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에 막내가 집으로 왔다. 미국 볼티모어에 사는 아들이다. 예고도 없이 불쑥 나타난 동생은, 반가우면서도 낯이 설다. “용익아, 어떵 이추룩 때 맞췅 와저니? 어제 오늘 어머니가 많이 쇠약해지셔서 걱정해신디....” ‘서귀포 강창학 축구장에서 열리는 국제시니어 축구대회에 참석하려고 왔다’는 동생은 여전히 씩씩하고 듬직하다. 어머니를 성큼 안아보더니, 지갑을 꺼내서 돈을 한 웅큼 집어 드린다. 우람한 아들 품에 안긴 어머니는 마치 아기처럼 웃는다. 역시 막내가 최고다. 어머니 속을 많이 태운 만큼 정도 깊이 들었으리라. 등산, 낚시, 운동 등 모든 종류의 힘쓰기를 좋아하는 동생은 몸이 매우 튼튼하다. 그만큼 사고도 많이 따라서 어머니의 애간장을 어지간히 녹였다. 한 번은 육지의 태백산 자락에 등산을 갔다가 추락해서 내가 보호자로 간 적이 있다. 두 팔과 어깨를 붕대로 칭칭 동여맨 동생을 택시에 태우고 공항으로 가는 길에, 나는 끊임없이 잔소리를 해댔다. 왜 또 산에 갔는냐, 그러다가 죽는 수가 있잖나. 네가 죽는 건 어쩔 수 없지만, 어머니 아버지 생각을 해야지 않겠나.... 하나 마나한 잔소리를 들으며 불같은 성미를 꾹 꾹 눌러 참는 동생을, 운전기사가 흘
어머니가 백 세를 넘기면서부터 ‘이번이 어머니의 마지막 명절일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늘 하게 되었다. 102세가 되신 올해는 추석을 준비하면서부터 노천명 시인의 ‘장날’이 떠올랐다. ‘대추 밤을 돈 사야 추석을 차렸다. 이십 리를 걸어 열하루 장을 보러 떠나는 새벽 막내딸 이쁜이는 대추를 안준다고 울었다. 절편 같은 반달이 싸리문 위에 돋고 건너편 성황당 사시나무 그림자가 무시무시한 저녁 나귀방울이 지껄이는 소리가 고개를 넘어 가차워지면 이쁜이보다 삽살개가 먼저 마중을 나갔다.’ 1938년도에 출간된 노천명 시인의 첫 시집 ‘산호림’에 나오는 시다. ‘돈 사야’라는 말은 충청도 방언으로 ‘내다 팔아 돈을 만들어야’라는 뜻이라고 배웠던 국어 시간이 생각난다. 이십 리를 걸어야 하는 외진 마을에서 음력 11일에 열리는 열하룻장을 보기 위해 새벽같이 떠나는 아버지와 대추를 안 준다고 우는 막내딸은, 우리들 어린 시절의 서정이다. 저녁 무렵에 떠오르는 달을 송편에 비유한 시인의 마음 또한 추석을 준비하는 마을 사람들의 애틋한 정서를 담고 있다. 저녁 어스름이 먼저 몰려오고 아버지가 장에서 돌아올 즈음, 하루 종일 아버지를 기다리던 이쁜이는 정작 잠이 들어버렸는지.
추석이 보름 앞까지 다가왔다. 며칠 전부터 할머니 산소를 맡고 있는 언니의 마음이 분주하다. 2남 7녀가 있으니 구태여 다섯째 딸이 노심초사할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어쩌다가 한 번 앞장선 벌초가 자기 일, 그야말로 독박 벌초가 돼버렸다. 할머니 산소는 의외로 단정하였다. 주위의 묘들이 산발을 하고 있다면, 할머니는 머리카락이 어깨를 살짝 덮을 정도다. 늦가을이라면 오히려 찬바람을 가려주겠다 싶은 아늑함마저 느껴졌다. 그동안 산소를 염려할 아버지가 생각날 적마다 ‘산소에 와서 잡풀을 뽑았다’라는 언니의 말에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인지 언니에 대한 미안함인지 모를 감정이 목에 걸려 얼얼했다. 언니의 등에 업혀서 산담에 올라앉은 어머니가 주위를 살피신다. 중문 오일시장으로 가는 외길과 아득히 내다보이는 바다, 나무에 달린 풋귤들이 기억을 되살린 것일까? 어쩐지 낯익어 보이는 비석을 가만히 살펴보더니, 돌 틈을 비집고 올라온 고사리를 뽑기 시작한다. 드디어 상황을 파악하셨나? ‘감히 우리 서러운 시어머니 산소에 줄기를 뻗치다니…'하는 자세로 잡풀들을 있는 힘껏 잡아채신다. 혹시나 넘어지면 어쩌나 싶어서 호미를 들고 선 내가 안절부절못하니, 언니
올여름은 박완서 선생님의 수필집, ‘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를 읽을 수 있어서 행복했다. 오랜만에 참 좋은 사람을 만난 느낌이, 무더위에 그늘 짙은 나무에 앉은 듯 서늘하였다. 35편의 수필 중에서 ‘사랑을 무게로 안 느끼게’라는 글에 연두색 포스트잇이 붙어 있다. 글이 좋아서 읽고 또 읽어보고도 여운이 남아서, 아마도 그 마음을 표시해 놓은 게다. 「평범하게 키우고 있다. 공개해서 남에게 도움이 될 만한 애 기르기의 비결 같은 것도 전연 아는 바 없다. 그저 따뜻이 먹이고 입히고, 밤늦도록 과중한 숙제와 씨름하고 있는 것을 보면, 숙제를 좀 덜 해 가고 대신 선생님께 매를 맞는 게 어떻겠느냐고 심히 비교육적이고 주책없는 권고를 하기도 한다...... “내가 너를 어떻게 키운 자식인데 장가들자마자 네 계집만 알아, 이 불효막심한 놈아.” 이런 큰소리를 안 쳐도 억울하지 않을 만큼, 꼭 그만큼만 아이들을 위하고 사랑하리라는 게 내가 지키고자 하는 절도다. 부모의 보살핌이나 사랑이 결코 무게로 그들에게 느껴지지 않기를. 집이, 부모의 슬하가, 세상에서 가장 편하고 마음 놓이는 곳이기를 바랄 뿐이다. 아이들은 예쁘다. 특히 내 아이들은, 아이들에게 과도한 욕심을
이 글은 아버지에 대해 한 번만 더 써달라는 독자의 요청으로 쓰였다. 20년도 더 지나 누렇게 바랜 봉투 속으로 들어가 있던 편지들을 다시 꺼내 읽어보며, 새삼 아버지를 다시 만나게 해 준 진심이 감사했다. 이 삼복더위에 가슴속으로 솔바람이 스며드니, 사랑도 여름에는 화끈한 정열보다 은근한 보챔으로 다가오나 싶다. ‘이 세상에서 섬길 어른이 없어졌다는 건 이승에서 가장 처량해진 나이이다. 만추(晩秋)처럼. 돌아갈 고향이 없는 쓸쓸함, 내 정수리를 지그시 눌러줄 웃어른이 없다는 허전함 때문이었을까. 예년에는 한 번 가던 추석 성묘를 올해는 두 번 다녀왔다(박완서, 내 식의 귀향).’ 박완서 선생님의 에세이를 발견하게 된 건, 불볕더위에 짓눌려서 피신을 간 서점에서 주어든 행운이었다. 우선은 수려한 산이 있고 그 앞에 냇물이 흐르는데 일가족이 그곳으로 피서를 가는 표지가 눈길을 잡아끈 덕분이었다. 그리고 무작정 펼쳐 든 페이지에서 ‘섬길 어른이 없어졌다’라는 구절이 강하게 가슴을 두드렸기 때문이다. 102세 어머니가 잠깐 잠이 든 새 살짝이 도망쳐 나온 나를 두고 하는 경고가 아닌가. 그런데 ‘소박하고, 진실하고, 단순해서 아름다운 것들’을 사랑한 작가로 소개된
2008년도 9월에 나는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라는 책을 썼다. 첫 장은 ‘지상에서의 마지막 인사’로 시작된다. 여기에 잠깐 그 도입부를 옮겨본다. ‘어쩌면 이게 아버지와의 마지막 인사인지 모르겠다’는 불안감을 떨치면서, 나는 공항의 출국장을 향해 아버지의 휠체어를 천천히 밀고 있었다. 그 뒤를 따라서 넷째, 다섯째 언니가 무거운 표정으로 걸었다. 아들딸이 미국에 있어서 부모님을 자주 뵙는 큰언니는 다소 여유 있는 얼굴이었다. 그리로 막내딸이 옆에서 조심스레 어머니를 부축하고 있었다. 어머니는 이번에도 미국으로 가기가 싫으신지 발걸음을 몹시도 느리게 옮기신다. 아버지를 에워싸고 있는 식구들을 둘러보면서 나는 왠지 아버지의 손을 꼭 잡아보고 싶다는 생각을 속으로 삼켰다. 나만의 아버지가 아니시지 않은가... 드디어 휠체어가 출국장 입구에 도착했고, 모두가 멈춰서서 작별의 인사를 건넬 참이었다. 바로 그때 아버지께서 천천히 휠체어를 돌려 우리들을 향하셨다. 그리고는 “잘 있어라”는 말과 함께 가까이에 서 있는 내게 가만히 손을 내미시는 것이었다. ‘아, 아버지! 이제 당신은 등 뒤에서 고개를 숙이고 걷는 딸의 마음까지도 다 헤아려 보실 수가 있으시군요...’
요즘 들어 어머니와 벌이는 전쟁 중 가장 치열한 전투는 옷 입기와 벗기기다. 입고 또 입고 다시 껴입는 어머니를 상대로 벗기고 또 벗기는 나는 결국 두 손을 들고 만다. 완전한 항복이다. 오로지 안방에 앉아서 입기에만 집중할 수 있는 어머니의 수비 작전에 비해 나는 이방, 저방, 부엌, 마당, 개집, 쓰레기통 등 공격해야 할 대상들이 산재하다. 오늘 아침도 어머니는 웃옷 5벌, 아래옷 4벌을 입으시고, 땀을 뻘뻘 흘리면서 콩 고르기를 하신다. 하기야 요즘 같은 날씨에 깨·조·고구마 밭에 앉아서 숨이 턱턱 막히도록 헐떡거리면서 김을 매던 일과 비교하면, 선풍기 두 대가 마주 서서 바람을 일으키는 거실에서 하는 소일거리란, 아이들의 소꿉장난에 진배없으리라. 아, 새벽같이 밭으로 나가서 불볕더위에 불한당처럼 뒤덮은 잡초들을 뽑다 보면, 온몸이 땀에 절어서 체열과 지열이 합쳐질 즈음 재열(매미)이 목청을 다해 위험을 경고하던 그때가 생각난다. ‘매앰 매앰 매앰, 지금 당장 땡볕과의 싸움을 중단하고, 어서 이 나무 그늘로 피신하시오. 그러다가 숨이 막혀서 쓰러지거나 죽을 수도 있음을 경고합니다. 맴 맴 맴'라고 급하게 울어대던 그 소리가 얼마나 고맙고 시원하던지...
‘세상이 좁다’는 건 매스컴의 세계에 더 적합한 말이 아닐까. 적어도 이 글을 게재해 온 <제이누리>에 관한 한은, 그렇지 않을까 싶다. 그동안 어머니의 백세 일기를 여기에다 기록해 온 건, 순전히 어머니를 요양보호하면서 함께 버텨내는 삶이 버거운 탓이었다. 기실은, 어머니가 요양원의 주간보호(아침 9시~오후 5시)에 다니는 동안 몇 차례의 긴급 호출이 있었다. 내용은 ‘아무래도 병원에 모시고 가는 게 좋을 것 같다’는 것인데, 정황은 돌봄에 대한 애로와 곤란의 우회적 표현이었다. 주간보호는 활동력과 인지력이 단체 생활에 가능한 정도라서 사회복지사 한 사람이 여러 어르신을 돌볼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어머니처럼 손이 많이 가는 경우는 요양원에 입소해서 생활 전반을 전적으로 기관에 의존하는 게 적절하다. 다만 비용도 많이 요구되고, 집을 떠나야 하는 문제가 걸림돌이다. 더욱이 어머니는 ‘요양원에 보내지 않기’를 약속하고 한국으로 모셔 왔다. 보통 미국에서는 노인이 아프다 해서 병원으로 갔는데, ‘요양원으로 옮겼다’는 소식이 들려오면, 얼마 없어 장례식장의 부고장이 날아든다. 바로 이 ‘병원-요양원-장례식장’의 루트가 어머니에게는 가장 견디기 힘든
제주방언으로 쓰신 김종두 선생님의 시집, ‘사는 게 뭣 산디’는 ‘제주여인’으로 시작된다. 그리고 무려 12편의 ‘제주여인’은 4.3을 겪은 어머니가 화자(말하는 이)가 되어 그 시절의 삶을 조곤조곤 들려준다. 그 중에서 ‘제주여인 10’은 자식들이 살아갈 4.3 이후를 이야기한다; 4.3 그 시절, 제주 사름이민 고슴 안 아픈 사름 어디 이서시냐. 동드레 가민 동엣 사름 혼맺힌 사연, 서펜드레 가민 서촌 사름 피맺힌 사연. 이제 왕 아명 도시려 봐도(이제 와서 아무리 얘기해 보아도), 어느 누게가 그 한을 씻어주코. 이 할망 고만히 살당 가크메, 호다 느네 도투지 말앙 살라. 나 죽엉 골총되어 불민 그 뿐. 이제 혼 두 해 더 지나믄 그런 일도 이서싱가 홀꺼여. 오죽하면 4.3으로 한이 맺힌 할머니가 ‘이제 4.3을 두고 더 이상 다투지 말라’고 하실까. 4.3은 이제 화해와 상생의 역사를 쓰고 있다. 2000년 1월에 공포된 ‘제주4.3사건 진상규명과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그 기초다. 이어서 8월 28일에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위원회’가 설치되어 정부 차원의 진상조사를 실시하였다. 조사결과 2003년 10월 정부의 제주4
왠일일까? 요즘들어 어머니께서 자꾸 고향 이야기를 하신다. “닌 대포 소문 들어지느냐? 강 방 오라게(가서 보고 오거라). 할망·할으방을 누게가 책임지느니? 할망·할으방은 하근디(여기저기) 아팡, 날 소뭇(자못) 기다렴실 건디...나가 이추룩 아팡 못 가는 줄도 모르고.... 강, 죽이나 쒕 드려동 오민 조키여만은....” 그래도 내가 선뜻 대답을 하지 않자, 갑자기 아버지가 생각나신 듯, 얼굴이 해맑아지신다. ‘허태행씨가 여자 곹으민 할망·할으방 죽 쒕 드리민 될건디....’ 아버지가 마치 대포마을에 살고 계시기나 한 듯이 아쉬운 눈치다. ‘강, 발 막앙 눠시민 조키여....’라고 혼잣말을 하시는 걸 보니, 정말 그렇게 생각을 하시나 보다. 문득 가슴 저 밑에서 뭉클하고 뜨거운 것이 솟구쳐 오른다. 얼마나 외로우시면..., 얼마나 그리우시면..... 아버지는 22년 전, 미국에서 돌아가셨다. ‘아이들을 돌봐주시면 공부를 더 해보겠다’는 아들을 위해 선뜻 이민을 떠나신 아버지는, 미국 시민으로 17년을 사시다 그곳에 묻히셨다. 아버지의 관을 땅 속으로 깊숙하게 내려서 흙으로 덮는 것을 보시고 엎드러지며 따라서 묻히려던 어머니는, 지금도 ‘아버지를 골충에 버렸
오늘 따라 햇볕이 따사롭게 창가를 두드리며, 어머니의 시선을 끌어당긴다. 정월 바람이 무색하도록 노랗게 피어난 배추꽃도 어머니의 마음을 포근하게 어루만진다. 마당을 비추다가 어머니의 품을 파고드는 햇볕이, 산산이 부서지며 어머니의 얼굴을 쓰다듬는다. 햇볕과 바람의 재롱에 마음이 녹아든 어머니가 당신의 18번 고백을 노래하듯 털어놓는다. “우리집은 남향이난 이추룩 또똣헌 게 이(이렇게 따뜻하구나)! 경 허난 니네 아방이 집은 남쪽으로 들어앉아사 헌댄 고라신고라(그러니까 너희 아버지가 집은 남쪽으로 자리해야 한다고 말했나 보다). 오늘은 해가 들어왕 굴묵을 때주난(들어와서 난방을 해주니까), 아방이 왕 보민 잘도 좋아허키여만은(아버지가 와서 보면 무척이나 좋아하겠다만은)... 경헌디(그런데), 허태행씨는 어디로 가신고? 난, 니영 살아도 영 궁금헌디(너랑 살아도 이렇게 재미없고 외로운데), 니네 아방도 나추룩 잘 살암신가, 이?" 요즘들어 20여년 전 돌아가신 아버지를 들먹이며, 궁금증과 외로움을 드러내시는 어머니가, 한편으론 걱정스럽고, 다른 한편으론 안쓰럽다. 올해 102세가 되신 어머니가 새삼스레 아버지의 안부를 묻고 궁금증을 드러내시니, 무어라 대답할 말
한 해를 무탈하게 보내게 됨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2023년을 보내는 12월의 끝 무렵, 그 마지막 주는 참으로 힘이 들었습니다. 아마 해가 서산으로 기울어 가는 저녁 무렵이었던 듯 합니다. 어머니가 동녘방에 가시더니 무언가를 가슴에 소중히 품고 오셨습니다. 어느날 마치 골목에서 정신 없이 놀던 아이들이, “춘자야, 저녁 먹으라”고 부르는 목소리에, 저마다 집을 향해 신바람나게 달려갈 때의 상기된 얼굴을 닮았습니다. “정옥아, 내일은 이 옷 입곡 손 심엉(잡고) 교회에 곹이 가게 이!”라는 어머니의 표정이 사뭇 진지합니다. 두 손으로 소중하게 받쳐서 내 눈 앞에 펼쳐진 건, 아, 빛이 바랜 저고리였습니다. 하얀 색이 세월의 무게에 짓눌려서 누렇게 퇴색된 것일까요. 어머니의 화안한 미소와 달리 시무룩한 표정으로 나를 응시하는 그것은, 자기의 정체를 숨기고 싶은 저승옷이었습니다. 어머니가 이 세상을 떠날 때 입고 가신다며, 아마 70대 초반에 마련해 놓으셨을 겁니다. 그러고 보니 30년 세월을 장롱 깊숙한 곳에서 숨을 죽이며 지내느라, 저 옷도 속이 많이 저렸던가 봅니다. 글쎄요. 요즘은 장례업자가 관이고 수의고 일체를 세트로 계약해서 장례를 치른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