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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권홍의 '중국, 중국인' ... 중국역사에서 보는 중국인의 처세술(77)

일을 하는 데에 흥이 극에 달하게 하지 말아야 하고 힘을 쓰는 데에 극한으로 하지 말아야 한다. 적당할 때에 그치고 적절하게 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다. 가무와 잔치가 최고조에 달했을 때 스스로 홑옷을 걸치고 가차 없이 떠나는, 그런 마음이 넓은 사람은 관건이 되는 곳에서 돌연히 고개를 돌릴 수 있어서 사람들에게 부러움을 산다.

 

인적이 끊긴 깊은 밤에도 여전히 연회를 베푸는 데에 바쁜 사람은, 이미 끝도 없는 고해에 떨어졌음에도 스스로 살피지 못하게 된 것이나 다름없으니, 실로 가소롭지 않은가. 사람은 자기 욕망을 제어할 수 있어야 즐거움 끝에 슬픔이 오는, 흥진비래를 피할 수 있다.

 

속담은 말한다.

 

“세상사를 통찰하는 것이 학문이며 인정을 연달(練達)하는 것이 문장이다.”(曹雪芹《紅樓夢》第5回)

 

인정과 세상사에 통달하면 사람의 뜻을 이해하고 상대방의 개성과 호오를 이해하며 타인의 약점을 양해하고 자신의 자존심을 돌볼 수 있다. 이것을 할 수 있을 때 인내심이 생기고 관용과 도량이 생긴다. 옛사람들은 관용으로 타인을 대하는 것에 주의하였다. ‘용서〔서(恕)〕’, ‘참음〔인(忍)〕’을 강조하였다. 사람을 대우할 때,

 

“덕으로 덕을 갚고 덕으로 원한을 갚으라.”

 

라고 했다. 그러면 사람 사이가 조화롭게 되고 자연스럽게 되며 즐겁게 살 수 있다.

 

양공(襄公) 28년, 제(齊)나라의 경봉1이 오(吳)나라로 돌아가 그의 종족을 모아 거주하자 과거보다도 더 부유하게 되었다. 자복혜백(子服惠伯)이 숙손목자(叔孫穆子)에게 말했다.

 

“하늘은 어쩌면 음란한 자에게 돈을 벌게 하는 모양입니다. 원래 부유하였던 경봉이 이제 더 부자가 됐으니 말입니다.”

 

목자가 말했다.

 

“좋은 사람이 부자가 되는 것은 상(賞)이라 하고, 음란한 자가 부유하게 되는 것은 앙(殃)이라 합니다. 하늘이 그에게 재앙〔앙(殃)〕을 내린 것입니다.”

 

소공(昭公) 4년, 경봉이 자아(子雅), 자미(子尾)를 공격하려고 계획하다가 발각된 후 자미는 경봉의 아들 경사(慶舍)를 죽였다. 자아와 자미는 제나라 공자(公子)다. 그해 제나라는 최(崔) 씨의 난 때문에 여러 공자들이 흩어져 있었다. 경 씨가 오나라로 도망가자 그들은 공자들을 불러 모아 잃었던 성을 하나씩 회복하였다. 그런 후에 안자(晏子)에게 패전(邶展)성 60좌를 상으로 내렸다. 그러나 안자는 받지 않았다.

 

자미가 물었다.

 

“부귀는 사람들이 꿈에도 그리는 것인데 당신은 어찌하여 받지 않는 것이요?”

 

안자가 답했다.

 

“경 씨의 채읍은 욕망을 만족시켰기에 멸망했습니다. 나는 성을 가지겠다는 욕망을 만족시키고 싶지 않습니다. 패전(邶展)을 받는다면 욕망을 만족시킬 수는 있습니다. 일단 욕망을 만족시키면 얼마 없어 저는 멸망할 것입니다. 그래서 패전을 받지 않는 것입니다. 내가 부귀를 싫어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부귀를 잃을 것을 염려하기 때문입니다. 부귀는 비단의 폭과 같습니다. 절제하지 않으면 비단은 다른 데로 가버립니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1) 경봉(慶封), 제(齊)나라 대신이다. 최저(崔杼)와 공모해 제장공(齊莊公, BC553~548 재위)을 시해한 후 좌상(左相)이 되어 국정을 농단하였다. 장공 시해 후 2년 만에 최저의 전처 아들들인 성(成), 강(彊)과 후처 당강(棠姜) 소생의 명(明)이 종주(宗主) 지위와 영읍(領邑) 승계 문제를 놓고 분란을 일으키자 그 틈을 이용해 최저 가문을 멸망시켰다. 이듬해 BC545년에 경봉 일파의 전횡과 황음무도함에 불만을 품은 대부 고채(高蠆)와 난조(欒竈)가 노포별(盧蒲嫳), 노포계(盧蒲癸) 형제, 왕하(王何)가 공모해 경 씨 일족을 멸문시키고 재산을 몰수하였다. 그때 경봉은 노(魯)나라로 도망했다가 오(吳)나라로 도망쳐 구여(句餘)에게서 주방(朱方) 땅을 분봉 받고 정착하였다. 6년 후 BC539년에 초나라 대부 굴신(屈申)이 채(蔡)·진(陳)·허(許)·돈(頓)·호(胡)·심(沈)·회이(淮夷) 등의 연합군을 이끌고 오나라를 공격하였을 때 처형당했다. 이후 그 후손의 분명한 사적을 알 수 없지만 전국시대 말기에 진왕(秦王) 정(政, 진시황秦始皇)을 시해하려다 실패한 자객 형가(荊軻)가 그 자손이라 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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