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재사로서의 역사 “우리는 오로지 현재의 눈을 통해서만 과거를 조망할 수가 있고, 과거에 대한 우리의 이해에 도달할 수가 있다.” E.H.카(Edward Hallett Carr, 1892~1982)는 역사는 과거와 미래의 대화라고 했다. 이런 인식 속에는 모든 역사는 현재사라는 베네데토 크로체의 역사의 개념이 숨어 있다. 콜링우드는 역사를 과학으로 생각했다. “과학이 무지(無知)로부터 출발하여 어떤 것을 찾아내는 것이라면 역사는 과학이 된다.” 그래서 역사는 ‘행해진 것(res gestae)’, 즉 과거에 행해진 인간의 행동에 대한 질문에 대답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역사를 과학이라고 말한 것이다. 그래서 역사는 시간이 지나갈수록 수많은 상상력 더미로 덮이지만 그러나 그 밑바닥에는 늘 사실(事實)이라는 증거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렇지만 거기에는 반드시 해석(interpretation)의 문제가 따른다. 우리는 흔히 말이 안 되는 소리를 ‘소설 쓴다’라고 한다. 소설이 상상적 허구(imaginary fiction)라는 점에서 꾸며낸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사는 현실에 존재했던 사람들의 행위와 사건의 결과라는 점에서 증거로 말하는 사실이 있고, 그 사
◇ 세상을 이루는 형태의 생(生) “삶은 형태이며, 형태는 삶의 방식이다. 자연 속에서 형태들을 이어주는 다양한 관계가 순전히 우발적인 사건에서 나오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자연스러운 삶이라 일컫는 것도 형태들 간의 불가피한 관계로 보인다. 따라서 형태가 없다면 자연히 삶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형태를 자연의 모든 삶의 근원으로 보는 이러한 앙리 포시용(Henri Pocillon)의 사유는 발자크(Honoré de, Balzac,1799~1850)의 한 문장에서 시작되었다. “모든 것이 형태이다. 그리하여 삶 자체도 하나의 형태이다"라는. 그렇다. 이 세상 모든 것들은 형태로 이루어져 있으며, 만물은 형태로 규정된다. 돌(石), 나무(木), 사람(人), 물, 눈(雪), 산소(酸素)마저도 형태를 이룬다. 눈에 보이는 형태와 눈에 보이지 않는 정신적 형태로 이루어내는 예술을 말함에 있어서 포시용은 어떤 미술작품이라도 형태적인 측면에서 파악되고 해석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결국 세계는 다양한 형태들의 전체라고 말할 수 있으며, 개별 형태들은 서로가 물질·공간·정신·시간의 관계를 맺고 있다. 인간은 자연에서 아름다움을 찾기도 하고, 인간 스스로의 사유활
◇ 돌을 역이용하는 사람들 필자는 일찍이 제주 전통문화의 키워드를 돌, 바람, 여자, 말, 가뭄을 상징으로 삼아서 ‘석다(石多), 풍다(風多), 여다(女多), 마다(馬多), 한다(旱多)’의 섬이라고 주장한 적이 있다. 이 다섯 개의 상징적 개념으로 제주를 보게 되면 생산 문화적인 의미가 쉽게 다가온다는 것이다. 그 중 석다(石多)는 현대 지질학적인 개념으로 생각지 않더라도 전통사회에 수많은 기록에서 보듯이 제주가 돌이 많다는 이유를 들어 ‘척박(瘠薄)’하다 라고 했다. “척박(瘠薄):땅이 가물어서 기름지지 못함”을 말한다. 화산섬이기 때문에 검은 색 화산회토가 대부분이고 “이 땅(제주)에는 바위와 돌이 널려 있어, 흙이 덮인 것이 몇 치 뿐이다.” “토질이 푸석푸석하고 메말라 밭을 개간 하려면 반드시 소나 말을 몰고 와서 밭을 밟아주어야 한다(밭ᄇᆞᆯ리기).” 그래서 사람들은 적어도 계속 농사를 지으려면 거름을 얻기 위해서 소나 말무리를 밭담 안에 몰아넣어 며칠을 가두어서 그들의 분뇨를 거름이 되게끔 밭 여기저기에 남기도록 했다. 이를 ‘바령’이라고 한다. 그렇게 바령한 밭은 기름지고 비옥하여 농사가 잘 되는 것이다. 삶은 생각보다 모질고 사람은 의외로 지혜
1. 섬에 온 선교사 제주에 사진이 등장하게 된 것은 서양 열강 세력에 의해서였다. 선교사들이 신도들이나 송별 기념촬영한 것, 풍속을 소재로 삼은 것, 중요 인물의 초상 사진과 중요 사건을 찍은 것이 많은 것으로 보아 사진가 역할도 한 것이다. 그들은 먼저 선교를 통해 기독교를 전파하면서 서구 자본주의 문명을 이식하려는 목적도 있었다. 사실상 자본주의 제국을 위해서 시장을 넓히려는 식민지의 다른 전략도 있었다. 일찍이 동인도 회사에서 보았던 것처럼 열강들이 동쪽으로 온 까닭은 지난 우리 역사가 말해주었듯이 새로운 자본주의 세계체제를 구축하기 위해서 일 것이다. 1846년 영국은 청나라 개항장마다 한 척의 포함(砲艦)을 배치할 권리를 얻어냈다. 선교사가 현지에서 어려움을 당했을 때 신속하게 무장 함대를 보내어 무력으로 외교 문제를 처리하고자 한 것이다. 또 ‘바다의 안전’을 이유로 함대를 맨 먼저 파견한 나라도 영국이었다. 뒤이어 프랑스와 미국이 따라 들어왔다. 선교사들이 개항장에서 포교권을 얻은 뒤에는 현지인처럼 옷을 입고 현지어를 쓰면서 전국으로 포교를 확대하고자 했다. 선교사들은 겉으로 미신을 믿고 있는 야만의 땅을 개척하는 것이었지만 속내는 그들이 현지
◆ 석다(石多)의 고향 돌이 많다는 것의 평가도 시대에 따라 담론이 달라진다. 과거에는 제주가 석다(石多)의 변방이자 척박(瘠薄)함의 대명사로써 고작 말이나 키우는 황무지 목장으로 인식됐다면, 오늘날은 문화경관으로써 제주도의 독특한 특성을 보여주는 자연자원으로 인식되고 있다. 돌은 자연에서 나와 사람의 손을 거쳐서 구멍이 송송한 돌담이 된다. 오로지 제주에 현무암 재료가 많다는 이유로 대표적인 토산재(土産材)가 된 것이다. 그러나 흔하다고 가치가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양적(量的)인 것이 질적(質的)인 것을 새롭게 구현하기도 한다. 어떤 경우든 세상 만물은 그 무엇이라도 각각의 효용성과 오로지 그것만이 할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역할이 있다. 돌은 이 두 가지 양면성을 모두 가지고 있다. 돌은 섬땅을 거칠게 만든 원인도 되겠지만 반대로 섬의 모진 바람을 막아주는 매우 요긴한 결과도 있었다. 그러기에 돌을 모두 나쁘다고 하는 것도 틀렸고, 모두 좋기만 하다고 해도 꼭 들어맞진 않는다. 사물에는 그것만의 속성이 있고, 또 상황에 따라 그 사물의 상태가 달라지기도 하며, 대응하는 방법에 따라 효용성도 다르게 나타난다. 돌의 물리적 속성이 갖는 특성에서는, 밭농사를
◆ 민간화가의 인생 도전 팔순(八旬)이면 누구라도 쉬는 것이 통념이나 제주인들은 오몽(움직임)해질때까지 부지런하게 일을 하는 것이 상식이다. 향년 88세, 90을 바라보는 나이에 그림을 열정적으로 그리는 화가로는 최고령의 나이라고 할 수 있다. 문정호 화백이 그 당사자이다. 필자는 3년 전에 화백을 만나고 눈이 번쩍 트인 적이 있었고, 많은 화가들이 제주 예술의 ‘불모지론’에 가려서 자신들의 DNA에 담긴 색채 감각의 아름다움을 보지 못하는 까막눈의 현실을 개탄한 적이 있었다. 하기야 수많은 외세의 침략으로 제주에 남아 있는 유물·유적이 극히 드무니 예술의 불모지라고 할 법도 하다. 그러나 남아있는 제주의 회화 전통에서 보이는 번뜩이는 색채의 아름다움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대단하다. 문정호는 귀가 잘 안 들리는 것을 빼면은 아직까지도 건장한 노년이라는 것을 과시한다. “앞으로의 계획이 있습니다. 선생님처럼 제주의 돌담을 연구하듯 그 돌담을 그리고 그 밭담 안에서 제주 사람들이 일하는 모습을 그릴 겁니다. 그릴 것이 너무 많이 남았습니다.” 라는 문정호의 각오를 듣는다. 집에서 그림을 그리는 시간은 밥 먹는 것도 잊어버릴 정도로 그림을 10시간 이상 그린
노인성의 이름은 수성(壽星)인데 수성노인, 남극노인, 남극노인성, 남극선옹(南極仙翁)이라고도 한다. 수성노인을 그린 그림을 일러 수성도(壽星圖), 수노도(壽老圖), 수노인도(壽老人圖), 노인성도(老人星圖), 남극성도(南極星圖, 남극노인도(南極老人圖) 등으로 불린다. 우리나라 도교의 도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신선과 연꽃으로 대표되는 선불(仙佛)사상의 세계관으로 그려진 삼국시대의 고분벽화가 중요하다. 고분벽화들에는 용이나 학을 탄 신인(神人), 별신, 달신, 해신, 대장장이 신, 각종 동물들, 하늘을 나르는 여신, 옥녀(선녀)들이 등장하는데 이는 한국 도교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도교의 벽화라고 할 수 있다. 수노인도 도교적인 장수신앙의 종교화이면서 장르로는 회화이고, 그림의 성격으로는 인물화이면서 초상화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초상화지만 실재 모델의 얼굴을 보고 그린 것이 아니라 별을 생각하면서 상상으로 그린 얼굴인 것이다. 그림의 비탕 재료는 종이, 천, 나무판, 회벽이고 물감은 진채(眞彩)와 수묵이다. 대체로 수성노인도(壽星老人圖)가 백발에 수염이 길고 구부러진 지팡이를 짚고 있는 패턴으로 보아, 노자, 신선, 산신을 연상해서 복합적인 형상이 만들어졌으며
지금으로부터 1464년 전 발행된 『북사(北史)』에 '탐모라국에는 노루・사슴 등이 많으며 백제에 부용(附庸) 되었다.'라는 기록이 있다. 또 옛 기록들에 보면 '한라산에는 호랑이나 표범, 곰, 이리와 같은 사나운 짐승은 물론 여우와 토끼도 없으며, 날짐승에는 황새, 까치, 부엉이가 없고 산중에는 기괴한 새들이 보인다.'고 했다. 조선시대 진상으로 바쳤던 짐승으로는 사슴, 돼지, 해달(海獺)이 있다. 한라산에 사슴과 고라니가 멸종된 후에 노루만이 남아 있다. 지금 우리 호모사피엔스는 지구 생태계 최대의 제왕으로 군림하고 있으며 그가 경영하는 환경은 너무나 악화돼 있다. 이미 오래 전에 인류세라는 불안한 시대가 열리면서 여섯 번째 대멸종이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서기 1600년대에 지구상에서 멸종된 포유류 수는 약 60여종이나 되었고, 이들 중 대부분이 19세기와 20세기에 걸쳐 사라졌다. 한라산의 사슴은 19세기에 자취를 감췄으며 한반도에서는 20세기초에 그 사슴이 멸종되었다. 존재하는 것에 대한 인상(印象)은 하나의 관념을 만들어낸다. 인간은 상상력의 동물이어서 존재하는 것이 있다면 거기에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유토피아가 없으면 헤테로토피아(Hétér
2023년 6월 25일은 어느덧 김택화 화백의 서거 17주기를 맞는 날이다. 참으로 세월의 빠른 흐름에 무상함을 느끼는 시간, 먼저 떠나 고인의 명복을 빌면서 그가 제주에 남긴 예술혼을 다시 새겨보는 자리를 마련하고 한다. 김택화는 천성이 화가라는 이름에 걸 맞는 인물이었다. 제주에서는 ‘택화화실’, ‘택화풍’이라고 그를 지칭하던 대명사가 있어 그의 스타일을 대변했었다. 언제라도 떠오르는 그의 첫 인상은 그림이 곧 그였다는 생각이다. 아담한 키에 평소 챙이 없는 모자를 즐겨 쓰고 말을 매우 적게 하면서 빙긋 웃기만 하는 스타일은 모르는 누가 봐도 딱 첫 눈에 화가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사람 스타일은 환경이 만드는 것이다. 몰두하는 일의 깊이가 클수록 그것의 그림자가 덧씌워지는 법이니까. 우리는 그것을 ‘한 몸 되기’라고 하며 그 사람이 풍기는 인상으로 남는다. 인상은 자주 대하는 대상의 영향을 받아서 점점 그것을 다루는 행위자의 특성을 갖게 된다. 김택화는 ‘처음이 많은 화가’이다. 사람들은 ‘처음이 많은 화가’라는 말이, 무슨 말인지 몰라 어리둥절할 것이다. 처음이란 시작, 기원처럼 시간적 의미로서의 출발을 말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기원이란 ‘원인의
새로운 연재를 시작한다. 미술평론가 김유정의 제주문화 이야기 '길 가는 그대의 물음'이다. 우리의 삶에서 우러나오는 최애(最愛)의 아름다움이란 무엇이고, 그것의 가치는 무엇인지 찾아가는 여정이다. 제주문화의 기저에 흐르는 돌, 바람, 여자, 말, 물(가뭄)의 5多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지를 살핀다. 비밀의 정원에 쌓인 잃어버린 시간과 기억의 지평을 열어 우리 삶의 소중한 모습을 복원하고자 한 기획이다. 독자제현의 애독을 바란다. /편집자주 우리는 나 자신에게 묻는다. 나는 누구인가. 그러나 나는 내 존재(存在)를 모른다. 우리는 아직 갈 길이 멀다고 생각하지만, 하루해가 빨리 지는 것을 한탄하면서 생의 짧음을 인정한다. 우리는 사는 동안 많은 일을 한다. 세상은 매일 나에게 수많은 질문을 던져놓고 그 대답을 미처 확인하지도 못한 채 잠들게 만든다. 그래서 삶은 언제나 미완으로 남는 것처럼 보인다. 마치 싸락눈 위로 다시 내리는 함박눈처럼 반복되는 의문이 쌓이지만 그래도 내일의 햇살을 기다리는 것이 우리의 인생사다. 이백(李白)도 누군가가 “나에게 왜 푸른 산에 사느냐고 물어서(問余何事栖碧山) 그냥 웃기만 했더니 마음이 한가롭다(笑而不答心自閑)”라고 했다. 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