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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권홍의 '중국, 중국인' ... 중국역사에서 보는 중국인의 처세술(86)

지금 사람들은 온갖 수단을 동원하여 명예를 좇아 날카로운 말솜씨로 타인의 이름을 훼손하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다. 정말 알지 못하는 것일까? 사람과 만나고 일을 처리는 데에 덮어놓고 말을 많이 하면 정반대가 되어 되돌아온다는 것을. 심지어 건드리지 말아야 할 것을 실수하여 건드려 불운은 자처하게 된다는 것을 모르는 걸까? 천기를 누설한 사람은 쉽게 천벌 받는다. 사람을 잘못 건드리면 쉬이 원망 듣게 된다.

 

명(明, 1368~1644) 성조(成祖, 주체朱棣, 1402~1424 재위) 시기에 광동 포정사(布政使) 서기(徐奇)가 도성에 들어와 황제를 알현할 때 영남의 등나무 돗자리를 가지고 와서 경성의 관원들에게 선물하려고 했다. 그런데 생각지도 않게 경성에 들어서자마자 순성관에게 압수당했다. 순성관은 선물 주려던 관원 명단을 황제에게 보고하였다. 황제가 보자 선물 명단에 ‘여러 어진 사람이 모두 모여’ 있었지만 오직 양사기1) 이름만 보이지 않았다. 황제는 그의 청렴결백이 마음에 들어 단독으로 그를 불러서 물었다.

 

양사기가 말했다.

 

“당초 서기가 명을 받아 광동에 부임할 때에 여러 관원이 모여 증별(贈別)시를 지어 주면서 그를 배웅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등나무 돗자리로 회답하는 겸 선물을 준비했던 것입니다. 당시에 신은 병을 앓아 시문을 짓지 못했습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신도 선물 명단에 있었을 것입니다. 지금 많은 관원 이름이 명단에 있기는 합니다만 그들이 선물을 받을지는 아직 알 수 없습니다. 게다가 물건이 그리 귀한 것도 아니니 다른 목적이 있다고 볼 수 없습니다.”

 

양사기가 상황을 이해시키자 황제의 의심도 말끔히 사라졌다. 선물 명단을 관원에게 주면서 불사르라고 했다. 다시는 그 일을 캐묻지 않았다.

 

양사기는 실로 방편을 폈다고 아니할 수 없다. 시비를 가리지 않은 큰 일물임에 틀림없다. 그 명단을 불살라 황제가 대신들에게 다시는 의심을 가지지 않게 만들었다. 많은 관원이 무망한 재앙을 면할 수 있게 했다. 양사기는 기회를 틈타 변설을 늘어놓지 않았다. 자신의 출세를 위하여 마음을 쓰지도 않았다. 그런 큰 지혜는 후덕하다거나 충군했다는 몇 마디 말로 덮을 수는 없는 일이다.

 

송(宋, 960~1279)대 조보2)는 두 왕조의 승상을 역임하였다. 그는 일찍이 커다란 항아리를 좌석의 병풍 뒤에 놓아두었다. 어떤 사람이 상소를 올려 궁중의 민감한 사항을 언급하면 조보는 골라내어 항아리 속에 넣어두었다. 항아리가 가득 차면 사람을 시켜 교외로 가지고 가서 불태우게 했다.

 

그런 청정무위 처세의 지혜는 황로(黃老)사상을 품고 있다. 일찍이 송대의 다른 승상 이항3)도 인정하면서 말했다.

 

“현재 국가에서 실시하는 제도는 이미 대단히 치밀하고 완비돼 있다. 내가 비록 재상이라는 높은 자리에 앉아있으나 실제 정사에는 크게 작용하지 못한다. 만약 있다면 그것은 그저 궁정 내외에 관련된 이해관계의 진정서, 상주서를 일률적으로 황상께 보고하지 않는 그런 방법으로 국사를 보좌하는 것일 따름이다. 경솔하게 궁정 내외에서 제기하는 건의를 하나하나 다 실행하면 너무나 큰 손실을 가져오게 된다. 건의하는 사람은 그저 일시적으로 향상하려 노력하는 것뿐일 가능성이 많다. 어찌 백성을 위하여 고려한다고 볼 수 있겠는가?”

 

당시에 많은 관원이 정치 기관에 가득 차 있어 사회의 실제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다. 자기 재능을 표현하려고 여러 경로로 상소하였다. 경솔하게 새로운 기구를 만들어야 한다느니 제도를 개혁해야 한다느니 하는 책략을 제시하였다. 그런 사람들은 그저 종이 한 장으로 자기 의견을 개진했을 뿐이었다. 백성에게 많은 손실을 끼칠 가능성이 많았다.

 

나중에 청의4) 풍조가 성행하자 폐단이 남김없이 드러났다. 청의파(淸議派)는 미국 한학자 비정청(費正淸, John King Fairbank)이 말한 ‘안락한 의자에 드러누워 있는 전략가’였다. 말솜씨를 팔아먹는 대표적인 사람들이었다. 청(淸)나라 말기 양무(洋務)운동 시기에 청의로 탄핵하는 풍조가 다시 성행하였다.

 

이홍장5)은 공업을 창건하고 상무를 창조했으며 철로를 깔고 전보를 활성화 했다. 그런 일 모두 탄핵 당했다. 1881년에 이홍장이 개평(開平) 탄광 운수를 위하여 첫 번째 당서(唐胥)철로를 건설하였다. 철로가 개통되자 상주서가 빗발쳤다. 고의로 철로를 ‘말이나 다니는 길’이라 간주해 버렸다.

 

반대파는 자신들이 생각해낼 수 있는 모든 이유를 생각해 냈다. 예를 들어 기차가 다니면 동릉을 진동시키게 된다는 둥 검은 연기는 농가에 손해를 끼친다는 둥 서민이 직장을 잃는다는 둥 갖가지 이유를 가져다 붙였다. 우여곡절 끝에 철로는 운행하도록 허가 받았지만 처음에는 말이 기차를 끄는 방법만 허가 받았었다. 말이 기차를 끈다?! 철로에 대한 풍파는 1889년까지 지속되다가 이홍장이 이미 착공한 진통(津通)철로까지 중지하게 되는 사태에 이르게 된다.

 

이홍장은 그런 행태를 증오하였다. 언관(言官)제도는 일을 그르치게 만든다고 여겼다. 그가 보기에 언관들은 어릴 적에 급제하여 세상사를 알지 못하고 사실의 득실과 국가의 이해를 고려하지 않고 아무렇게나 제목을 골라 입에서 나오는 대로 거침없이 지껄이듯이 의론을 제기하면서, 두각을 나타내기는 하지만 국가대사는 방해받는다고 생각하였다.

 

다른 각도에서 보자. 침묵은 금이라는 말은 자신의 맑고 깨끗함을 유지하는 최후의 방식은 아니라고는 할 수 없다.

 

“컬러 티브이는 세상을 갈수록 다채롭게 만드니 흑백을 분별할 수 있는 사람은 갈수록 줄어든다.”

 

이 말은 현대인이 절실히 체득하는 미망과 실의를 표현하고 있다. 이 ‘언어의 경제성’ 시대에 ‘떠들어 대고 쉬지 않고 돌아다니는’ 중에 진정으로 인내심을 가지고 침묵하고 조용하게 지내는 사람은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 가면 갈수록 고립되고 고독해지고 있다.

 

그러나 그럴수록,
“침묵은 금이다.”

 

라는 말은 실천과 검증을 견디어내는 감언이 됐다. 말재주를 파는 것과 비교하면 침묵은 맑고 깨끗한 자아의식의 체현이다. ‘침묵권’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 상해를 피할 수 있게 하고 타인의 존경을 받을 수 있게 할 수 없을까.

 

냉정하게 경청하는 사람은 환영받을 뿐 아니라 점차 경험을 쌓을 수 있게 만든다. 반면에 촉새처럼 나불거리면 물이 새는 배처럼 모든 사람이 떠난다. 말이 많으면 실수하게 되고 말을 많이 하면 할수록 실패를 맛보게 된다.

 

영원히 당신을 팔아넘기지 않는 것은 침묵뿐이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1) 양사기(楊士奇, 1366~1444), 이름은 우(寓), 자는 사기(士奇), 호는 동리(東里), 강서 길안부(吉安府) 태화(泰和)현〔현 강서 길안시 태화현 징강진(澄江鎭)〕 사람이다. 명 왕조 초기 중신이요 학자다.

 

2) 조보(趙普, 922~992), 자는 즉평(則平), 유주(幽州) 계주(薊州)〔현 천진(天津) 계주(薊州)〕 사람으로 나중에 낙양(洛陽)으로 이주하였다. 오대(五代)에서 북송(北宋)초까지 유명한 정치가, 북송의 개국공신이다.

 

3) 이항(李沆, 947~1004), 자는 태초(太初), 명주(洺州) 비향(肥鄕)〔하북 한단(邯鄲)〕 사람이다. 북송(北宋) 시기 명재상이요 시인이다.

 

4) 청의(淸議), 동한(東漢) 후기에 관료 사대부 사이에서 인물을 품평하는 풍조가 일었는데 그것을 ‘청의’라 한다. 관료 사대부는 태학을 중심으로 ‘청의’를 통하여 자신이 가지고 있던 현실 통치에 대한 불만을 표현하였다. 통치자에게 중임 받아 외척과 환관이 권력을 전횡하면서 조성된 동한 왕조의 쇠퇴 국면을 만회하려 했다. 현재까지 청의 운동에 대한 총체적 평가는 일치된 의견이 없다. 후외려(侯外廬)는 청의란 하향세를 나타내는 외척과 발호하는 환관, 서로 연관돼 있는 호강 지주 사이에 내홍 때문에 청의 기풍이 폭발했다고 여긴다. 진인각(陳寅恪)은 사대부와 환관 사이에서 이익, 가치관 차이 때문에 청의가 폭발했다고 여긴다. 여영시(余英時)는 사대부가 자각하게 되면서 청의가 폭발적으로 일어났다고 본다. ‘청의’는 통치자의 지지를 받았지만 동한이 멸망으로 가는 형세를 만회하지 못했다. ‘청의’는 위진 시기의 사대부가 품평하는 데에 심대한 영향을 미쳤다. ‘청의’ 풍조는 이후에도 사라지지 않고 청말까지 이어졌다.

 

5) 이홍장(李鴻章, 1823~1901), 본명은 장동(章銅), 자는 점보(漸甫), 자불(子黻), 호는 소전(少荃, 소천少泉이라 하기도 한다), 만년의 호는 의수(儀叟), 별호는 성심(省心), 안휘 합비(合肥)사람으로 만청(晚清)시기 명신, 양무(洋務)운동의 중요 영수 중 한 명이다. 세인들은 ‘이중당(李中堂)’이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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