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 앞의 평등한 우리, 그럴 수 있다. 인생은 그런 것이다. “인생살이 만만찮은 것, 결국에 우리는 홀로 살아가는 존재다. 우리는 자신의 삶의 무게만큼 사연이 길고 너비 만큼 고뇌가 크다. 이것이 인간이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내일보다는 언제나 지금 선 자리가 소중한 시작이며, 인생에선 무슨 일이든 일어난다.” 존재에게 주어진 시간의 무게 인생은 누구에게나 있지만, 그러나 삶은 그리 만만한 일이 아니다. 필자가 처음 이왈종 화백을 알게 된 것은 아마도 1995년 11월 오랫만에 따스한 햇살이 내리쬐는 한낮, 보목리였다. 당시에 필자는 변시지 선생을 동행하는 프로그램을 진행했는데 작가와의 만남을 통해 창작 현장을 찾아가서 변시지 화백의 작품 세계에 대한 현장에서 진행하는 프로그램이었다. 동행 인원은 일반 시민 십 수명, 차량 몇 대로 간단히 이동하여 보목리 내창(건천 하천) 하류 편평한 돌담 아래 자리를 잡고 변시지 화백이 이왈종 화백을 소개하는 절차였다. 변시지 화백은 이미 출발 전에 이왈종 화백에게 연락해 놔서 보목리 거주지 근처에 가면 나오라고 한 상태였고, 11쯤 약속 시간이 되자 이 화백이 왔다. 화실 겸 거주지까지는 소리치면 닿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
-김영갑의 사진미학 '섬에 온 이방인의 시선, 사유하는 영혼' 제주국립박물관에서는 고 김영갑의 기증 사진전이 ‘찰나와 영원, 제주를 담다’라는 제하로 2026년 6월16일부터 2027년 3월1일까지 열리고 있다. 이 글은 고 김영갑 사진가를 기리는 글임을 밝힌다(편집자). 김영갑은 지독한 미적 집착이 있다. 그래서 빛을 매우 자잘하게 분해한다. 김영갑은 계절, 시간, 낮과 밤, 대기 작용, 기후의 변화에 대한 특성을 경험적으로 현장에서 익혔다. 그것은 시간은 늘 주어지기도 하지만, 결국 자신이 그 시간에 몸을 던져서 가질 수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다. 왜 그가 빛에 집착하느냐 하면 빛이야말로 색의 비밀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빛은 만물의 색을 자연광이라는 조도(調度)를 가지고 다양한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삼원색이 오방색이 되고 수천수만 가지 미세한 차이의 색이 시시각각 빛을 통해 만들어지며, 카메라의 렌즈는 그 미세한 차이의 색상을 어떻게 담아내냐 하는 것은 순전히 사진가의 세계관과 그의 시선의 몫이다. 김영갑은 시간과 자연에게 말을 거는 낙천주의자이면서 탐미주의자이다. 프레임을 크게 늘인 것을 보면, 자연 세계에서 발견한 경이로운 감동을 카메라에 담고자 했
-김영갑의 사진미학 '섬에 온 이방인의 시선, 사유하는 영혼' 제주국립박물관에서는 고 김영갑의 기증 사진전이 ‘찰나와 영원, 제주를 담다’라는 제하로 2026년 6월16일부터 2027년 3월1일까지 열리고 있다. 이 글은 고 김영갑 사진가를 기리는 글임을 밝힌다(편집자). 메를로 퐁티의 말대로 “보는 이는 자기 몸으로 인해 보이는 세계 속에 잠긴다. 그러면 그의 몸 자체가 눈에 보인다. 내가 보는 모든 것은 내 손이 닿는 곳, 적어도 내 시선이 닿는 곳에 있고, 내가 닿을 수 있는 곳의 지도 위에 표시된다.” 여기서 지도는 사진 자체이다. 급기야 시간은 그를 사유하는 몽상가로 만들었고, 자신의 유토피아를 찾는데 점점 가까이 이끌었다. 그야말로 그에게 세계(제주)는 삽시간에 황홀함을 경험케 하는 진짜 이어도로 생각되었다. 아니 이어도였다. 최남단 마라도는 흑백 작업이다. 마라도는 바다 한가운데 한 척이 배처럼 떠 있어서 환경도 삶도 황량하기 그지없다. 그러나 그곳에서도 여느 세상의 사람처럼 사람들은 살아간다. 바다에 의지한 삶이란 변화무쌍한 자연 앞에 선 인간의 조건이 있기에, 어렵고 고달프다. 그래도 마라도의 삶이 아름다운 것은 그곳에서 단잠을 자고, 하루를
-김영갑의 사진미학 '섬에 온 이방인의 시선, 사유하는 영혼' 제주국립박물관에서는 고 김영갑의 기증 사진전이 ‘찰나와 영원, 제주를 담다’라는 제하로 2026년 6월16일부터 2027년 3월1일까지 열리고 있다. 이 글은 고 김영갑 사진가를 기리는 글임을 밝힌다(편집자). 우리는 모두 인생의 나그네다. 나그네는 한곳에 머물지 않기에 언제나 이방인이 되고, 우리가 어딘가에 머물더라도 그것은 잠시일 뿐 인생이란 흐르는 바람처럼 어딘가로 떠나간다. 우리는 이방인으로 세계를 보고 그것을 느끼면서 몸으로 표현한다. 인생이란 언제나 그런 나그넷길이다. 세계는 오로지 자신만의 세계이며 만일 내가 없다면 나의 세계도 없는 것이다. 세계는 자기가 보고, 상황에 따라 느끼고, 시시각각 새로 만나는 감각의 세계다. 그러므로 내가 있어야 세계가 있으며 내가 없다면 세계도 없는 것이다. 필자가 사진가 김영갑을 만난 것은 1986년 여름날 어느 전시장이었고 당시 그가 찍어준 흑백사진이 몇 장 남아 있다. 김영갑은 차림새가 늘 그랬듯 검은색 등산모에 낡은 야전잠바를 입고, 35mm 니콘 카메라 한 대가 든 검은색 사각형 가죽가방을 메고 다녔다. 사는 곳은 제주대학 아라 컴퍼스 앞 과수
서인희의 작품 세계, 얽힘과 설킴의 아름다움 예술은 화가 자신의 정신세계의 표현이라고 헤겔은 말한다. 그 예술을 담아낸 것이 바로 작품이라면, 그 작품은 화가의 영혼이 담긴 하나의 파일과 같다. 그래서 곶자왈은 곧 서인희가 영혼으로 만든 자연 정원이인 것이며, 그 곳 자연의 이름다움에서 그의 정신세계가 빛나는 것이다. 서인희 작품에는 제주 풍토에서 나오는 강렬한 색, 자연환경이 만든 얽키고 설킨 넝굴의 선, 양치류 식물들의 아름다운 질서, 하늘을 향해 자유로운 해방감을 발산하는 나무, 마소의 방목(放牧)을 관리하기 위해 쌓은 곶담(고자왈의 돌담)의 정겨운 형상, 곶자왈에 무질서가 오히려 아름다운 질서가 되는 느낌 등은 돌과 식물이 오랜 시간에 만남과 이별을 반복하면서 생성한 자연 형상들이 있다. 그래서 서인희의 곶자왈에서는 공간이 곶자왈을 만든 것이 아니라 곶자왈의 식물이나 사물 형상들이 공간을 만들었기 때문에 화가의 영혼이 그 정원을 걸어간다고 말할 수 있다. 주어진 공간에 그대로 주어진 자연이라고 생각한다면, 작품이 예술가의 정신세계의 산물이라고 말하기가 어렵다. 결국 예술가의 해석이란 자연을 대하는 화가 자신의 삶 전체에서 나오는 존재의 울림이었다는 것
곶자왈 자연의 소리를 들어라 전통사회에서 제주는 고립된 공간이었다. 지정학적으로 목장, 유형지(流刑地). 해양 전초기지로 제주 사람과 암말을 못 나가게 한 출륙금지령이 있었던 섬이다. 고립은 섬의 자연을 매우 풍요롭게 만들었는데 여전히 제주의 자연은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곶자왈은 제주의 대표적인 자연 중 하나다. 그곳은 깊고, 그윽하고 아름답고 신비한 숲이다. 제주 중산간 지대에 있는 마을은 대개 곶자왈을 끼고 있어서 마을마다 각각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 곶자왈은 웃뜨르에 있다. 알뜨르가 해안지대를 말하는 지리학적 용어라면, 웃뜨르는 산간 지역을 가리키는 말인데, 대개 일제강점기 이후에 만들어진 용어인 중산간 지대라는 용어를 병행해서 부르고 있다. 곶자왈은 넓게 펼쳐져 있어서 여러 마을이 다른 방향으로 한 곶자왈과 연결돼 있다. 마을 사람들이 살아가려면 곶자왈에서 얻을 수 있는 것들이 많은데 가마용 땔감, 숯, 식용식물, 서식 동물을 잡아서 생활양식에 보탬을 했다. 그래서 이름으로 보아 곶자왈이 많은 것 같지만 사실은 한 곶자왈이 여러 방향에 있을 뿐이다. 예를 들어 영락곶자왈, 무릉곶자왈, 신평곶자왈, 구억곶자왈, 서광곶자왈 등이 여러 개의 곶자왈이 있는
-서인희 개인전 ‘바이오필리아’ 의 새로운 자연주의 미학 서양화가 서인희 개인전 ‘바이오필리아’가 2026년 3월 18일부터 4월 6일까지 인사동 서울제주갤러리에서 대작 20점을 선보이고 있다. 숲과 돌이 만나고, 사람과 자연이 조화로운 생명의 땅, 제주 원시의 숲 곶자왈을 다시금 돌이켜보는 따뜻한 감성의 시간을 가질 수 있다. 혼자 가는 숲길 인생 하이데거는 조용히 숲을 사유했다. 수풀(Holz, 林)은 숲(Wald)을 지칭하던 옛 이름이다. 숲에는 대개 풀이 무성히 자라나 더 이상 걸어갈 수 없는 곳에서 갑자기 끝나버리는 길들이 있다. 그런 길들은 숲길(Holzwege)이라고 부른다. 길들은 저마다 뿔뿔이 흩어져 있지만 같은 숲속에 있다. 종종 하나의 길은 다른 길과 같은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렇게 보일 뿐이다. 나무꾼과 산지기는 그 길들을 잘 알고 있다. 그들은 숲길을 걷는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고 있다. -하이데거 그렇다. 우리는 숲길을 가는 사람처럼 자신들이 왜 그 길을 가는지 잘 알고 있다. 삶은 알면서도 가고, 알기 위해 가는 길이며, 이 삶의 길에서는 어느 날 자신의 존재 가치를 깨닫게 된다. 살아 있음에 대한 감사. 비록 그것을 내색
화북포의 을묘왜변 명종 10년(1555) 정월에 무관(武官) 김수문(金秀文, ? ~ 1568)이 제주목사가 되었다. 같은 해 5월 13일 왜구들은 배 60여 척으로 전라도에 침범해 들어와 해남의 달량성(達梁城)을 항복시키고, 장흥, 강진 등 8진이 무너지자, 그 성을 구하려고 달려온 해남, 무장, 어란포의 군사들마져 왜구들이 모두 물리쳤다. 왜구들은 승승장구하며 영암까지 유린을 했으나 때마침 전주부윤(全州府尹) 이윤경(李潤慶)이 구원병(救援兵)을 이끌고 달려오는 바람에 급기야 왜구가 물러갔지만 왜구들은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약탈자들이 빈손으로 돌아갈 리 만무했다. 전라도에서 패퇴한 왜구들은 본거지로 돌아가지 않고 이번에는 제주도로 방향을 바꾸었다. 6월 20일에 왜선 40여 척이 보길도로부터 곧바로 와서 제주 앞바다 1리 거리에 정박하여 위협을 가하는가 하면, 6월 27일에는 무려 천여 명이나 되는 대병력을 제주에 상륙시켜 진(陣)을 치고 3일 동안 제주성을 포위했다. 이에 제주목사 김수문은 용감한 군사 70인을 골라 30보 거리까지 다가가 격전을 벌였다. 그러나 왜구들은 화살을 맞으면서도 결코 물러가지를 않자, 김수문은 왜구의 기세를 꺾기 위해 다시 담력
제주도의 왜구 침략 일찍이 제주도는 일본과 중국, 한반도를 잇는 무역로 중간 역할을 하는 지정학적 위치 때문에 왜구들의 중요한 약탈 대상 지역이 되었다. 바다의 해적활동에 필요한 물과 식량, 땔감 공급지로 중국이나 대만 베트남을 가려면 제주도는 중요한 지점으로 왜구들이 노리는 지정학적 거점이 된다. 추자도에 왜구가 처음 침략한 것은 고려 충숙왕 10년(1323)이다. 회원(會原)의 조운선을 군산도(群山島:현 고군산 군도)에서 약탈하자 내부부령(內府副令) 송기(宋頎)를 파견하여 왜구를 격퇴시켰다. 또 동년 10월 6일 추자도 등지에서 노략질하고 노약자와 남녀를 잡아갔다. 왜구들이 자주 침략하여 추자도에 사람이 줄어들자 고려 정부는 충정왕 2년(1350)에 추자도 주민들을 제주도 조공포(朝貢浦:도근천) 근처로 이주시켰다. 한편 그로부터 60년 후 조선이 개국 초기인 태종대(1413)에 제주도로 이주한 추자도 주민들의 절반을 추쇄하여 진도로 옮기려는 전라도 관찰사의 진도 목장 계획이 있었다. •추자도 왜구 침략 이후 제주를 침범한 사례를 내용에 따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충혜왕 2년(1341)에 왜구가 정의현에 쳐들어 왔으며, 이듬해에는 무려 700여 척의 배
조선의 해금(海禁)과 공도(空島)정책 한국 사료에 왜구가 처음 나타난 시기는 사료에 의하면 고종 10년(1223)이며, 이때부터 공양왕 4년(1396)까지 약 169년 동안 519회에 걸쳐 침략한 사실이 있다. 주로 조운선 약탈이나 납치를 시도한 것으로 보아 식량과 인적 자원을 노리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중국인 경우 『명사(明史)』와 명실록(明實錄)』에 의하면 홍무(洪武) 원년(1368)부터 홍무 7년(1374)까지 중국 연안에 왜구가 침략한 곳은 23회 이상이 되자 당시 신생왕조였던 명나라의 큰 근심거리가 되었다. 이에 홍무 4년(1371) 연해민(沿海民)들이 아무 때나 바다로 나가는 것을 제한하는 해금령을 내렸으며, 연해 지역에 해구(海寇)·왜구(倭寇)의 피해를 예방하기 위해 해방정책을 실시하였다. 해금(海禁)은 하해통번지금(下海通番之禁) 즉 “바다에 나가 오랑캐와 통교하는 것을 금지한다”라는 말의 약칭이었다. 이러한 해금령은 중국 영향권에 있는 조선과 일본에 해방정책에도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간혹 해금이 완화돼 해외무역을 허용하는 범위에서 개해(開解)가 이루어지기도 했으나 해금은 명·청 시대의 국가의 외교, 무역, 국방 등의 안보 정책이 되었다
글을 열며 페르낭 브로델은 말한다. “한반도는 일본 열도, 만주, 시베리아, 중국에 둘러싸인 독특한 전략적 위치의 희생양이 되었다.” 맞는 말이다. 한반도에 속한 제주도는 어떤가? 바다 한가운데 섬 제주도는 과거 고려(원나라), 조선의 유형지가 되었고, 말이 주인이 되는 섬이었다. 제주도는 지정학적으로 일본의 대륙 진출이나 남태평양, 동남아시아에 진출하기 위한 교두보가 되는 지역이다. 왜구들만이 아니라 동인도 회사의 네덜란드·영국·프랑스인들이 바타이유-나가사키 혹은 인도-홍콩-상하이-오사카 항로 중 물, 식량, 땔감 등을 공급받을 수 있는 중간 거점지역으로 이용되었다. 특히 군사적으로 중국의 일본 침략과 일본의 중국 침략을 위한 전략적인 섬이었기에 조선의 변경은 곧 안보의 최전방이 되었다. 한편 역사적으로 한반도 본토 정부는 제주 섬 주민들의 숨통을 한시라도 놓지 않는 바람에 생산력이 매우 낮았다. 과다한 진상으로 인력의 강제 동원되고 말(馬)과 남자들이 필요한 만큼 부족해지자 남자가 비어있는 자리에 여정(女丁)이라는 이름으로 여자들을 성담에 올렸으나 대안이 되지는 못했다. 이에 조선 정부는 끝내 200여 년 동안 출륙금지령을 내리고 중앙집권화의 길을 갔다.
사물과 사람의 협력은 오래된 일로서 양용방의 작품을 보게 되면 재료가 곧 형식이 되고, 사람은 두뇌로서 내용을 만들어 냈다. 낡은 레디메이드가 새로운 의미로 태어난 것이다. 이번 양용방의 'my life'는 만들어진 오브제 혹은 발견된 오브제를 이용한 작품들로 구성돼 있다. 작품 'Food mark'는 하나의 애벌레 형상인데 숟가락으로 애벌레를 만들었다. 숟가락이 모두 65개인데 현재의 작가 나이를 상징하여 자신이 평생 밥벌레로 살아온 날을 회상하듯, 모든 인간의 생애란 결국 이 밥을 먹기 위해 살아온 존재라는 것을 되새겨준다. '세상살이'는 일상에서 쓰다 버려진 주전자, 프라이팬, 식기를 다양한 기표로 새겨서 허공에 매달아 인간 세상만사의 삶의 이야기를 되살리려는 의도가 있다. 삶이란 단순하지 않고 복잡하다. 그 기물에는 스피커를 통해서 우리 일상의 온갖 소리와 잡음 곧 '세상의 삶의 소리'를 듣도록 했다. 식기들은 밥, 생활, 일상, 먹는다는 인간 의례의 상황들이 소리를 통해 자신의 인생을 겹치게 한다. '깊은 잠(deep sleep)'은 대야에 잠자는 듯 노루 머리뼈가 흰빛의 물에 잠겨있는 모습이다. 야생에서 힘차게 뛰놀던 노루가 결국에는 인간의 덫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