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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권홍의 '중국, 중국인' ... 중국역사에서 보는 중국인의 처세술(84)

청(淸)나라(1636~1912)가 『이십사사(二十四史)』를 간행할 때 건륭1)은 자주 자신이 직접 대조하고 검토하였다. 착오를 발견할 때마다 대단한 일을 해낸 것처럼 통쾌해 했다.

 

화신2)과 여타 대신들은 건륭의 그런 심리에 영합하였다. 건륭에게 건네는 필사본 초고에 찾기 쉬운 부분을 고의로 몇 글자를 틀리게 써서 건륭이 쉽게 교정할 수 있도록 했다. 그런 교묘한 방법을 이용하여 건륭의 학문이 깊다는 것을 과시할 수 있게 만들었다. 건륭의 면전에서 황제의 학문이 깊다고 아첨하는 것보다 효과가 있었다. 황제가 교정한 초고는 다른 사람이 절대 고칠 수 없었다.

 

그런데 건륭이라고 다 교정할 수 있었겠는가. 건륭이 교정하지 못한 부분도 많았다. 그런 오류가 지금까지도 전해지고 있다. 오늘 날에 전판(殿板) 서적에 존재하는 오류는 그렇게 만들어졌다.

 

화신은 이해타산이 뛰어났다. 셈이 빨라 건륭의 심리를 잘 파악하였다. 늘 적당한 방법을 찾아내어 건륭의 환심을 샀다. 화신은 건륭의 성정, 호오나 생활 습관을 세심하게 관찰하고 심도 있게 연구하였다. 건륭의 성깔, 애증 등에 대해서는 제 손금 보듯 훤했다. 왕왕 건륭이 무엇을 원하는지 건륭이 얘기하기도 전에 이미 추측해 냈다. 건륭이 생각지도 못한 것까지 그가 나서서 안배하기까지 할 정도였다. 그렇게 화신은 건륭의 총애를 받았다.

 

화신의 아첨은 두 가지 방면에서 뛰어났다. 하나는 지피지기라 적중률이 높았다. 다른 하나는 상대방이 부담스럽지 않게 제대로 편안하게 만들었다. 어떤 낌새도 없이 흔적도 남기지 않고 일을 처리하였다.

 

개인의 학문, 기지, 지위 등이 일정한 수준에 다다랐을 때에는 아첨은 능수능란하게 된다. 이미 ‘아첨’ 수준을 넘어 겸허하며 온화하다는 수준까지 이르게 된다. 전종서3)가 그렇다.

 

어느 해 겨울, 전종서가 일본을 방문하여 와세다(早滔田)대학 문학교수좌담회를 개최하였다. 『시가이원(詩可以怨)』(시는 사무친 감정을 풀어헤칠 수 게 한다)을 강연하였다. 서두를 이렇게 꺼냈다.

 

“일본에 와서 강연하는 것은 대담한 행동이라 하겠습니다. 중국학자가 와서 자기 나라 학문을 강연하는 셈입니다. 비록 내 전체가 담력이라고는 할 수 없다하더라도 큰 담력이 있어야 합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일본은 중국문화 여러 방면에서 뛰어나게 연구하고 있다는 것을 세계가 공인하고 있습니다. 일본어를 잘 알고 있는 중국학자도 일본인의 연구 성과에 진심으로 탄복하고 겸허하게 채용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가르침 받을 만한 신선한 내용을 강연한다는 것은 실로 쉽지 않은 일입니다. 나는 일본어를 모릅니다. 귀국의 한학이나 지나학의 풍성한 보물창고를 접하고 보니, 번호 자물쇠를 알지도 못하고 비틀어 열 공구도 없는 빈털터리가 커다란 금고를 보면서 어쩔 줄 몰라 얼빠진 모습으로 바라만 보고 있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그러나 무지하다는 것은 가끔 용기의 원천이 되기도 합니다. 이탈리아에 남을 조롱하는 말이 하나 있습니다. ‘그는 우산을 발명하였다.’

 

전하는 말에 따르면 이렇습니다. 산간벽지의 시골뜨기가 길을 걷고 있는데 갑자기 비가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공교롭게도 나무 막대기 하나와 포 하나를 들고 있었습니다. 사람이 급하게 되면 꾀가 생겨난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는 막대기로 포를 받치고 머리를 가렸습니다. 집에 도착할 때까지 물에 빠진 병아리처럼 비에 젖지 않은 것은 당연합니다. 그는 스스로 좋다고 생각한 나머지 인류에게 공헌했다고 느끼고 마땅히 세상에 공개하여야 한다고 여겼습니다. 그는 풍문에 도시에 발명품 특허청이 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었습니다. 기뻐서 막대기와 포를 들고 곧바로 도시에 갔습니다. 특허청에 가서 자신이 발명한 것을 보고하고 시연해 보였습니다. 특허청 직원이 그가 찾아온 이유를 듣고는 하하 크게 웃으면서 우산 한 개를 꺼내어 그에게 자세히 볼 수 있도록 건넸습니다.

 

나는 지금 그 특허청에 특허출원하러 간 시골사람과 같습니다. 예전에 우산을 본 적이 없는 것과 같이 내 학문은 얕고 견문도 좁습니다. 그러나 비를 피할 처마를 찾지 못할 때에는 막대기로 포를 받치는 것도 자력으로 임시변통하는 효과적인 방법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이 서두는 사실 두 단계를 설명하고 있다. 먼저 일본의 한학 연구를 중국인이 감히 등한시 할 수 없다는 말을 했다. 중국인 전문가라 할지라도 일본에서 중국 학문을 강연하면 청중의 수준을 충분히 평가하여야 한다는 뜻이다. 다음 단계는 자기 자신이 일본어를 알지 못하니 용기 이외에는 어떤 밑천도 없다는 말을 했다. 스스로 자신을 조소하는 것은 타인을 치켜세우는 방법 중 좋은 것임은 분명하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1) 건륭(乾隆), 청(清) 왕조 고종(高宗) 아이신기오로·홍력(愛新覺羅·弘曆, 1711~1799)의 연호다. 청 왕조 6대 황제이고 청나라가 입관한 후 제4대 황제다. 전후 60년으로 1736년부터 1795년 까지 재위하였다. 이 기간 동안 중국은 봉건사회 역사상 최고 수준에 이르렀다고 평가받는다.

 

2) 화신(和珅, 1750~1799), 성은 니오후루 하라(鈕祜禄) 씨, 원명은 선보(善保), 자는 치재(致齋), 자호는 가락당(嘉樂堂), 십홀원(十笏園), 녹야정주인(綠野亭主人), 만주(滿洲) 정홍기(正紅旗) 출신으로, 청 왕조 중기의 권신, 상인이다.

 

3) 전종서(錢鍾書, 1910~1998), 강소 무석(無錫) 사람으로 원명은 앙선(仰先), 자는 철량(哲良), 나중에 이름을 종서, 자는 묵존(默存), 호는 괴취(槐聚)로 바꿨다. 필명 중서군(中書君)을 사용하기도 했다. 현대작가, 문학연구가로 요종이(饒宗頤)와 함께 ‘남요북전(南饒北錢)’이라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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