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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정의 '길 가는 그대의 물음' ... 제주문화 이야기(6) 무용과 유용의 차이

 

석다(石多)의 고향

 

돌이 많다는 것의 평가도 시대에 따라 담론이 달라진다. 과거에는 제주가 석다(石多)의 변방이자 척박(瘠薄)함의 대명사로써 고작 말이나 키우는 황무지 목장으로 인식됐다면, 오늘날은 문화경관으로써 제주도의 독특한 특성을 보여주는 자연자원으로 인식되고 있다. 돌은 자연에서 나와 사람의 손을 거쳐서 구멍이 송송한 돌담이 된다. 오로지 제주에 현무암 재료가 많다는 이유로 대표적인 토산재(土産材)가 된 것이다.

 

그러나 흔하다고 가치가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양적(量的)인 것이 질적(質的)인 것을 새롭게 구현하기도 한다. 어떤 경우든 세상 만물은 그 무엇이라도 각각의 효용성과 오로지 그것만이 할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역할이 있다.

 

돌은 이 두 가지 양면성을 모두 가지고 있다. 돌은 섬땅을 거칠게 만든 원인도 되겠지만 반대로 섬의 모진 바람을 막아주는 매우 요긴한 결과도 있었다. 그러기에 돌을 모두 나쁘다고 하는 것도 틀렸고, 모두 좋기만 하다고 해도 꼭 들어맞진 않는다. 사물에는 그것만의 속성이 있고, 또 상황에 따라 그 사물의 상태가 달라지기도 하며, 대응하는 방법에 따라 효용성도 다르게 나타난다.

 

돌의 물리적 속성이 갖는 특성에서는, 밭농사를 매우 어렵게 만들기도 했지만 목축산업의 경계구분과 방풍을 위한 돌담의 역할에서는 더없이 이로운 기능을 수행했던 것이다. 한갓 하찮다고 생각했던 돌덩이라도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를 지킬 수 있다면 유용한 힘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고, 만일 그렇지 못하게 되면 그저 쓸모없이 구르는 파치(破治)로 취급되기 일쑤다.

 

사실 파치도 여러 모로 쓸모가 많다. 보석 원석의 부스러기도 다른 보석과 어울려서 아름다운 하모니를 이룰 수 있고, 감귤 파치도 훌륭한 주스나 요리 재료가 되기도 한다. 천차만별의 보통사람들도 저마다 제 눈의 안경이 돼 상대방의 가치를 알아볼 수 있었던 것이다.

 

 

유용과 무용, 쓸모 있음과 쓸모없음

 

파치는 정확히 말해서 상품이 못되는 제품, 즉 공산품을 말한다. 농산물도 상품이 되면서 상품으로 판정된 것만 인정하고 나머지는 모두 파치가 된다. 여기에 상품미학의 무서움이 있다. 오로지 해당 상품을 돋보이게 하는 일이 상품미학의 본질이라면, 본질이 어쩠더라도 상품 포장에 더 신경 씀으로써 상품의 가치를 인정받아야 하는 그 기준만을 위해서, 모든 역량을 집중하게 된다.

 

언젠가 나는 “기준은 권력이다”라고 말 한 적이 있다. 어떤 것에 기준을 조금만 완화하게 되면 많은 것들이 살아날 수 있고, 많은 사람들이 그 혜택을 받을 수 있다. 하지만 상품의 목표가 이윤을 창출해야만 하는 목적을 갖게 되면서 그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기준을 더욱 강화하게 된다. 사실상 기준이란 그 사회의 이데올로기에 불과한데, 그 이데올로기는 결국 소수를 위한 소수에 의한 자본주의 질서를 유지하려는 상품 생산자들의 마케팅인 셈이다.

 

만일 하나의 농산물을 생산품으로 본다면 기준에 못 미치는 작은 것이라도 버리지 않고, 용도를 달리해서 유통시키기가 쉽다. 생산품이란 대지에서 이룩한 모든 물적인 산물을 말하는 것으로써 모양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맛의 차이에서 맛의 깊이만 다를 뿐 큰 차이는 없다. 상품보다는 생산품이 그만큼 유용한 쓰임의 범위가 넓어지게 되는 것이다. 자본주의 눈으로 보면 상품은 유용한 물건이고 파치는 무용한 물건이 된다. 반대로 생산자의 시각으로 보면 상품이나 파치나 다 유용한 물건이 된다. 거기에 기준이 설정되면서 잘 생긴 것을 상품으로, 못생긴 것을 파치로 여기게 된 것이다.

 

 

옛날에 돌은 골칫거리였다. 돌을 딴 데로 치우는 것도 버거 워서 밭 주변을 최대한 이용했던 것이 오늘날 돌담이었다. 그것으로 보면 돌은 그냥 무용한 물건에 불과했다. 그러나 강한 바람이 불고, 사유지가 생기고, 또 집을 짓는 재료가 되면서 농사를 위한 방풍(防風)과 경계 구분을 위한 담(墻, fence)이 되면서 마소의 침입 방지에 적합해서 점점 유용한 물건으로 인식되었다.

 

요즘에는 돌도 귀해서 돈이 되고 있다. 토산재로써 돌은 건축 분야에서 제주다움의 건축미를 위해서 매우 중요한 재료가 되고 있다. 돌은 무엇보다도 내구성(耐久性)이 좋으며, 형태를 가공할 수 있는 성형(成形)의 응용력이 뛰어나 제주 자연경관에 어울리는 건축미를 좌우한다. 한 마디로 돌은 자연친화적이라는 장점이 있다.

 

사실 돌이 등장하기 전에는 목재가 제주 지역을 지배했다. 목재는 비교적 부드러워서 다루기가 쉽고 가까운 한라산이나 곶(藪)의 천연 수림지대에서 쉽게 구할 수가 있어서 각광을 받았다. 그러나 목재는 물에 약하다는 것이 큰 약점이어서 외부의 설치물들은 점점 돌에게 내어주고 말았다.

 

 

낭(나무)에서 돌로 대체 시킨 환경

 

낭(남, 나무)의 효용도가 많아 도구의 역사 중에서 석기, 골각기, 목기(木器, 썩는 특성 때문에 오래된 유물을 보기 어렵다)는 인류 처음 시대에 해당해서 나타났다. 농기구, 가옥의 대문 등 내부에 두는 도구는 나무를 사용하면서도 외부에 축조하거나 설치되는 도구들은 물팡, 디딜팡, ᄆᆞᆯ팡돌, 정주석이 있고, 화로, 봉덕, 돗도고리 같은 도구들은 모두 돌로 대체되었다.

 

제주도의 목재 이용은 대개 도구에 집중되고 있다. 실내에서 사용하기 때문에 동백기름을 매기면서 내구성을 유지하였다. 목재로 만든 도구들을 보면, 잠대(쟁기), 절벤(동그랑떡, 빗살무늬로 해를 상징)과 솔벤(월변, 반달로 달을 상징) 떡본, 안반(나무 안반과 돌 안반이 있다), 솜빡(솔빡), 되약새기, 곰배, 도리께, 세답막개, 덩드렁막개, 당그네, 갈래죽(가래죽, 삽), 쉐질메, 마소 멍에, 테왁어음, 남도고리, 남박, 남테, 나막신, 마차, 혼백상자, 뒤주, 차경, 차경, 사둘, 산태, ᄃᆞᆯ체, 살레, 궤, 남죽, 남자, 괴움낭, 낭공쟁이, 목도낭, 목탕(목침), 남박새기, 참빗(쳉빗), 작박, 개판, 기둥, 포, 문지방, 고팡문, 대문, ᄌᆞ록, 선반, 돔베 등이다.

 

 

제주도 나무의 대표적인 수종으로는 소낭(소나무)에도 곰솔(흑송)과 비교적 해발고도가 높은 데 1000m 이상에서 사는 적송이 있고, 사옥(벚나무),굴무기낭(느티나무), ᄌᆞ배낭(구실잣밤나무), 북가시낭(ᄇᆞᆰ가시나무), 가시낭(종가시나무), 먹쿠실낭(멀구슬나무), 녹낭(녹나무), 폭낭(팽나무), 조록낭(조록나무), 노가리낭(주목), 비자낭(비자나무), 솔피낭(솔비나무), 후박낭(후박나무), 종낭(때죽나무), 구상낭(구상나무), 황칠낭(황칠나무), 돔박낭(동백나무), 굿가시낭(구찌뽕 나무), 윤노리낭(민윤노리나무) 등이 목재 도구의 재료로 쓰였다.

 

그러나 목재는 아무리 단단한 나무를 사용했다고 하더라도 제주도는 연 평균 강수량이 1800mm가 되고, 습기가 많아서 목재는 외부용 설치도구인 경우 10년을 넘기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조선시대에는 목장의 목책(木柵) 대신 돌담으로 교체되기도 했다.

 

아무튼 외부에서 수명이 짧은 목재의 약점을 보완하고자 등장한 것이 석재였다. 특히 외부용 설치 도구들은 장기간 존속돼야 교체하는 노동의 번거로움을 덜 수 있었기 때문에 주로 건축 관련 축조물에 이용되었다.

 

돌로 된 도구들이나 설치물들을 보면, 주로 마모나 동물의 움직이는 힘을 견뎌야 하는 것들에 사용되었다. 곡물을 계속 찧어 장만해야 하는 돌절구, 가루를 내기 위해 오래 돌려야 하는 ᄀᆞ래(맷돌)와 풀ᄀᆞ래, 받혀서 깨지지 않도록 힘이 센 돼지를 위해 마련된 돗도고리. 강한 불씨를 견뎌야 하는 돌화리(화로)나 봉덕, 지속적으로 옷을 두드려펴야 하는 돌안반, 물 묻은 물구덕을 보관해야 하는 물팡, 마소에게 물이나 ᄎᆞᆯ(꼴)을 먹일 때 넘어뜨리지 않도록 한 무거운 돌구시(구유), 눈과 비, 바람에도 잘 서도록 만든 정주석 등이다.

 

도구의 재료는 견고해야 선택되고, 또 도구의 사용에서는 시간을 절약할 수 있어야 실용적이라고 생각한다. 즉 도구는 제주 풍토가 비바람을 이겨내야 하는 환경 여건에서 생계를 이롭게 하는 기능성을 우선 생각하는 것이 도구 본연의 역할이 아닐까.

 

 

물질의 속성은 남아도 형태는 변한다

 

필자는 2015년 발행된 『제주 돌담』이라는 책에서 같은 현무암이라도 제주 안에서 지역마다 돌담이 다르다고 쓴 적이 있다. 화산 현무암 지대이지만 색깔이나 모양이 다룰 수밖에 없는 것은 돌이 생성될 때 마그마의 성분과 온도와 굳은 조건들이 달랐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돌이라면 그저 딱딱하게 죽은 무기물(inorganic matter)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돌과 같은 고체(solid)도 과학적인 개념의 ‘계(系,lineage)’에서는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분자들의 멈추지 않는 움직임이 있다. 물론 기체 상태에서 분자들은 활발하고 빠르게 움직이는 것이 사실이지만, 고체 상태에서는 분자들이 매우 천천히 느리게 움직일 뿐이다. 하지만 고체는 겉이 딱딱해서 정지된 것처럼 보여도 사실은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어 살아있는 것이다. 분자(分子, molecule)는 어떤 한 물질에서 그 물질의 특성을 유지하는 최소 단위를 가리키는 말이다.

 

단단한 고체인 돌도 분자운동에 의해 시간이 흐르면서 마모되거나 균열이 일어나 쪼개지고 , 마침내 작은 알갱이로서 가루가 된다. 지질학적 시간은 인간의 감각으로 보면 매우 더디고 지루한 연대기라고 할 수 있다. 하기야 인간은 수십억 년의 지질 연대에 비하면, 기껏해야 100년 수명을 채우기도 어려운데 더디고 더딘 암석의 변화 과정을 맨눈으로 관찰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하지만 인간은 대를 이어서 다시 뒷사람에게로 진화의 끈을 이어주어 문명의 힘을 빌려서 물질의 분자 운동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사실 돌이라는 고체 내부의 분자 운동이든, 외부적인 영향에 의한 풍화작용이든 돌의 형태들은 하루하루가 매우 천천히 변하면서 조금씩 형태가 달라진 것이다. 생각지도 않게 자신이 태어나던 해에 보았던 돌담이 노년이 돼서도 그대로 같은 돌담으로 서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도 결국 그때와 같은 돌담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기에는 우리가 너무 바쁘게 살고 있어서 그걸 몰랐던 것이다.

 

가령 작은 돌담의 변화도 모르고 살던 우리가 어느 날 내 주변 풍경이 눈에 띄게 달라 보이게 되면, 그때서야 화들짝 놀라는 자신의 뒤늦은 자각을 가리켜 우리는 미국의 지리학자 칼 사우어의 개념을 빌어 ‘풍경의 기억 상실‘이라고 부른다.

 

 

돌담, 대표적인 토산재(土産材)

 

지구상의 수많은 사람들도 같은 얼굴이 없듯이 그렇게 흔한 돌도 만인만상(萬人萬相)으로 다양한 색깔과 모양을 띤다. 쌓아진 돌담이 다른 것은 화산 분출시 대지를 뒤덮은 마그마의 화학 성분과 지역 간 온도나 강수량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제주도 송당, 김녕, 한림, 고산, 대정, 가파도, 서귀포, 성산포 등등의 돌담들은 형태와 색채에서 차이가 나는 것이다. 사실상 돌담이 마을마다 다른 이유는 세 가지로 볼 수 있다.

 

먼저, 시간과 시대에 따라 분출된 마그마의 성분이 다르다는 것이 그 하나이고, 돌담으로 쌓은 이후 각종 기후 변화에 의한 외부적인 풍화작용으로 변형되었다는 것이 그 둘이며, 마을 돌챙이(石匠)들이 시대마다 각자 개성적으로 쌓았다는 것이 그 세 번째 이유라고 할 수 있다.

 

분출된 마그마의 성분이 다르다는 것은 같은 현무암이어도 파호이호이 용암, 아아용암, 조면암으로 구분할 수 있고, 용암의 가스 함양에 따른 기공(氣孔)의 크기, 실리카의 함량에 따라 달라지는 돌빛깔이 결정된 후에도, 다시 바람, 기온, 비, 햇볕에 의해 변하는 외부적인 기후 조건까지, 돌의 변색이나 마모, 변형은 오히려 자연스러운 현상일 것이다. 그리고 사람의 솜씨에도 천부적인 재능이 있듯이 돌을 다루는 기술에도 돌챙이(石匠) 개인마다 특성과 장점이 있다.

 

비록 하나의 섬에서도 기후 조건이 비슷할지 모르지만 그곳의 세부적인 풍토적 조건이 지질이나 지형, 풍화 조건에 따라 지역마다 차이가 있을 수 있다. 특히 석질과 풍화적 환경조건이 그렇게 만드는 것이다. 현무암이라도 해안에서 깎인 돌이냐, 내창(乾川)에서 구른 돌이냐, 아니면 드르팟(野)이나 곶(藪)에서 기후에 의해 풍화된 돌이냐에 따라 빛깔, 모양, 형태가 다르다는 것을 말했다.

 

섬 둘레가 400여리(1리:0.4km) 남짓하고 섬 자체가 화산으로 이루어진 섬이지만 제주의 석질은 크게 현무암 내에서 파호이호이 용암과 아아용암, 그리고 조면암 지역으로 구분할 수 있다. 우리는 이것을 토산재(土産材)라고 부른다. 토산(土産)이란 자신이 살고 있는 땅에서 나는 돌을 말하는 것이다.

 

인간은 자신이 사는 곳에 적응해 가면서 살아간다. 그래서 여러 가지 주변 사물이나 기후 현상이 같은 등질지역(homogeneous region)에서 무리를 지어 살면서 서로 이웃을 이룬다. 그러나 만약 그곳에 동화되지 못한다면 우리는 그 장소를 떠나 새로운 곳으로 이주해야만 한다. 이주(移住)란 작게는 집을 옮긴다는 이사를 말하지만 넓게는 삶을 누릴 수 있는 곳을 찾아 떠나는 것이다. 도외나 해외 이주가 그것이다.

 

최근 지구는 난민들의 이주로 인해 떠들썩하다. 이주는 자신이 살던 곳의 정치적 상황이 악화되거나, 경기가 폭망(暴亡)하여 실업으로 경제적인 희망을 잃어버리게 되면 새로운 땅을 찾아서 먼거리를 마다하고 위험을 감수하는 것이다. 어쩌면 인류의 문명사는 누가 뭐래도 길고 긴 이주의 대장정(大長程)의 생존 드라마라고 할 수 있다.

 

“문명은 자연적 장애물에 대한 투쟁의 결과다”라고 한 프랑스의 인문 지리학자 블라쉬(Blache,1845~1918)의 말에는 자연·환경적 조건에서 하루하루 살아갈 수 있는 생계수단을 확보해야 한다는 의미가 들어있다. 문명은 분명히 자연과의 싸움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이 이룩한 도구와 편의시설의 역사인 셈이다.

 

알베르티(L.B.Alberti, 1404~1471)는 말한다. “자연의 힘은 너무도 커서 간혹 장애물에 의해 가로막히거나 다른 곳으로 흐름이 돌려질 수는 있을지언정, 그럼에도 불구하고 맞서고 가로막는 그 어떤 것들도 항상 꺾어버리고 파괴할 것이다.” 그는 자연의 위력을 절대적으로 생각하고 있어서 “사람의 손으로 이루어진 얼마나 많은 것들이 자연에 맞선 까닭에 살아남지 못한 것을 우리는 읽고 또한 보았지 않은가?”라고 반문한다.

 

결국 사람들이 어떤 장소에서 유랑을 멈추게 된 것은 안정적으로 정착할 수 있는 삶의 요소들을 모두 갖출 수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그 삶의 흔적인 자신의 공간에서 자연에 맞서는 돌담을 다시금 볼 필요가 있다.

 

 

마을의 입지 조건이 만들어 낸 돌담 풍경

 

바닷가 마을은 바닷가 마을의 돌담 풍경(landscape)이 있고, 내창〔乾川〕 마을 가까이에는 그 곳의 돌의 특성이 배어든 돌담이 있다. 아아용암이 흔하거나, 그 돌이 가까이 있는 마을에서는 그 아아용암 석재를 건축에 이용할 것이다. 바닷가 먹돌이 많은 지역에선 먹돌로 돌담을 쌓는 것과 같다. 조면암이 발달한 지역에서는 조면암 석재를 쉽게 구할 수 있어서 그것으로 돌담을 쌓을 것이다.

 

그렇지만 재료가 많아도 그 재료가 단지 돌담만을 쌓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다. 석질 자체가 상징적인 예술에도 이용이 가능 하다면, 죽은 자를 위무하기 위해 무덤 석상이나 비석으로도 사용할 수 있다. 비석은 특성상 망자의 생애를 새겨야 하기 때문에 석질이 글자가 잘 보여야 하는 돌을 선택하게 된다. 석상 또한 사실적으로 아이나 선비의 형상을 새겨서 묘주를 기념해야 하기 때문에 좋은 석질이면 금상첨화라고 할 수 있다.

 

조선시대 제주에서는 비석과 석상 제작의 재료가 조면암이 많이 생산되는 화순리와 신예리, 그리고 영락리에서 주로 생산되었다. 제주도 남부지역과 서부지역에 해당하는 지역들인데 이 지역의 돌담들은 조면암 산지라는 이점 때문에 석물을 만들면서 깨트린 담돌들을 손쉽게 이용하고 있다.

 

그렇다면 조면암 산지가 아닌 다른 지역에서는 어떻게 무덤의 석물 재료를 공급했을까. 국가이념이었던 예사상의 전파는 전조선을 조상숭배의 도그마로 몰아넣었다. 공동체 사회가 한꺼번에 성리학 도그마에 휩싸였을 때 남들이 다 무덤에 석물을 세워가니 자신도 덩달아 그러해야 하는 것처럼 집단무의식이 발동한다. 그래서 무덤의 석물 재료가 신통치 않더라도 손 놓고 있는 것 보다는 그래도 낫다는 생각으로 자신의 마을 주변에서 글자를 새길 수 있을 정도의 조면질 현무암을 캐어다가 조면암 대신 비석을 만들고, 아아용암으로는 비록 석질이 나쁘지만 궁여지책을 삼아 석상을 만들어 세우기도 했다.

 

효도를 권장하는 사회에서 돌은 매우 중요한 ‘발견된 상징적 재료’가 되었고, 유독 제사를 잘 받드는 우리로서는 그런 돌의 발견이야말로 곧 국가 이데올로기에 충실한 신하의 역할을 다 한 것이 아니었을까?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김유정은?

= 최남단 제주 모슬포 출생이다. 제주대 미술교육과를 나와 부산대에서 예술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미술평론가(한국미술평론가협회), 제주문화연구소장으로 일하고 있다. 저서로는 『제주의 무신도(2000)』, 『아름다운 제주 석상 동자석(2003)』, 『제주의 무덤(2007)』, 『제주 풍토와 무덤』, 『제주의 돌문화(2012)』, 『제주의 산담(2015)』, 『제주 돌담(2015)』. 『제주도 해양문화읽기(2017)』, 『제주도 동자석 연구(2020)』, 『제주도 산담연구(2021)』, 『제주도 풍토와 문화(2022)』, 『제주 돌담의 구조와 형태·미학(2022)』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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