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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권홍의 '중국, 중국인' ... 중국역사에서 보는 중국인의 처세술(82)

곽송령1)은 장작림2)의 수하였다. 부군단장으로 제2차 직봉전쟁3) 중에 봉군(奉軍)이 승리를 거두는 데에 혁혁한 공을 세웠다. 그는 신파(新派) 군인이었다. 군벌 부대 내의 낡은 규칙과 습관이 마음에 들지 않아 시도 때도 없이 군을 개혁하자고 진언하였다. 그러자 봉계(奉系) 원로들이 분노하기 시작하였다. 장작림과 심복 양우정(楊宇霆)도 갖가지 트집을 잡아 도외시했다.

 

곽송령은 화가 치밀었다. 1924년 11월 23일, 난주(灤州)에서 군사회의를 개최해 평화를 창도한다는 명분을 가지고 봉천(奉天)으로 회군한다고 선언한 후 병간(兵諫)을 준비하였다.

 

장작림은 봉천에서 소식을 접하고 급해졌다. 화도 치밀었다. 군대를 이끌고 나아가 막아서야 할지 말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장작림은 평상복을 입고 권총 두 자루를 가슴에 차고서는 검푸른 얼굴빛에 시뻘건 두 눈으로 혼자서 서재에서 서성거렸다. 부관과 위병들은 문 밖에서 숨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대기하고 있었다. 갑자기 서재에서 장작림의 명령소리가 들렸다.

 

“맹인 점쟁이를 불러라.”

 

맹인 점쟁이는 누구인가? 운세를 점치며 살아가는 사람이었다. 사실 완전한 맹인은 아니었다. 왼쪽 눈은 볼 수 있었다. 그럼에도 점치려면 맹인인 것이 효과적이라 하루 종일 선글라스를 끼고 다녔다. 그는 당시 장작림에게 ‘팔자’를 알려줬는데 무척 영험했다고 전한다. 장작림이 입신출세한 후에도 어려움에 봉착할 때마다 그를 찾아 점을 치고 답을 구했다. 그렇게 맹인 점쟁이는 몸값이 천정부지로 뛰어 ‘철취신산’4)이라는 별호를 얻었다.

 

사령부에 도착한 그는 장작림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 것을 감지하였다. 여러 마디 말을 감히 꺼내지 못하고 곧바로 황금빛 보자기를 홍목(紅木) 탁장 위에 올려놓고 ‘천간지지’가 새겨진 산가지를 늘어놓았다. 장작림은 손을 휘휘 저으며 말했다.

 

“지금 저런 장난감을 가지고 놀 시간 없어. 산가지 얼른 빼서 길흉화복이 어떤지 알아봐!”

 

점쟁이는 급히 산가지가 담긴 통을 두 손으로 받쳐 올렸다. 장작림은 성심으로 산가지 하나를 뽑았다.

 

점쟁이는 산가지를 받아들고 읽었다.

 

“검은 구름이 달을 가렸으나 오래가지 않는다. 복숭아꽃은 붉고 버들잎은 푸르니 경치가 아름답도다! 관공(關公)은 다섯 관문을 지나며 여섯 장수를 베니, 누가 오강(烏江) 초패왕(楚覇王)인가!”

 

역사에서 전해오는 이야기는 이렇다 : 관공은 조조에게 항복했다가 유비의 소식을 듣고 떠날 때 5개의 관문을 지나며 6명의 장수를 죽였다. 초패왕 항우는 마지막 전투에서 유방에게 패하여 오강에서 자결했다고 한다. 점쟁이의 말은 알쏭달쏭하여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었다. 장작림은 두 눈을 부릅뜨며 급히 물었다.

 

“쓸데없는 소리 나불대지 말고. 길하다는 말이냐, 흉하다는 말이냐?”

 

산가지에 나온 얘기는 이렇게도 해석할 수 있고 저렇게도 풀이할 수 있는 말이었다. 점쟁이는 이미 장작림의 마음을 꿰뚫고 있었다. 장작림이 듣기 좋은 소리를 해야 했다. 공연히 허튼소리를 늘어놓은 필요가 없었다. 점쟁이도 곽송령에 대한 소문을 들었던 터였다. 그 일에 대하여 물을 것이라는 것을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점쟁이는 재빨리 읍하면서 말했다.

 

“대길입니다. 큰 이로움이 있습니다. 최고의 괘입니다. 점괘가 말하길 곽송령은 검은 구름에 가린 달이고 장군님은 홍복제천(洪福齊天, 더할 수 없이 크나큰 복)입니다!”

 

장작림은 두 눈을 지그시 감은 채 생각에 잠겼다. 대사에 큰 지장이 없다고 여기고 봉천을 떠나지 않기로 결정하였다.

 

점쟁이는 생계를 위하여 길흉화복을 묻는 고객의 심리를 헤아렸다. 만족할 수 있도록 점괘를 풀었다. 오랜 세월 그러면서 고객을 치켜세우는 절묘한 능력을 키워나갔다. 그렇게 자주 해 보고는 틀리지 않을, 언제나 효과가 있는 비결을 만들어냈다 : 좋은 말은 하고 나쁜 말은 하지 않으며 좋은 결과를 알려주고 나쁜 결과는 숨겨두는 것이었다. 장작림과 같은 사람을 대하는 데에 무슨 어려움이 있었겠는가.

 

권력자를 모시는 애꾸눈 점쟁이는 항상 목숨이 위태로웠다. 살길을 모색하기 위해서는 상대 마음을 꿰뚫고 있어야 했다. 권력자의 곁에서 오랫동안 지내면서 그러한 훈련을 쌓아왔기에 결코 위험한 경우를 당한 적이 없었다.

 

강한 장수 밑에는 약한 병졸이 없다고 하지 않던가. 장작림의 심복 양우정도 특별히 추켜세우는 역할을 훌륭히 해냈다.

 

제2차 직봉전쟁은 직예파5)가 1922년 국회를 회복한 여원홍6)을 축출하고 조곤(曹錕)을 총통으로 선출하자, 반발여론을 등에 업은 손문(孫文)이 북벌을 선언하면서 시작되었다. 만주의 군벌 장작림과 절강독군 노영상(盧永祥)이 거기에 호응하였다. 직예파는 강소독군 제변원(齊變元)에게 절강을 공격하라고 명했다.

 

1924년 9월에 절강과 강소에서 벌어진 전쟁에서 처음에는 절강군이 승리했지만 직예파 손부방(孫傅芳)이 복건 군대를 이끌고 참여하자 노영상 군대는 궤멸되었다. 조곤은 손부방을 민절(閩浙, 복건과 절강)순열사로 삼아 절강을 맡겼다. 제변원과 노영상의 전쟁이 벌어졌을 때 장작림은 군대를 세 길로 나누어 관내(關內)로 들어왔다. 그에 맞선 오패부(吳佩孚)는 장성연선(長城沿線)에서 방어선을 폈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1) 곽송령(郭松齡, 1883~1925), 자는 무신(茂宸), 요녕성 심양시 동릉(東陵) 심정자(深井子)진 어초(漁樵)촌에서 태어났다. 당(唐)나라 명장 분양왕(汾陽王) 곽자의(郭子儀)의 후예다. 봉계(奉系)의 유명한 장수 중 한 명이다.

 

2) 장작림(張作霖, 1875~1928), 자는 우정(雨亭), 현 요녕성 해성(海城)시 사람이다. 장학량(張學良)의 부친이다. 봉천군벌의 우두머리로 마적 출신이다. 1919년에 동북 3성의 실권자가 되어 봉천 군벌을 형성하였다. 1924년에는 제2차 봉직전쟁(奉直戰爭)에서 대승하여 1927년 육·해군 대원수에 취임하였다. 군부를 조직하여 국민혁명군에 대항하다가 1928년 장개석(蔣介石)의 제2차 북벌 결과 패주, 선양으로 돌아가다 일본군이 꾸민 열차 폭발로 폭사하였다.

 

3) 직봉전쟁(直奉戰爭) 혹은 봉직전쟁(奉直戰爭)은 북양군벌(北洋軍閥)〔청(淸)나라 북양군(北洋軍)에 기반을 둔 군벌세력이다. 1916년 원세개(袁世凱)가 사망한 후 구심점을 잃고 분열해 안휘(安徽)군벌, 직예(直隸)군벌, 봉천(奉天)군벌로 분화되었다. 1926년까지 중국의 향방을 틀어쥔 실세였으나 국민당 북벌이 시작되면서 궁지에 몰렸고 1928년 최후의 북양 군벌인 장학량(張學良)이 동북역치(東北易幟)를 통해 국민정부에 합류하면서 외견상으론 소멸되었다〕의 파벌인 직예파(直隸派)와 봉천파(奉天派)가 북양정부의 패권을 놓고 1922년, 1924년 두 차례에 벌인 전쟁이다. 1차 전쟁은 북경정부를 장악한 직예군벌이 승리하였으나 2차 전쟁에서 최종적으로 봉천군벌이 승리하였다.

 

4) 철취신산(鐵嘴神算), 철취(鐵嘴)는 철로 된 입부리, 말재주가 뛰어난 사람을 말한다 ; 신산(神算)은 족집게, 영묘한 책략을 뜻한다.

 

5) 직계군벌(直系軍閥)은 민국 군벌 중 북양 군벌파에 속한다. 직계 군벌의 영수는 대부분 직예성(直隸省) 출신이다. 많은 정치 이념에서 서로 공감했기에 ‘직계(直系)’라 부른다. 원세개(袁世凱)가 죽은 후 북양군벌 중에서 떨어져 나와 직예(현 하북) 사람 풍국장(馮國璋)이 수령이 되면서 이루어진 일파다. 정치적으로는 친미, 친영이었다. 옛 지주계층을 대표한다. 대표적 인물로는 풍국장, 조곤(曹錕), 오패부(吳佩孚), 제섭원(齊燮元), 손전방(孫傳芳) 등이 있다. 풍국장이 죽은 후 조곤, 오패부가 연이어 수령의 위치를 계승하였다. 주요 장수로는 이순(李純), 왕점원(王占元), 소요남(蕭耀南), 진광원(陳光遠), 채성훈(蔡成勛), 손전방 등이 있다. 주요 할거지는 강소, 강서, 호북 3성이다. 풍국장은 원세개의 심복이었다.

 

6) 여원홍(黎元洪, 1864~1928), 자는 송경(宋卿), 청나라 말기와 중화민국 정치가이다. 호북성 황피(黄陂)현 여가하(黎家河, 현 대오大悟현) 출신으로 사람들은 ‘여황피(黎黄陂)’라 불렀다. 청나라 말기에 해군에 가입하였고 나중에 신군협통(新軍協統)를 역임하였다. 무창기의(武昌起義) 후에 호북도독(湖北都督), 중화민국부총통을 역임하였다. 원세개 대총통이 죽은 후 두 차례나 중화민국 대총통을 역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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