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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권홍의 '중국, 중국인' ... 중국역사에서 보는 중국인의 처세술(80)

원세개는 격앙하며 말했다.
“그저 황상께서 명령을 내리신다면 나는 목숨을 걸고 반드시 실행할 것이오.”

 

담사동이 말했다.
“다른 사람은 쉽게 다룰 수 있소. 영록은 그리 녹녹한 사람이 아니오. 그를 죽이기가 쉽지 않을게요.”

 

원세개는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
“무엇이 그리 어렵다는 말이오? 영록을 죽이는 일은 개 한 마리 죽이는 것과 다르지 않소.”

 

담사동은 조급해 하며 말했다.
“그렇다면 우리가 지금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좋겠소? 내가 곧바로 황상께 아뢰리다.”

 

원세개가 잠시 생각하다 말했다.
“너무 성급하오. 내가 지휘하는 군대의 총탄과 화약은 모두 영록의 손아귀에 있소. 군관 중에도 그의 사람이 적지 않소. 내가 먼저 천진(天津)으로 돌아가 군관을 바꾸고 총탄을 준비해야만 거사를 치를 수 있소.”

 

담사동은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원세개는 꾀가 많은 사람이었다. 바람을 보며 돛을 조종하듯 정세 변화를 봐가며 행동하는 인물이었다. 강유위와 담사동은 그의 사람됨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원세개는 광서제에게 충성을 다하겠다고 표시했지만 실권을 장악하고 있는 사람이 자희태후요 그녀의 심복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벌써부터 자희태후의 심복과 결탁하여 내통하고 있었다. 원세개는 진행되고 있는 정치투쟁에서 자희태후가 우위를 점하고 있다고 더욱 믿게 되었다. 그래서 원세개는 먼저 담사동을 진정시키고 영록에게 밀고하기로 결정해 버렸다.

 

원세개는 천진으로 돌아간 후에 담사동이 한밤중에 찾아와 자신에게 한 말을 한 자도 빠뜨리지 않고 영록에게 고해바쳤다. 영록은 놀랐다. 그날 북경 이화원으로 달려가 자희태후를 만난 후 광서제가 어떻게 거사를 준비하고 있는지 보고하였다.

 

이튿날 날이 밝기도 전에 자희태후는 노기충천하여 황궁으로 들어가자마자 광서제를 영대(瀛臺)에 유폐시켜 버렸다. 곧이어 변법을 폐지한다는 법령을 내리고 유신변법을 추진하던 인사와 관원을 체포하도록 명했다. 변법은 그렇게 103일 동안 시행되다가 종말을 고했다. 담사동, 임욱(林旭), 유광제(劉光第), 양예, 강광인(康廣仁), 양심수(楊深秀)는 북경 채시구1)에서 목이 떨어졌다.

 

안면을 바꾸듯 시도 때도 없이 태도를 바꾸는 소인은 쓸 필요가 없다. 그런 소인을 몰라서도 안 된다. 앞에서는 이런 얼굴을 하고 뒤에서는 저런 얼굴을 한다. 강물을 건너면 다리를 부숴버린다.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그들은 당신이 잘 나갈 때에는, 얼마 전에는 ‘개의 눈이 사람을 낮게 보듯이’ 멸시하는 태도를 가지고 있었더라도 곧바로 권세 있는 자에게 아부하며 빌붙어 웃는 얼굴을 들이민다. 당신이 실패를 겪어 좌절할 때에는 회피하여 멀리하면서 온통 깔보는 얼굴로 쳐다본다. 심지어는 우물에 빠진 사람에게 돌 던지듯이 해를 끼친다.

 

원세개처럼 간웅과 같은 소인은, 공을 가로채어 상을 타려하고 출세하고 영달을 노리면서 타인의 머리가 떨어지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다.

 

소인의 마음은 실로 칼과 같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1) 채시구(菜市口), 청대(清代)에 사형을 집행하던 장소다. 북경은 후통(胡同)도 많고 거리도 많지만 가장 유명한 곳은 선무문(宣武門) 밖에 있는 채시구이다. 채시구가 유명하게 된 것은 그곳이 사람을 죽이는 장소, 즉 형장이기 때문이다. 적지 않은 명사가 채시구에서 참수 당했다. 희문(戲文)에서 ‘추출우문참수(推出午門斬首)’라 부르는 구절은 채시구로 끌려가 ‘출홍차(出紅差)’〔옛날에 범인을 참수하면 피를 봐야했기에 속칭 출홍차라 하였다〕하여 머리를 잘랐다. 머리가 잘린 다음 범인의 시체를 옮기고 황토를 뿌려 피의 흔적을 없앤 후 그 위에서 채소를 팔았다. 채소 장사가 잘됐기에 채시구라는 이름으로 유명해졌다. 채시구는 천 년 전 요(遼)대 때는 안동문(安東門) 밖 교외였고 금(金)대는 시인문(施仁門) 안쪽의 정자가(丁字街)였다. 명(明)대는 경성에서 가장 큰 채소 시장으로 길가에 채소를 파는 가게가 즐비하였다. 이른바 ‘사구성(四九城)’ 사람들이 그곳에서 채소를 사가니 채소 파는 가게가 집중된 거리를 ‘채시가(菜市街)’라 불렀다. 청(清)대부터 ‘채시구(菜市口)’라 고쳐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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