‘건중정국(建中靖國)’이라 개칭하였다.
★★★★★ 단연(端硯), 단계(端溪) 지방에서 나는 벼루로 호필(湖筆, 절강성 호주[湖州]시에서 나는 붓), 선지(宣紙, 안휘성 선성[宣城]시에서 나는 서화용 고급 종이), 휘묵(徽墨, 안휘성 휘주[徽州]에서 나는 유명한 먹)과 함께 문방사보(文房四寶)로 불린다.
★★★★★★ 가종(熹宗) 주유교(朱由校, 1605~1627), 명 왕조 제15대 황제, 광종(光宗) 주상락(朱常洛)의 장자, 사종(思宗) 주유검(朱由檢) 이복형이다. 16세 때에 즉위해 7년을 재위하였다.
★★★★★★★ 위충현(魏忠賢, 1568~1627), 자는 완오(完吾), 북직예(北直隷) 숙녕(肅寧, 현 하북 창주[滄州] 숙녕현) 사람으로 명 왕조 말기의 환관(宦官)이다. 희종(熹宗)의 총애를 받아 비밀경찰인 동창(東廠)의 수장(首長)이 되었고, 동림파(東林派) 관료를 탄압하며 정치를 농단(壟斷)해 명(明)의 멸망을 촉진하였다. ‘구천구백세’라 불렸다. 국정을 농단해 사람들이 “그저 충현만 알뿐 황상이 있는지를 모른다”라고 할 정도였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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