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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정의 '길 가는 그대의 물음' ... 제주문화이야기(18) '원초적 기억에서 찾는 글로컬리즘 길 위에서'

영상 시대에 거꾸로 가는 고민철의 행보

 

지금은 로컬리티가 중요한 시대가 되었다. 일제강점기 이후 서울과 지방이라는 2분법적 구도의 경향론(京鄕論)은 중심부와 주변부로 차별하면서 문화의 지배구조를 이뤘지만, 오늘날은 그 구조의 지위가 흔들리고 있다. 다원주의(多元主義)의 영향도 한 몫을 하고 있고, 지역으로 향하는 이주 인구의 확대, 시장경제의 세계화 전략이 지역의 특성들을 균일하게 일반화하면서 차이가 사라지고 있다. 오히려 새로운 문화적 대안으로서 로컬리티가 부각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변화는 어디에나 있다. 지역 간 색깔이 점점 줄어들면서 제주 로컬리즘이라는 정체성은 과거 농업사회와 해양·목축사회에 기반을 두었던 풍토적인 삶에서 드러났었지만, 점점 그 정체성마저 해당 삶의 방편들이 산업사회로 대체됨으로써 사실상 점점 축소되거나 소멸되고 있다.

 

지금의 현실은 하이브리드 시대다. 이 혼성(混成)의 시대는 세계적인 추세이기도 한데 마치 구산업(석유)이 신산업(전기)으로 대체되는 과정에서 일시적으로 병존하는 과도기처럼, 혹은 이주하는 종족과 원주민이 새로 섞이면서 하나의 퓨전 문화가 되는 변화의 운동단계가 되고 있다. 갈수록 인류가 지구인으로 모아지고 있다는 생각은 모두가 느낄 수 있는 체감온도일 것이다.

 

현재 추상화를 선호하는 작가는 매우 드물다. 그러므로 제주 추상화에 대한 모색은 형식주의 미술에 대한 깊은 미학적 고민과 새로운 창작방법론의 과제를 안겨준다. 추상화는 사회적인 내용을 다루기보다는, 오로지 조형언어라고 할 수 있는 색채, 선, 형태의 아름다움에 기반을 둔 미술의 양식사적인 전통에 닿아있다.

 

제주에서는 1960년대에 서울에서 수학한 서양화가 김택화, 강태석에 의해서 추상화가 처음 시도되었다가 1970년대 후반 ‘관점’그룹의 등장으로 일시적으로 회자되다가 지금은 다시 추상주의가 쇠락한 상태에 있다. 당시 추상주의는 서울을 중심으로 일었던 국제주의적 경향성을 띤 미학적 실험정신에서 출발했으나, 이후 민족주의에 바탕을 둔 한국적 미학의 반성적 태도가 일면서 다시 그 기운은 사그라들고 말았다.

 

이로써 고민철의 등장은 매우 중요한 추상화의 새로운 계기가 되고 있는데 그가 구상화에서 추상화로의 방향 전환은 제주 추상화를 다시 되돌아보게 하는 신선한 행보가 되고 있다. 고민철은 백광익, 양묵 등 제주의 추상작가들의 대열에 새롭고 서면서, 처음부터 강한 로컬리티적 특성을 보여주었다.

 

오늘날 대세가 된 영상 미디어 작가들의 등장은 시대의 추이로써 전자매체의 대중화에 따른 것이어서 앞으로 예상될 미래의 방향을 위한 조건 반사작용과 같은 것이다. 상대적으로 이제는 전통 장르가 돼버린 추상화의 존재가 매우 불확실한 위치에 서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꾸로 가듯이 보이는 고민철의 행보는 어느 정도 소수자라는 희소가치의 장점을 활용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어쨌든 영상의 시대에서 추상화라는 남다른 선택을 한 것은 ‘사실상 많다는 것의 대세’에서 오히려 ‘소수이기에 특별할 수 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글로컬리즘을 구현하고 있는 제주적 추상

 

그렇다면 고민철의 추상화의 미학은 무엇에 바탕을 두고 있고 그가 구상에서 추상으로 방향을 바꾼 이유가 무엇일까. 서양미술은 이미 중세부터 스토리에 기반을 둔 문학주의의 영향, 즉 신화나 성서에 영향으로 그것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충실한 설명을 요하는 삽화들이나 그리스 로마신화, 그리고 기독교 역사화, 전쟁화가 성행했다.

 

이런 문학주의는 미술을 서사구조의 보조자, 또는 삽화적 성격, 교회 화가로 전락하게 만들었고, 신고전주의에 이르러서 역사화는 정점에 달한다. 사물은 반드시 정점에 이르게 되면 다시 쇠퇴의 길로 되돌아간다. 미술에 대한 순수한 욕구는 새롭게 창작하는 계기를 만들었는데 그것이 빛을 재해석한 인상주의 출현이었다. 우리에게 시간은 변화를 일으키는 새로운 형식들을 가져다 준다.

 

1980년대 삶의 미술이라는 이름으로 계급주의 미학이 남한을 흔들다가 잠잠했던 한국미술의 무풍지대와 같던 시기에, 지역주의 열풍이 서서히 일고 있었다. 2000년 초 제주는 올레코스가 개발되었고, 이주민의 급거 입도하는 등 미술 형식에서도 로컬리티를 모색하는 기운이 일어나고 있었다.

 

한편에서는 4·3미술로 모아졌고, 한편에서는 미술의 크기가 커졌음에도 불구하고 두 편향 모두 뾰족한 미학적 출구를 찾지 못한 채 단체 미술행사 중심의 활동으로 이어졌다. 이럴 때 개인의 태도는 중요해진다.

 

고민철은 돌연 오랫동안 추구하던 인상주의 화풍을 버리고, 추상표현주의의 영향을 강하게 받게 된다. 주저 없이 풍경화를 버리고 마음의 심연에서 우러나오는 자유로운 미술 형식을 찾으려고 한 것이다. 아파 본 자만이 실존의 중요성을 깨달을 수 있다. 그에게는 분명 어떤 심적인 자각이 크게 있었던 것을 알 수가 있다.

 

지난 1월 고민철은 ‘환희-바람 속으로’라는 개인전을 통해서 제주적 추상의 시작을 본격적으로 알렸다. 액션이 큰 붓질과 임파스토 드리핑(Impasto dripping) 기법을 중심에 둔 화려한 색채의 대작들을 선보이면서 제주적 색채와 형태를 지향하는 로컬리즘의 특질을 보인 것이다.

 

임파스토(impasto)란 ‘두껍게 칠하는 물감 기법’을 말하는 것으로 이탈리아어 ‘반죽하다’라는 임파스타레(impastare)에서 유래했다. 물감을 나이프나 붓으로 화면에 두껍게 바르거나 자유롭게 흘릴 경우 굳으면 마치 조각처럼 도드라지는 입체감이 나타나기 때문에 작업시 화가의 감정 상태가 잘 드러난다. 칠하지 않고 붙게 함으로써 마티에르가 살아나기 때문에 즉흥적이고 격정적인 동작에 적합하다. 빈센트 반 고흐(Vincent Willem van Gogh, 1853~1890), 잭슨 폴록(Paul Jackson Pollock, 1912~1956), 루시안 프로이트(Lucian Michael Freud, 1922~ 2011) 등이 이를 선호했던 화가들이었다.

 

고민철은 이 임파스토 드리핑을 용암이 흘러내리는 과정으로써 보여준다. 돌의 고장 제주에 걸맞는 용암의 물질적인 성질을 염두에 둔 것이다. 물론 거기에는 어릴 때의 기억이 선명하게 나타나는 물색(物色, color)의 강렬함이 배어난다. 그의 기법은 단순한 형식 찾기의 문제만으로 볼 수는 없다. 필자와의 인터뷰에서 밝힌 것처럼, '형식에서 자신의 원초적 기억들과 삶의 환경에서 몸에 밴 시간적인 경험이 무의식적으로 드러나도록 노력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의 말에서 불현듯이 화가의 할머니와 가족에게서 받은 관습적 행동이라고 할 수 있는 아비투스(Habitus)가 그의 작품에 작동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 원초적인 사회심리 표현은 매우 우발적이며, 무의식적으로 표출되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그는 이 아비투스적 표현을 이끌어내기 위해서 마음을 차분하게 한 후 순식간에 자동기술적인 액션으로 주요작업을 수행하는 것이다.

 

고민철의 화면에는 대개 반복적 행위들이 난무하는 가운데 같은 것 같지만 다른 대칭의 아름다운 모습이 나타난다. 작품의 중심 구조는 무의식적 행위들의 속도감 있는 표현으로 채워지고, 세부 디테일들은 우연적인 효과들을 의식적으로 조절하는 절묘한 조합을 만들어 낸다. 자동기술이란 우연적 효과를 극대화시키기 위한 액션으로 매우 자연스러운 의식의 흐름을 보여준다. 그럼으로써 그는 사물을 그린다, 표현한다는 행위를 넘어선 질료의 특성들, 흩뿌려지고 중첩되는 색으로 만들어진 화면이 되는 것이다. 거기에 핵심적인 것은 바로 '발견하는 형태, 발견되는 색채'라는 의미를 가진 제주 로컬리티를 지향하는 모습일 것이다.

 

그의 작품의 궁극적인 목표는 결국 제주 로컬리즘으로 맞춰져 있다. 제주 추상이라는 담론을 상정했을 때 단연코 풍토적인 양상(樣相)을 무시할 수는 없기 때문인데, 상징적으로 돌담, 태풍, 바다, 해저라는 주제에 집중하게 된다. 그러나 이의 상징들은 모두 사물과 공간의 관계 속에서만 비로소 제대로 보이게 된다.

 

 

바람은 바다와 하늘과 땅의 춤이면서 태풍이 돼 혼돈으로 치달음으로써 마침내 세상을 정화시킨다. 돌담은 그 구멍 사이로 바람을 보내버리는 리듬을 조절하며 안정된 호흡으로 역할을 고수한다. 바다는 변화무쌍하여 하늘과 대지의 기운을 받아 인간에 이롭다가도 위협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해저는 또 다른 신들의 세계로서, 해양 타계(他界)의 이어도와 같은 유토피아가 된다. 따지고 보면 세계는 모두가 연결돼 있어서 나의 작품은 나만의 것이 아니라 나를 둘러싼 문화적 환경이 나의 의식과 감정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이렇듯 고민철에게 줄곧 연관되어 흐르는 하나의 미학적인 원리가 있다면, 인생이라는 생생한 삶의 실체는 화가의 몸에서 뿜어나오는 원초적 기억으로 형태와 색채의 아름다움을 추구하게 한다. 그것은 마침내 제주섬 만이 가능한 제주적 추상이라는 이름으로 구현될 것이며, 글로컬리즘의 새로운 근원으로 작용하게 될 것이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김유정은?

= 최남단 제주 모슬포 출생이다. 제주대 미술교육과를 나와 부산대에서 예술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미술평론가(한국미술평론가협회), 제주문화연구소장으로 일하고 있다. 저서로는 『제주의 무신도(2000)』, 『아름다운 제주 석상 동자석(2003)』, 『제주의 무덤(2007)』, 『제주 풍토와 무덤』, 『제주의 돌문화(2012)』, 『제주의 산담(2015)』, 『제주 돌담(2015)』. 『제주도 해양문화읽기(2017)』, 『제주도 동자석 연구(2020)』, 『제주도 산담연구(2021)』, 『제주도 풍토와 문화(2022)』, 『제주 돌담의 구조와 형태·미학(2022)』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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