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동학이었고 친구였지만 나중에는 중요한 자리에 있게 되는 사람이 생기게 마련이다. 함께 있을 때에는 농담하면서 웃고 즐길 수 있지만 다른 사람 앞에서는 그의 체면을 살려주어야 한다. 친구의 자존감을 없애는 언행을 삼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좋지 않은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진승1은 어릴 적에 집안이 빈곤하였다. 남의 집에 머슴살이 하며 살았다. 그는 원대한 뜻을 품고 있었지만 기구한 삶을 살고 있었다. 언제 곤경에서 빠져나올지 알 수 없었다. 천리마가 마구간에 갇혀 있는 것처럼 마음이 답답하고 우울하였다. 어느 날, 진승은 손에 농기구를 들고 일꾼들과 함께 언덕 위에 올라 쉬고 있었다. 막연하게 돌이켜 보고는 실망스러움에 탄식하며 말했다.
“나중에 부귀(富貴)해지더라도 서로 잊지 말자.”
주변 앉아있던 일꾼들이 비웃었다. 그러자 진승은 탄식하였다.
“연작(燕雀)이 어찌 홍곡(鴻鵠)의 뜻을 알겠느냐.”
나중에 진승이 반란을 일으켜 격문을 돌리자 천하가 응대해 일어섰다. 진승의 군대는 날로 강대해져서 나중에 스스로 왕이 되었다. 예전에 그와 함께 일했던 일꾼들이 진승의 이야기를 듣고는 이득을 좀 볼까 하고 전쟁의 매서운 불길을 마다하지 않고 전승에게 달려가 의탁하였다. 궁문 앞에 도착하여 다 같이 궁문을 두드리면서 소리쳤다.
“우리는 진승을 보러 왔소. 진승을 만나러 왔소!”
대왕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고 있는 사람들 모두 남루한 옷을 입고 새까만 얼굴을 하고 있지 않은가. 문지기는 무례하다며 모두 체포하였다. 궁중의 관리들은 이리저리 둘러보며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진승의 옛 친구라 어쩔 수 없이 진탕 먹고 마시게 자리를 마련하였다. 술에 취한 사람들이 미친 듯이 큰소리로 외쳤다.
“진승아, 진승아, 정말로 너에게 오늘이 있을 줄 꿈에도 몰랐다!”
저마다 한마디씩 자신들과 함께 있던 시절의 진승에 대한 가소로운 일들을 늘어놓았다. 궁궐의 어떤 사람이 왕의 권위를 손상시키는 그들의 말을 진승에게 전했다. 결국 진승은 모두 참수토록 명을 내렸다.
군중의 장수들은 진승이 잔인함을 보면서 부귀를 함께 누릴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불화반목하기 시작하였다. 게다가 진승이 사람을 잘못 쓰고 형벌이 도를 넘자 결국에는 마부였던 장가2에게 암살당했다. 왕이 된지 6개월 밖에 되지 않은 때였다. 제
뜻을 제대로 펴보지도 못했을 뿐 아니라 목숨까지 잃었다.
슬픈 이야기이다.
중요한 자리에 있는 사람은 체면과 위신에 지극히 민감하다. 어쩌면 우리가 진승과 같은 자리에 앉아보지 않았기 때문에 이해할 수 없을지는 모르겠다.
세상을 살면서 처신하고 일을 처리하면서 ‘금기’는 반드시 알고 있어야 한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1) 진승(陳勝, ?~BC208), 자는 섭(涉), 양성(陽城)〔현 하남 등봉(登封)시 동남, 일설에는 현 하남 상수(商水)현 서남〕 사람이다. 진(秦)나라 말기에 농민봉기를 이끈 지도자 중의 한 명이다. 진이세(秦二世) 원년(BC209), 오광(吳廣)과 연합해 농민군을 이끌고 대택향(大澤鄕)〔현 안휘(安徽) 숙수(宿州)시〕에서 봉기하였다. 진나라에 대항하여 기의한 반란군 선구다. 진군(陳軍)을 점령한 후 칭제하여 장초(張楚) 정권을 세웠다. 나중에 진나라 장수 장한(章邯)에게 패하고 마부 장가(莊賈)에게 피살된 후 망탕산(芒碭山)에 묻혔다. 유방(劉邦)이 칭제한 후 진승을 ‘은왕(隱王)’으로 추봉하였다.
2) 장가(莊賈, ?~BC208), 진승(陳勝)의 마부, 나중에 진(秦)나라 장수 장한(章邯)의 꼬드김에 반란을 일으키고 진승을 죽였다. 진승의 옛 부하 여신(吕臣)이 진현(陳縣)을 탈환한 후 장가를 처단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