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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100세 일기] 명절에 떠오르는 옛 추억은 큰 위로 ... 크리스마스까지 맞을 수 있기를

 

어머니가 마당을 바라보며 말씀하신다. “낭썹 호나 꼬딱 안 허는 날이여, 보름 혼 점 어시.....(나뭇잎 하나 까딱 안 하는 날이구나. 바람 한 점 없이)”. 아, 오늘도 우리 어머니, 기분이 괜찮으시구나. 곧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실 게다.

 

아니나 다를까. 소파에서 일어나시더니, 지팡이를 짚으신다. 두 개씩이나. 밖으로 나가려는 두 팔에 힘이 있으시다. 균형을 잡으려는 나름의 방식이다. 그래도 혹시나 싶어서 부축을 해드리려고 얼른 달려 나가면, 기세 좋게 한 말씀을 뱉으신다. “내불라, 이까짓거도 못 열민 사름이가? 송장이주!” 그렇지. 우리 어머니가 아직은 쌩쌩하게 살아계시구나.

 

지난 주까지만 해도 음식을 드리면 고개를 돌려버리시고, 무시로 주무시기만 해서 애간장을 태우던 어머니다. 마치 저승잠을 자듯이 말이다. 흔들어 깨워도 느끼지 못할 정도로 잠에 취해서 깊이 드는 잠, ‘죽음보다 깊은 잠’이 저승잠이다.

 

죽음이 임박하면 ‘우선 섭취하는 음식이나 음료의 양이 현저하게 떨어진다’고 한다. 그리고 잠에 취한 듯이 잠 속으로 빠져든다. 국내 최초로 한국죽음학회를 창설한 최준식 이화여대 한국학과 교수에 의하면, 임종을 앞 둔 사람들에게는 대략 다음의 4가지 현상이 나타난다.

 

의외의 영상: 예컨대 마차나 자동차 같은 ‘탈 것’이 보이는 경우가 있다. 아마도 이것을 타고 떠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리라. 임종을 지켜보는 호스피스들에 의하면, ‘환자가 탈 것이 보인다고 하면, 며칠 내로 몸을 벗는다’고 한다.

 

부모님의 모습: 먼저 돌아가신 부모님, 말하자면 그분들의 영혼이 공중에서 보인다. 부모님의 영상이 아주 생생하다면, 그분들이 영계에서 마중 나온 것이며, 이 세상보다 저쪽 영계에 가까이 갔음을 뜻한다.

 

전혀 모르는 이의 모습: 개인마다 다르므로 확실하게 단언할 순 없지만, 만일 그 영혼이 환상으로 나타난 것이 아니라 실제로 나타났다면, 그들은 당신을 영계로 안내하기 위해 온 영혼일 수 있다. 어떤 임종 환자는 저승사자가 자신을 잡으러 왔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확실히 말하건대 저승사자 같은 것은 없다.

 

환한 빛: 간혹 환한 빛이 보여 그 빛을 전기등이라고 생각해 불을 꺼달라고 하는 경우도 있다. 이런 사람들의 이야기를 종합해보면 방의 천장 쪽으로 아주 환한 빛이 보인다고 하는데, 이 역시 임종이 아주 가까이 왔다는 증거다(출처: 마음건강 길-https://www.mindgil.com).

 

이상의 현상을 참고하면, 어머니도 가끔은 팔로 허공을 휘저으면서, ‘살려달라’고 하신다. “나 살려도라”고 하시면서 두 팔로 내 목을 감싸안을 때, ‘저것들을 쫓아도라’고 하실 때, 아, 목이 메인다. 어린 아이처럼 단단히 보듬어 안고서, 어깨를 토닥이며 기도를 드린다.

 

‘주님, 평생을 주님 위해 살아 온 김성춘 권사님, 자신의 몸을 거름 삼아서 2남7녀를 낳아 키워내신 우리 어머니, 주님께서 어린 아기 처럼 품에 꼬옥 안아 주세요. 천군천사를 동원하셔서 이 악한 세력을 물리쳐 주시고, 평안히 단 잠을 잘 수 있게 지켜주세요’라고.

 

그러면 어머니는 작은 새처럼 몸을 떨다가 서서히 긴장을 푸신다. 어느새 이렇게 작아지셨을까. 내 품에 안겨 들어올 정도로 작아진 어머니의 몸. 그래서 ‘한 줌 흙’이라고 하는 걸까. 어린 아이와 같은 안도의 숨결이, 어머니의 얼굴에서 평화롭게 흐른다. 이따금 ‘나를 위해 기도해 도라’는 어머니의 표정을 보면, 두려움과 외로움이 섞여 있으시다. 아, 고단하고 힘에 부친 백 세의 삶이여....

 

마당으로 나간 어머니는, 배추를 보면서 탄성을 지르신다. “아고, 우리 집도 이제는 부재로구나. 이거민 김치 해영 실컷 먹어지키여, 이! 하영 하영 해영, 이모님도 갖다 드리곡, 예숙이 어멍네도 홑썰 드리게! 배추도, 곡석도 다 하나님이 도와주시난 이추룩 잘 되는 거여. 경 허난 도새기곹이 우리만 먹지 말앙, 어신 사름들이영 갈랑 먹어사 허느네...” 세상에! 어머니는 지금 다시 과거를 사신다. 이모님께서 돌아가신 지 30년도 더 되는데....예숙이 어멍도 5년 전에 천국으로 가시지 않으셨나.

 

사실, 어머니와 함께 대포마을에서 예수를 믿으며, 신앙에 따른 온갖 고난을 함께 견뎌내신 권사님은, 어머니의 가슴 아픈 손가락이었다. 당시는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해괴한 일이라서, 어머니와 아버지는 집안에서 쫓겨났고, 예숙이 어멍은 남편의 술주정과 폭력에 시달리며 눈물의 세월을 보냈다. 어쩌면 어머니 인생에서도 가장 잊을 수 없는 아픔의 세월이었을 것이다.

 

어머니는 먼저 믿은 남편을 따라 마을에서 유일한 예수쟁이가 되었지만, 예숙이 어멍은 혼자 교회에 나온 짝믿음이라, 뒤따르는 핍박이 무섭고도 무거웠다. 남편이 ‘이 놈의 집구석...’이라면서 ‘와당탕, 우지끈’ 하고 집안 식구들을 쫓아내면, 혼자 예배당으로 나가서 마루바닥에 엎드렸다. 한 겨울의 차가운 밤을 꼬박 새우면서 눈물로 기도를 하시는 권사님. 그러다 새벽이 되면, 밤배들이 차례지어 들어오는 포구로 나가서, 생선을 도매해다 중문으로 올라가 파셨다.

 

그 이문이 얼마였는지 모르지만, 그래도 권사님의 피땀으로 자녀들을 다 고등학교에 보낼 수 있었다. 그래서 동네 사람들은 조상님 때문에 당신들은 교회에 나가지 못하지만, 아이들은 교회학교로 보내서 ‘부지런과 정직함’을 배우라 하였다. 권사님의 그 부지런한 믿음과 정직한 장사의 기술이, 농사밖에 모르는 동네분들에게는 특별한 기술처럼, 어쩌면 삶의 비결처럼 느껴졌던가 보다.

 

이모님은 권사님과 달리 어머니의 교회를 무척이나 싫어하셨다. 어렵게 사는 동생이 그나마 없는 살림을 ‘교회에 갖다 바친다’고 생각하신 데다가, 일요일이 되면 온 식구가 놀고 먹는 게 도무지 마땅찮으셨던 것이다. 2남 7녀를 줄줄이 낳더니, 아들은 그렇다 치고, 딸들도 고등학교에 보내는 것이 정말 이해가 되지 않으셨으리라.

 

이모님은 3남 2녀를 두셨는데, 딸들은 애저녁에 초등학교로 공부는 마감을 하였다. 위로 아들 둘은 친척집에 양자를 보냈고, 막내 아들만 고등학교에 진학을 시켰다. 오토바이 타기를 좋아하던 그 아들은 후에 경찰이 되어서, 이모님의 마음을 무척이나 기쁘게 해드렸다. 게다가 물은 피보다 진해서, 남의 집으로 호적을 옮겨간 두 아들도 실제의 삶은 장남과 차남으로서 이모님의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 주었다.

 

그러니, 동생을 향한 이모님의 잔소리는 갈수록 날이 서고 기가 세졌다. 당신은 부부간에 단촐하게 사는 살림이라, 늘 생선이나 고기 반찬을 밥상에 올려놓고 드셨다. 그런데 우리집에 와보면 비좁은 방이 미어질 듯이 밥상을 두 개 펴놓고, 11명이 다닥다닥 붙어서 가운데 놓인 낭푼이에서 저마다 밥을 퍼먹는데..., 어느 입으로 숟가락이 들어가는 지 코가 빠지는 지, 정신이 히여뜩 해서 알 수 없는 지경이었다.

 

그래서 이모님은 입이라도 하나 덜어주려고 아이를 하나씩 자기 집으로 데리고 갔다. 성격이 온순한 넷째 딸 정숙이가 한 학기를 지낸 후에 집으로 돌아왔다. 그다음에 다섯째 딸 정심이가 한 달을 보내고는 보따리를 싸고 왔다. 그 다음은 내 차례.

 

이모님은 넓은 방 한 켠에 책상을 단정하게 놓아주셨다. 방 바닥에 엎드려서 저마다 배를 깔고 숙제를 하는 우리 집과는 수준이 달랐다. 조심스레 서랍을 열어보니..., 세상에! 십원짜리 지폐 여러 장이 서로 등을 붙이고서 나를 쳐다보는 게 아닌가. 이크! 못 볼 것을 본 것처럼 얼른 서랍을 닫는다.

 

‘무엇을 할까’ 하고 둘러보니, 먼지 하나 없는 방바닥이 엄숙한 얼굴로 ‘조심해라’고 말한다. 얌전하게 공책을 책상 위에 펼쳐 놓고, 조심스레 받아쓰기를 하려니.... 책이 자꾸 공책을 밀어낸다. 몇 자를 적어보는데, 왠지 불편하고 신경이 거슬린다. 에라 모르겠다. 책과 공책을 집어서 방바닥에 펼쳐놓고 엎드려 본다. 아, 이제야 제대로 된 듯하다. 얼른 숙제를 마치고 나니 할 일이 없다.

 

방바닥에 누워서 천장을 바라보니, 자꾸만 식구들 얼굴이 아른거린다. 무엇들을 하고 있을까? 어머니는 밭에서 돌아오셨을까? 아니, 해가 서쪽으로 완전히 떨어지지 않았으니.... 아직은 밭에서 일을 마치느라 여념이 없으시겠다. 아, 얼마나 바쁘실까? 보고 싶다, 우리 어머니. 그리고 언니, 동생도.

 

그렇게 일주일을 죽어라 참고 지내던 토요일 아침. 이모님이 차려놓으신 밥상을 보니, 반지기밥(보리 반 쌀 반)에 계란, 김치, 장아찌, 생선이 단정하게 놓여 있다. 에라, 모르겠다. 우리집을 향해 쌩쌩 달렸다. 헐레벌떡 마당으로 달려 들어선 순간, “정심아, 밥 더 펑 오라, 이!’라는 어머니 목소리가 들린다.

 

아, 얼마나 보고 싶은 어머니인가.... 목구멍이 울컥 하더니 눈물이 핑 돌아서 눈 밖으로 나오려 한다. 주먹으로 얼른 훔쳐내고서, “어머니, 나도 와수다!”라며 방으로 들어선 순간, 밥상 위에 놓여 있는 커다란 낭푼이 황금 빛 웃음을 다정하게 웃는다.

 

아, 내가 좋아하는 조밥이다. 그리고 자리젓 냄새. 나는 얼른 밥상에 달려 들어 밥 한 숯갈을 고봉으로 떠올린다. 입으로 우겨 넣고서 자리젓을 손으로 찢어 먹는다. 역시, 조밥에는 자리젓이 최고다. 그런데 웃기는 건, 갑자기 나타난 나를 아무도 의식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아버지만 빙그레 웃으시더니, 밥 한 숫갈을 퍼 주신다. 그리고 자리젓도.

 

그렇게 나는 집으로 귀환하였고, 이모님 집은 두 번 다시 가지 않았다. 오막살이 초가집이라도, 보리밥에 자리젓이 전부일지라도, 온 가족이 함께 모여 사는 우리집이 제일이다. 그래서 세계적으로도 집은 ‘홈, 스위트 홈’인가 보다. 즐거운 곳에서는 날 오라 하여도, 내 쉴 곳은 작은 집 내 집 뿐이리....

 

오늘도 내 글은 어김없이 삼천포로 빠지고 있다. 이 글을 쓰는 오후 1시. 명절 연휴라고 찾아 온 큰 언니의 손에 이끌려 점심을 드시고 온 어머니는, 다시 마당에 앉아서 한 말씀을 하신다. “낭썹 호나 꼬딱 안 허는 날이여, 보름 혼 점 어시.....”라고. 그리고는 다시 고개를 숙이고 조신다. “어머니, 지금 몇 시 인 줄 알아지쿠과? 오후 2시라. 이추룩 잠만 자민 어떵허코? 밥도 먹고 일도 해야 살 건디.... 미신 좋은 꿈이나 꿉디강?”이라고 하자, 어린 아이처럼 화안하게 웃으신다.

 

“우리 어멍은 도순리서 대포로 시집 올 때 밭을 두 개나 물령 와신예. 소문나게 일도 잘 허곡 솜씨도 좋았져! 성아, 성우, 성은, 성택, 성숙, 성냄이 오라방이여 나영, 일곱을 낳아신예....”. “이모님 이름은 미신거우꽈?. “성은이여!”. 세상에! 어떻게 우리 할아버지 김광용님은 당신 큰 딸의 이름을 그토록 세련되게 지으셨을까? 하기야 외할머니 성함, ‘임하용’도 알제시대 이름 치고는 얼마나 개혁적인가? 물론 ‘성춘’이란 막내딸의 이름이 화룡점정이지만 말이다.

 

역시 명절은 그 옛날의 추억을 떠올리기 좋은 시간이다. 어머니에게도 오라방들과 함께 밭에서, 바다에서, 논에서, 들에서, 집에서... 오순도순 뛰어놀던 시절이 있었다는 게 얼마나 위로가 되는지..... 오, 주님! 이제는 우리 어머니가 성탄절, 크리스마스를 맞을 수 있는 은총을 베출어 주소서. ‘기쁘다 구주 오셨네’를 부르며, 새벽송을 부르던 그 옛날의 크리스마스 이야기를 다시 들을 수 있도록 말입니다. 부디 이 욕심을 져버리지 말아 주소서.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허정옥은?
= 서귀포시 대포동이 고향이다. 대학 진학을 위해 뭍으로 나가 부산대학교 상과대학에서 회계학을 공부하고 경영대학원에서 석사과정을 마친 후 미국 볼티모어시에 있는 University of Baltimore에서 MBA를 취득했다. 주택은행과 동남은행에서 일하면서 부경대학교에서 경영학 박사학위를 이수했고, 서귀포에 탐라대학이 생기면서 귀향, 경영학과에서 마케팅을 가르치면서 서귀포 시민대학장, 평생교육원장, 대학원장을 역임했다. 2006년부터 3년간 제주국제컨벤션센터(ICC JEJU)의 대표이사 사장과 제주컨벤션뷰로(JCVB)의 이사장 직을 수행한데 이어 제주평생교육장학진흥원장을 거쳤다. 현재는 서울과학종합대학원에서 서비스 마케팅과 컨벤션 경영을 가르치고 있다. 한수풀해녀학교와 법환좀녀학교도 다니며 해녀로서의 삶을 꿈꿔보기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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