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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정의 '길 가는 그대의 물음' ... 제주문화 이야기(5) 향년 88세, 건장한 노년 화가의 각오

 

◆ 민간화가의 인생 도전

 

팔순(八旬)이면 누구라도 쉬는 것이 통념이나 제주인들은 오몽(움직임)해질때까지 부지런하게 일을 하는 것이 상식이다. 향년 88세, 90을 바라보는 나이에 그림을 열정적으로 그리는 화가로는 최고령의 나이라고 할 수 있다. 문정호 화백이 그 당사자이다.

 

필자는 3년 전에 화백을 만나고 눈이 번쩍 트인 적이 있었고, 많은 화가들이 제주 예술의 ‘불모지론’에 가려서 자신들의 DNA에 담긴 색채 감각의 아름다움을 보지 못하는 까막눈의 현실을 개탄한 적이 있었다. 하기야 수많은 외세의 침략으로 제주에 남아 있는 유물·유적이 극히 드무니 예술의 불모지라고 할 법도 하다. 그러나 남아있는 제주의 회화 전통에서 보이는 번뜩이는 색채의 아름다움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대단하다.

 

문정호는 귀가 잘 안 들리는 것을 빼면은 아직까지도 건장한 노년이라는 것을 과시한다. “앞으로의 계획이 있습니다. 선생님처럼 제주의 돌담을 연구하듯 그 돌담을 그리고 그 밭담 안에서 제주 사람들이 일하는 모습을 그릴 겁니다. 그릴 것이 너무 많이 남았습니다.” 라는 문정호의 각오를 듣는다.

 

집에서 그림을 그리는 시간은 밥 먹는 것도 잊어버릴 정도로 그림을 10시간 이상 그린다고 고령의 배우자가 말한다. “이 양반은 그림을 그릴 때 방해를 하면은 화를 버럭 내서 이녁 하는 대로 놔둬야 해요. 밥도 제때 먹지도 않고... 그림을 그리다가 당신이 필요할 때 먹어야 하기 때문에, 밥 먹으라고 하지 않는 것이 자기를 방해하지 않고 도와주는 거랍니다.”

 

3년 전 필자는 나무판에 그림을 그리는 것도 좋지만 혹시 가능하다면 보존 문제가 있기 때문에 캔버스로 바꿔보면 어떻겠냐고 문의 한 적이 있었다. 이번 전시에 캔버스로 그린 그림들이 여러 점 나왔는데 문정호 선생에게 캔버스가 어떤 지를 물어보니, 대뜸 말하길 “캔버스는 나무보다 색상이 가볍게 먹는다”고 했다. 그러면서 “다음에는 오동나무 판자를 구해서 그 위에 그림을 그리게 되면 자신이 생각하는 색깔이 더 잘 나올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맞다. 화가들은 자신이 선호하는 재료가 있다. 종이, 캔버스, 나무, 철판, 스치로폼, 은박지 등 세상의 다양한 재료들 가운데 화가마다 선택해야 되는 조건과 상황이 있기 마련이고, 그것이 어떤 경우에 있어서 손에 익음으로써 작업 자체가 수월해지기 때문에 새로운 재료를 찾기가 싶지 않다. 대개 미술은 창작 형식을 결정하는데 재료의 중요성이 매우 크게 작용한다.

 

필자는 2020년에 문정호를 시민화가라고 불렀었다. 그 때만해도 민간 화가를 현대적인 용어로 불러서 ‘시민화가’라고 명명했다. 그러나 돌이켜 생각해보면, 시민화가라는 말이 작가의 성격을 말하기에는 어딘가 부족한 감이 있었다. 민간화가란 좋아서 취미로 그림을 그리는 민간인이라는 의미로써, 전업화가나 전문 화가에 대비되기 때문에 민간화가가 더욱 작가의 성격에 설명하는데 잘 들어 맞는다. 지난 2020년 한라일보 김유정의 21세기 다시 쓰는 제주문화사전 23. 시민화가 문정호 “제주신화 서천꽃밭의 부활 아름답고 찬란한 색채화”에서 발췌해 보면,

 

아카데미에서 배운 적 없이도 이처럼 찬란한 색채가 가능한 역설을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문정호의 출현은 정확한 형태 위주의 그림을 예술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 오방색의 화려한 색채를 미신으로 취급하는 우리의 미학적 허위의식이 깨쳐지는 기회가 됐음이 분명하다. 예술은 ‘놀이하는 인간’에서 무엇인가 ‘특별하게 만드는 미학적 인간’으로의 진화이다. 문정호가 80 평생까지 꿈꾸었던 아름다움의 근원에는 우리네 자연의 색이 어우러진 서천꽃밭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 아니 그곳이 진정 새소리, 곤충의 날개짓, 물소리, 바람 소리, 밤사이 꽃 피우는 소리가 들리는 바로 제주인의 상상력의 고향, 한라산이 아니었을까.

 

우리는 일상에서 아름다운 색채를 쉽게 만날 수 있었으나 일제강점기의 무속 탄압, 또 새마을 운동 때 벌어진 미신타파라는 명분을 가지고, 지난 시대의 전통문화 말살에 동참하면서 파괴되다가 남은 우리 생활문화 유산들이 그 때를 기회 삼아 모두 육지로 반출되기에 이르렀고, 그 이후 자신의 전통에 대한 부정적인 이데올로기가 형성되면서 모든 오방색 컬러의 아름다운 작품들이 미신의 일부로 여겨져서 우리와는 무관한 허접한 것들이 돼 버렸다. 1970년대 초부터 불어 닥친 새마을의 새 것 운동은 시멘트 중심의 운동을 벌이면서 과거 종이, 나무, 돌, 옹기 작품들은 일거에 철거 대상이 되었고, 제주를 떠나게 되면서 제주에는 제주의 전통 문화 유산들이 거의 남아있지 않게 되었다.

 

현재의 우리는 지난 시간 전통의 산물이다. 스스로 새것이 생겨나도 그것이 어떤 전통을 형성하기에는 절대적인 시간이 필요하다. 부모 없이 내가 있을 수 없으며, 현재의 나 없이 미래를 이어갈 수가 없다. 한 때 실용주의적이고 외세의 종교관에 지배된 생각이 지난 세월 우리들의 오래된 시간의 가치를 한 순간에 팽개쳐버리는 매우 어리석인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인간의 장소에 대한 정체성은 곧, 그 땅의 자연과 기후 환경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사회적 의식에 영향을 받기도 하지만 근원적으로는 제주 섬의, 생산의 힘으로부터 그 장소에 대한 활력이 생기고 문화적인 성과들이 새록새록 태어나게 되는 것이다.

 

 

제주의 채색화가 아름다운 것은 그 땅의 자연과 생태, 해양환경으로부터 반영된 섬사람들의 무의식적인 미의식의 산물이었다. 3계절 아름다운 꽃이 피고, 거기에 사는 해맑은 새소리, 맑은 물소리와 깊고 푸른 바다의 우렁찬 파도 소리가 섬의 심장을 요동치게 한 것이다. 때때로 몰아치는 폭풍의 격랑 아래, 알록달록한 어류들이 노는 아름다운 산호의 바다는 하늘, 땅, 바다, 해저까지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주면서, 인간 사회의 우리에게 컬러 감각을 일깨웠던 것이다.

 

제주 말에 삼색물색(三色物色)이라는 말이 있다. 삼색(三色)은 적(赤)·청(靑)·황(黃)이라는 정색(正色)을 말하며, 물색(物色)은 사물의 색이라고 하여 모든 컬러를 일컫는 말이 된다. 즉, 삼색물색은 적·청·황·흑·백의 오방색 컬러를 말하는 제주식 색채 이름이다. 이 삼색은 흑과 백을 포함하여 오방정색(五方正色)으로써 이것들이 서로 교합(섞여서)하여 다양하고 새로운 간색(間色)이 만들어진다.

 

서양의 색 또한 빨강·노랑·파랑의 삼원색(三原色)이 섞여 중간색이 생기면서 세상의 색깔들을 만들어 낸다. 명도는 색의 밝기를, 채도는 색의 투명도를 일컫는 말이다. 색은 빛의 작용에 의해서 깊이를 주기도 하고 미묘한 색으로 나타난다. 인상주의 화가들이 추구했던 외광파(外光派)라는 이름에서 보듯이 일상의 사물들과 자연의 사물들이 빛의 감도에 따라 변하는 색채를 가지고 있어 형태의 실루엣을 표현함으로써 매우 아름다운 색채를 만들어낸다. 당시 떠오르는 강력한 경쟁자였던 사진과의 전쟁에서 회화가 살아남을 수가 있었다.

 

◆ 문정호의 아름다운 그림과 목각 채색

 

<제주 내왓당 무신도>는 매우 오묘하면서도 깊은 아름다움이 있다. 그 무신도는 멀리 고구려 고분벽화의 고졸미와 같은 분위기를 띠고 있으며, <고려불화>의 이상적인 현란한 아름다움이 들어 있다. 그 <무신도>에서는 깊은 영혼의 소리가 울려 나온다. 또 <제주문자도> 는 채색화의 아름다움을 마음껏 발산한다. 산 좋고 물 좋은 자연환경 덕에 뒤편으로 산이면서 눈앞에는 바다가 펼쳐진 해양환경 탓에 바다의 물고기와 철새들의 아름다운 색채의 하모니가 <제주 문자도>의 중심이 되고 있다.

 

제주 회화의 색채는 관덕정 벽화에도 투영되고 있다. 특히 십장생은 고졸미와 채색에 있어 지금은 변질돼버렸지만, 그 모습이 풍부했던 제주 색채의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18세기에 그려진 추사 김정희의 <의문당(疑問堂)> 편액에 그려진 장식 그림 <초충도>는 제주 채색화의 전통이 민간에 숨어 있음을 깨닫게 해준다. 제주 현대작가로 아름다운 색채를 구사하는 작가로는 작고 작가 서양화가 홍성석의 세련된 색채, 고민철의 화려한 추상화, 강요배의 완숙한 색채, 이왈종의 뛰어난 색채들이 아름다운 제주의 색채 전통 앞에 서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문정호는 아카데미 미술교육을 받은 사람의 눈으로 보면, 형태나 구조, 색상에서 매우 이상야릇한 이질감을 받게 된다. 데생과 원근법 교육을 받지 않아서 이리저리 누운 형태, 원근을 무시한 거리감, 시점의 혼란, 색채의 강렬한 보색 관계, 형태의 심한 왜곡 등 그야말로 못 그린 그림의 전형이 될 것이다. 문정호는 작가 자신이 알고 있는 형태와 색채를 마음껏 그림으로써 그 누구보다 자유로운 상상력의 기회를 가질 수 있었고, 어떤 해방감마저 느끼고 있다. 그래서 누군가를 의식하지 않는 것에서 나오는 편안한 그림이 되고 있는데 그것은 서툰 척 하는 그림이 아니라, 진짜 서툰 그림이라는 것이 문정호 작품의 큰 매력이 되고 있다.

 

문정호의 그림은 매우 원시적인 느낌을 준다. 원시적이란 꾸밈없이 그대로의 자연을 마구 누비는 것 같은 착각을 주는데 자연 그 자체의 마음속에서 꽃들판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또, 그의 그림에서 원초적인 느낌을 받기도 한다. 망설이지 않고 움직이는 생기(生氣)랄까, 자기 본능에서 우러나오는 색채의 내뱉음이 통제하거나 저지하지 않는 색깔의 불폭풍을 만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뜨거운 느낌을 주다가도 서늘하거나 차가운 느낌까지, 차분하면서 가라앉은 느낌까지 마음의 희노애락에서 배어나온 그런 인생 향연의 색채 감정이었다. 그의 회화는.

 

 

목각 또한 새롭다. 상상은 구체적인 현실에서 나오고, 또는 무의식의 숨겨졌던 관념에서 나오기도 한다. 목각은 일상에서 주운 나무로 만드는데 목각의 형태를 나무가 생긴 데로 그 모양을 살려 갖가지 동물들을 만듦으로써 상당부분 자연에 의지하고 있다. 다시 그 목각 위에 화려한 색채를 칠함으로써 기상천외한 동물들이 탄생하는 것이다. 어떤 동물과 같기도 하고 비슷하기도 한 동물들.

 

사실 문정호에게는 닮은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런 사실적 표현 능력도 제대로 갖춘 적이 없었던 그로서는 오로지 자신이 꿈꾸듯 떠오르는 수많은 욕구들의 충동적 표현을 그려내고 만드는 것 자체가 행복하다. 그 욕구가 너무 커서 그것을 자기 식대로 그리는 것이고, 그것이 그만이 할 수 있는, 서툴지만 독특한 미감을 탄생시킨다. 아마도 문정호 자신은 ‘자연을 사실대로 그리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그에게 그림은 놀이이며 인생 끝자락의 행복한 꿈동산에서 누리는 뿜뿜한 즐거움이다. 그는 그림 속에서 자신의 90평생의 인생을 추억하고 슬퍼하고 기뻐하기를 반복하고 있다. 어제는 해안으로, 오늘은 산으로, 굼부리로, 내일은 바다로 오고 갈 것이다. 그럴 수 있는 것만으로도 그 누구보다 활력 있는 삶을 살고 있다.

 

88살 민간화가 문정호의 색채는 분명 연구대상이 될 것이다. 사라져버린 제주도 채색화(彩色畵)가, 한 민간화가의 내면에 살아숨쉬고 있다는 것이 너무 신기하다고 하겠다. 그 누구도 못해낸 색채감각의 표현을 고령의 민간화가가 제주의 잃어버린 보물을 찾아서 우리에게 다가왔다니, 얼마나 아름다운 일이 아니겠는가. 제주의 색채가 다시 여명이 보이기 시작한다.

 

김유정은?

= 최남단 제주 모슬포 출생이다. 제주대 미술교육과를 나와 부산대에서 예술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미술평론가(한국미술평론가협회), 제주문화연구소장으로 일하고 있다. 저서로는 『제주의 무신도(2000)』, 『아름다운 제주 석상 동자석(2003)』, 『제주의 무덤(2007)』, 『제주 풍토와 무덤』, 『제주의 돌문화(2012)』, 『제주의 산담(2015)』, 『제주 돌담(2015)』. 『제주도 해양문화읽기(2017)』, 『제주도 동자석 연구(2020)』, 『제주도 산담연구(2021)』, 『제주도 풍토와 문화(2022)』, 『제주 돌담의 구조와 형태·미학(2022)』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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