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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정의 '길 가는 그대의 물음' ... 제주문화 이야기(2) 올레화가 김택화

 

2023년 6월 25일은 어느덧 김택화 화백의 서거 17주기를 맞는 날이다. 참으로 세월의 빠른 흐름에 무상함을 느끼는 시간, 먼저 떠나 고인의 명복을 빌면서 그가 제주에 남긴 예술혼을 다시 새겨보는 자리를 마련하고 한다.

 

김택화는 천성이 화가라는 이름에 걸 맞는 인물이었다. 제주에서는 ‘택화화실’, ‘택화풍’이라고 그를 지칭하던 대명사가 있어 그의 스타일을 대변했었다. 언제라도 떠오르는 그의 첫 인상은 그림이 곧 그였다는 생각이다. 아담한 키에 평소 챙이 없는 모자를 즐겨 쓰고 말을 매우 적게 하면서 빙긋 웃기만 하는 스타일은 모르는 누가 봐도 딱 첫 눈에 화가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사람 스타일은 환경이 만드는 것이다. 몰두하는 일의 깊이가 클수록 그것의 그림자가 덧씌워지는 법이니까. 우리는 그것을 ‘한 몸 되기’라고 하며 그 사람이 풍기는 인상으로 남는다. 인상은 자주 대하는 대상의 영향을 받아서 점점 그것을 다루는 행위자의 특성을 갖게 된다.

 

김택화는 ‘처음이 많은 화가’이다. 사람들은 ‘처음이 많은 화가’라는 말이, 무슨 말인지 몰라 어리둥절할 것이다. 처음이란 시작, 기원처럼 시간적 의미로서의 출발을 말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기원이란 ‘원인의 이유를 설명하는 발단’이 되거나 무엇인가 ‘설명하기에 충분한 시작’이라는 의미가 있다.

 

화가에게 행위나 사건의 시작이란, 어떤 의도한 주제를 첫 번째로 수행하는 것, 미술활동을 말하는데 화가라면 당연하게 창작에 대한 발표, 즉 전시 행위가 되는 것이다. 거기에는 특정 장소성과 함께 시간성의 의미를 포함하게 된다.

 

김택화에게 ‘처음’의 의미는 제주인이라는 특정 장소성(고향)에 기반하면서 처음의 시간성(언제)이 어디서, 어떤 과정으로 이루어졌느냐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사실 지금의 의미는 그 처음이 주는 의미와는 다르겠지만 화단이 형성되지 못한 초기 제주의 상황으로 볼 때 이런 처음의 의미는 미술사적인 맥락에서 매우 중요할 수밖에 없다. 누가, 무엇을, 어디서, 시작했는가?

 

제주미술인으로서 김택화가 처음 시도한 미술활동을 네 가지를 정리하면, 제주 극장 간판을 공동(김택화, 고영만)으로 처음, 제주 추상화가로서 처음, 상품 디자인을 처음, 올레를 그린 화가로 처음인 것이다.

 

1) 현대극장 성길사한(징기스칸) 간판 중학생으론 처음

 

1950년대 한국전쟁기에 김택화는 오현중학교를 다녔고, 고영만은 제주중학교를 다니면서 친구로 지내면서 사라봉, 용두암 등 제주시 곳곳에 스케치를 다녔다. 당시만 해도 배고픈 시절에 중학생에게 돈이 있을 턱이 없었다. 둘은 마침 현대극장으로부터 극장간판을 그려달라는 제의를 받았다.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사람이 귀한 시대였고 약간의 수고비를 준다는 말에 둘은 솔깃하여 합작으로 그림을 그리기로 했다.

 

영화 포스터의 내용은 ‘성길사한’, 곧 징기스칸이었다. 먼저 고영만이 징기스칸의 얼굴과 싸움 장면을 그리면, 김택화는 남겨둔 빈 공간에 새로 글씨로 크게 ‘성길사한’이라고 썼다. 두 사람은 거의 하루 종일 그려서 약간의 돈을 받으면 주변에 있는 중국식 찐빵을 맛나게 사먹었다. 중학생이 극장 간판을 그리게 된 것은 간판을 그리던 육지 사람이 어떤 사정으로 인해 자리에 없자 대용으로 급하게 극장간판을 그리게 된 것이다.

 

사람에게 이별은 언제나 있다. 만남과 헤어짐은 경우를 달리해서 반복될 뿐 그것을 거부하지는 못한다. 김택화가 서울로 떠나기 전인 1957년 8월 14일부터 20일까지 고영만에게 만날 날을 기약하면서 둘은 일주일간 제주시 오아시스 다방에서 2인전을 열었다.

 

2) 제주 추상화가로서 처음, 멍 때리는 추상화 <작품 7>

 

고영만은 중학교를 졸업하여 제주 사범학교로 진학하고, 김택화는 형님이 체신청에서 근무하는 서울로 가서 전보 배달로 고학을 하며 홍익대학교에 입학했다. 누구보다 부지런했던 김택화는 아침 일찍 다른 학생들이 등교 하기 전에 늘 뎃생실에서 그림을 그리는 학생이었다.

 

 

1962년 22세의 김택화는 대학교 2학년생이었다. 당시 국전은 11회를 맞았는데 김택화가 추상화 작품 <작품 7>을 출품하여 특선을 받은 것이다. 당시의 회화부문 특선은 모두 23명이었고 이들에게서 대상과 문교부장관상이 가려지는 구조였다. 우연처럼 보이지만 이 23명의 특선자 중에는 제주와 연관된 사람들이 있었다. 김택화의 스승 홍종명, 현재 저지 현대미술관에 전시관이 마련돼 있는 박광진, 전 제주대 교수 강길원이 그들이다. 11회전 심사위원은 15명, 이들 중 김환기, 박수근, 장리석 등이 속해 있었다.

 

1962년의 미술계 이슈는 매우 뜨거웠다. 무엇보다도 당시 진보적인 종합지 『사상계』에서 국전을 새롭게 재조명한 것이었다. 이름하여 국전 ‘선외선’이다. 이 국전 ‘선외선’은 1949년부터 시작된 국전의 공정성을 재점검하기 위해 박정희 군사쿠데타 이듬 해인 1962년 국전 11회부터 처음 시작한 것이다. 이전 국전 10회전을 넘기면서 온갖 비리가 노출돼 세상에서는 미술계에 대한 불신 풍조가 팽배하자, 그것의 경각심을 심어주기 위해 상징적으로 수상작을 제대로 평가해보자고 마련한 심사였다. 이 심사는 미술계에 대단한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당시 『사상계』에서 내세운 심사위원은 5명이었는데 국전 심사위원과 관련이 없는 사람들로 구성되었다. 조각가 백문기, 서양화가 박서보, 미술평론가 이경성, 동양화가 박래현, 서양화가 김영주 등이 그들이다. 심사 방식은 이들 5명이 각자 자신이 볼 때 가장 좋다고 생각하는 작품 1점을 골라 평을 하는 것이었다. 국전 11회전에 출품된 작품을 ‘심사위원들이 내가 좋아하는 작품’으로 선정하여 국전 ‘선외선’으로 『사상계』에 화보를 싣는 것이다. 김택화의 <작품 7>은 심사위원 박서보에게 채택되어 작품 추천평을 받을 수 있었다.

 

“김택화의 <작품 7>을 나는 기꺼이 추천한다. 흔히 빠지기 쉬운 추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의 작품의 핵을 이루는 것은 바로 멍한 점, 이것이 그의 예술내용을 형성한다. 외향적 발산보다는 내향적 집념형. 하나 흠이 있다면 긴박감이 허술하다고나 할까. 22세의 작품치고는 그 세계가 놀랄만큼 성숙하다"라고 추천사를 썼다.

 

김택화의 <작품 7>은 뜨거운 추상이라고 하여 서정적인 추상을 말하는 것이다. 짙은 갈옷의 색이 화산암으로 보이기도 하는데 화면 중심을 비켜 위와 옆으로 약간 치우쳐 어두운 색으로 덧나듯 굵은 선이 흐르고 중간 상하로 그어진 선 사이로 발색된 노란계열의 색이 은은하다. 이 작품은 매우 차분하여 굳은 화산 대지로도 보이고 완고하고 뚝심있게 묵시(默視)로써 세상을 보는 듯하다. 무거운 기운이 내려앉아서 우리에게 불편한 마음을 전해준다. 제주로부터 전해지는 암울한 마음이 오래도록 응고된 채 남아 있는 것이 아닌가. 당시에 가난에 허덕이던 그의 삶도 역시 그렇고.

 

3) 그라(래)픽 디자인전 처음, 한라산 소주 라벨디자인을 해

 

김택화는 국전 11회전 특선 이후 낙향하여 제주에서 몇 번의 전시를 가졌다. 1963년 7월 뉴욕 다방에서 개인전을 연 후 이듬해 7월에는 다시 춘홍다방에서 개인전을, 그리고 1965년 8월 제주 화가로서는 처음으로 ‘그라픽 디자인전’을 길다방에서 열수 있었다. 아마도 서울 생활의 영향으로 상표 디자인에도 관심을 가진 것으로 생각된다.

 

몇 안 되는 향토 기업 가운데 대표적인 주식회사로는 한라산 소주가 있었다. 당시 소주는 24도 짜리와 21도 짜리 희석식 맑은 술을 팔았다. 한라산 소주의 그림은 남쪽에서 본 한라산으로 머리에 흰눈이 쌓인 모습이었고 그 흰눈 때문에 하늘은 더욱 파랗게 보였다. 겨울이면 그 술병이 춥게 느껴지고 더운 여름에는 시원하게 느껴지는데 술을 마셔서 취기가 오를 수록 그 술병의 디자인은 더욱 진가를 발휘했다. 몸이 열이나 더워지기 때문에 시각적으로 시원한 느낌을 주어 소주를 더 마실 수 있었다. 사람들은 한라산 술병을 보면서 원시적이랄까, 마치 북한 술병 같다는 말을 자주 했다.

 

1994년 필자는 김택화 화백과 함께 지인 4명이서 세종갤러리 전시 오픈을 마치고 시민회관 동쪽 작은 주막에서 한라산 소주를 마신 적이 있었다. 그때 김택화 화백이 한라산 디자인 라벨(label)에 대해 말해주어 나는 그제서야 한라산 라벨 디자인이 그의 작품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한 번은 한라산 소주 회사에서 푸른 색 라벨 대신 연두색 디자인에 금색 글씨로 디자인을 바꾼 적이 있었다. 기억하기로는 1년도 안 돼 다시 김택화 디자인 라벨로 컴백하여 오늘에 이른다. 소문에 의하면 소주 소비량이 연두색 라벨이 파란색 디자인만 못하다는 것이었다. 취할수록 시원한 느낌이 강하기 때문이다.

 

4) 올레를 그린 화가로서 처음

 

변화란 과거를 잃어버리는 것의 시작이고, 정체(停滯)란 미래가 없는 것을 말함이다. 변화나 정체 모두 출발은 현실에서 시작되니 현재를 밟고 선 우리에게 이 둘다 변화이자 멈춤으로써 방식이 다른 것일 뿐이다. 하나는 있던 것을 지워버리고 기억에 남기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있던 것 위에 쌓아서 새로 경험해야하는 것이다. 어느 것이 좋고 나쁜지는 기억과 경험에서 익숙한 것들 먼저 떠오를 것이다. 지난 것은 아름답게 느껴지고 다가오는 것은 신선하게 느껴진다. 그러나 무상함과 기대는 가는 방향이 다른 것 같지만 사실은 같은 것이다. 모든 기대도 끝내 무상하게 돌아오기 때문이다.

 

 

올레는 초가 건축의 한 구조이다. 원래는 마소 관리, 바람 막음, 경계 구분, 구조의 ᄀᆞᆸ가름을 위한 것이다. 올레는 새로운 이름으로 제주도 전역의 길로 거듭났다. 2007년 첫 코스를 개통한 이래 5년 여 만인 2012년 마지막 21코스를 완성했다. 모든 것은 가지를 벋는다. 변화의 물결을 막을 수 없지만 또 막을 필요도 없는 것이다. 모든 것은 새로 만들어지지만 그것도 시간이 가면 자연스럽게 정착되고 사라진다. 결국 시간이 그것을 정리하기 때문이다.

 

제주 전역이 올레가 된 지금, 1965년 김택화는 제주에 귀향하면서부터 구상으로 방향을 바꾼 뒤 1978년까지는 인물이나 정물, 부분적으로 배와 풍경, 절경을 많이 그렸으나 1979년부터는 본격적으로 제주도 전체로 작품의 장소와 소재를 넓혀 나갔다. 그후 아름다운 제주 풍광에 홀려 제주도 전역을 캔버스에 담기 시작했고, 시간이 흐른 지금은 본의 아니게 그때 그린 그의 그림들이 최초로 올레를 그린 작품이 되었다. 마을 길, 집올레, 초가, 오름, 해안, 포구, 아름답다고 생각되는 모든 절경 지점이 그의 작품의 대상이 되었다.

 

현재 김택화미술관에 전시돼 있는 작품들 앞에 서면, 보는 사람이 마치 올렛길을 걷다 잠시 멈추어 서서 마을 안을 들여다보는 느낌을 받을 것이다. 그것도 40~50년전 옛 올렛길을 말이다. 길은 길을 따라가고 가다가 멈출 곳인 폭낭을 바로 돌아 마을의 집올레로 들어가면 아침의 강렬한 햇살에 깨어나는 제주의 마을과 초가를 볼 수 있다. 다시 햇살은 마을을 넘어 잠녀들과 함께 해안으로 가서 바다의 여(礖)에게 말을 건다. 햇살은 다시 포구를 비추면서 아침에 바다에서 들어온 배를 따스하게 비춘다. 특히 제주시 애월읍 상가리 올레는 제주의 폭낭, 초가와 올레를 기록화로 삼을 수 있을 만큼 많이 그렸다.

 

 

폭낭, 눌, 돌담, 배, 사구(沙丘), 해변, 파도, 마을길, 정주석, 초가, 폭설과 잔설, 바다 용암들, 구름과 바람마져 그에게 소중한 제주의 풍경이었고, 그것들은 봄, 여름, 가을, 겨울 4계절, 시간과 때를 맞춰서 모두 새롭게 태어난다.

 

풍토의 새로움은 화가의 독창성을 부추긴다. 1984년 6월 동인미술관에서 지난 한 해 동안 그린 작품들을 모아 마련한 열 번째 개인전에서 그는 고백처럼 자신의 심경을 말하고 있다. “이곳 고향 산천 속에서 살아온 제가 그동안 무수히 스쳐지나 다니면서도 미쳐 느껴 볼 수 없었던 그 소박하고 사랑스러운 아름다움들을 손이 닿는데로 마음이 가는데로 표현해 보았습니다만 다니면 다닐수록, 그리면 그릴수록 조그마하게만 생각되어지던 섬 덩어리가 이토록 거대하고 무한한 것의 놀라움에 가슴설레일 뿐입니다.” 김택화는 작은 섬으로 알았던 제주가 거대한 우주처럼 무한한 것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크고 작은 것은 상대적인 것이다. 참새에게는 독수리가 크고 개미에게는 참새가 큰 것처럼 크기란 존재자의 규모에 대한 체적(體積)으로 느끼는 비례일 뿐이다.

 

작다고 생각할 때는 작아보여도 크다고 인식하게 되면, 또 그것을 바라보는 당사자의 시선은 확장된다. 공간이 작다고해도 그 공간을 확장해서 해석할 수 있는 눈이 열려있다면 그 공간은 무한대와 다름 없을 것이다. 김택화는 작은 것에서 대우주를 보는 눈을 가진 화가였다.

 

자연이 회귀하는 것처럼 올레의 화가도 추상화에서 구상화로 돌아왔다가 만년에는 또 다시 구상화가 점점 해체의 길을 가면서 공간이 생략되고 사라지는 감멸기법(減滅技法)을 추구했다. 마치 화면이 지워지면서 실제 공간으로 연결되는 느낌이 되도록 점점 사라지는 작업을 하던 김택화 자신도 스스로 자연으로 돌아갔다. 2006년 6월 25일의 일이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김택화= 1940년 용담 2동 출신으로 제주북교, 오현중, 서울 동북고, 홍익대 미대 회화과를 중퇴했다. 1962년 홍익대 2학년 때 국전 11회에 국전 특선을 하고 1964년 추상화 그룹 ‘오리진 회화협회’ 창립 맴버로 활동했다. 홍익대 미대 2학년 때 학비문제로 중퇴하여 부득불 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1965년 제주에 내려와서 구상으로 작업을 바꾸었다. 귀향 직후 신성여고 미술교사와 1974년부터 줄곧 제주대 미술교육과를 출강했다. 한국미술협회 제주지회장, 제주예총지부장, 제주도립미술관 건립추진준비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현재 함덕에 김택화미술관이 있다. 제주도민들의 성원에 힘입어 공립 김택화미술관을 추진중에 있다.

 

김유정은?

= 최남단 제주 모슬포 출생이다. 제주대 미술교육과를 나와 부산대에서 예술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미술평론가(한국미술평론가협회), 제주문화연구소장으로 일하고 있다. 저서로는 『제주의 무신도(2000)』, 『아름다운 제주 석상 동자석(2003)』, 『제주의 무덤(2007)』, 『제주 풍토와 무덤』, 『제주의 돌문화(2012)』, 『제주의 산담(2015)』, 『제주 돌담(2015)』. 『제주도 해양문화읽기(2017)』, 『제주도 동자석 연구(2020)』, 『제주도 산담연구(2021)』, 『제주도 풍토와 문화(2022)』, 『제주 돌담의 구조와 형태·미학(2022)』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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