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여름이면 전국의 경제인들이 제주로 모여들어서 피서와 공부를 즐긴다.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는 광고 카피처럼, 제주는 부부동반 기업인들이 육지를 떠나서 해외에서처럼 여름휴가를 보내기에 안성맞춤인 곳이다. 세계에서 가장 열심히 일해 온 사람들이니 그냥 ‘놀멍, 쉬멍’ 지내도 좋으련만, 부득불 놀기 전에 공부를 하는 것이 여름철 제주에선 기업인들의 휴가문화가 되었다. 어쨌든 제주에서는 전국경제인연합회, 대한상공회의소, 한국능률협회, 중소기업중앙회, 표준협회, 인간개발연구원 등 한국을 대표하는 경제단체들이 하나같이 공부를 한 후에야 어깨를 펴고서 레저 활동으로 들어가는 게 관행이다. 이들의 스케줄은 대부분 아침 7시 조찬부터 점심때까지 세미나와 특강 형식의 공부를 하고 오후에는 산과 바다로 레저나 문화 행사를 떠나는 것이다. 전경련도 예외는 아니어서, 2010년 7월 31일에는 문화탐방을 떠나기 전, 나에게 제주문화에 대한 강의를 요청해 왔다. 이들과 3년 정도 포럼을 함께 하면서 사회를 맡아 진행하는 동안 틈틈이 제주도 이야기를 맛보인 때문이었다. 제목을 ‘제주해녀의 삶과 사랑’으로
내가 몸담고 있는 서울과학종합대학원대학교(aSSIST)는 석·박사과정을 중심으로 기업경영을 가르치는 비즈니스스쿨이다. 핀란드에 있는 알토대학(전 헬싱키경제대학)의 MBA(경영학석사과정) 과정을 운영하면서 대학원 대학교로 발전한 학교다. 이 과정에서 생겨난 독특한 학풍이 윤리경영과 집단지성이다. 월요일 아침 7시에 열리는 세미나는 SIE(Seminar for Intellectual Exchange)라 불려진다. 각자의 지식이나 경험, 생각과 아이디어를 공유하기 위한 자리여서다. 교수와 직원들이 서로 돌아가면서 특정한 주제를 가장 자기답게 발표하는 시간이다. 2009년 12월 21일은 내 차례였다. 서울 사람들에게 가장 독특하게 소개할 수 있는 나만의 지식은 무엇일까? 곰곰이 생각해보니, 서울로 가기 전, 내가 가장 새롭게 경험한 것이 한수풀해녀학교의 해녀수업이었다. 김종두 시인의 ‘제주여인 1’로 시작된 세미나는 서울사람들에게 매우 이색적으로 비쳐지는 눈치였다. ‘시집 왕 보난 돌랭이 호나, 살아갈 일 생각호난 귀눈이 왁왁 호여도, 우리 할망 살아온 시상 고슴에 새기명 살았수게. 조냥 호여사 밥먹은다 호다 멩심호영
▲ 허정옥 교수가 물질을 마치고 테왁을 들고 바다에서 나오고있다. 4개월의 인턴십 기간 동안 소라는 물론 전복, 오분작, 문어, 보말 등 해녀들이 잡는 물건들을 거의 다 섭렵해 보았다. 전복은 비교적 평평한 바위의 옆면에 돌처럼 붙어 있다. 넓적하게 생긴 발로 밤이면 날아다닐 정도로 재빠르게 움직여 다닌다. 그래서 해녀들은 전복을 발견하면 단숨에 떼어내려다 물숨을 먹기도 한다. 전복 물질 중에 사고사가 많은 것은, 그만큼 전복이 귀한 때문이기도 하다. 소라가 드넓게 퍼져서 바다를 지키는 병정들이라면, 전복은 아마도 그들의 장군이랄 수 있을 게다. 오분작들은 마치 자기들끼리 동네를 이루듯이 일정 지역에 옹기종기 모여서 살아간다. 어떤 지역의 크고 작은 돌들을 들춰보면 그 밑에 오분작이 문패처럼 붙어 있다. 오분작 마을, 그들의 바당인 셈이다. 문어도 유달리 많이 보이는 바다의 지경이 따로 있다. 녀석은 8개의 팔다리를 마음대로 휘저으면서 바다의 경계를 제멋대로 넘나든다. 하지만 많이 잡히는 바다가 특별히 있고 보면, 문어들도 동네를 형성해서 살아가는 게 분명하다. 보말은 썰물 때는 바위 밑에 들어가서 단단히 숨어 있다가, 밀물이 되면 일제히 나와서 행진하듯
▲ 물질을 하고있는 허정옥 교수. 멘토는 인턴의 잠수기량을 높이기 위해 3∼4m의 양식장을 벗어나 더 깊은 바다로 나갔다. 미리 길이를 재서 태왁에 매놓은 닻줄을 끌러서 끝에다 돌멩이를 매달았다. 그리고는 이쯤이다 싶은 곳에다 닻줄을 내렸다. 5m쯤 길이를 재고서는, “정옥아, 여기 들어가지크냐?”라고 내 의사를 확인했다. “예게. 이정도사 못들어감니까!”라는 대답과 동시에 나는 힘차게 두발을 뻗으며 수직 낙하해 들어갔다. 5∼6m 정도는 하군이 작업하는 바다의 깊이다. 그렇게 7m, 8m 식으로 훈련의 깊이를 더해가는 동안 멘토는 결코 ‘들어가라’는 명령어를 쓰지 않았다. 일단 할 수 있는지를 묻고, 표정을 살폈다. 8m를 넘어서자 수압이 머리를 짓눌러서 수경을 쓴 자국에 통증이 느껴졌다. 그래도 바닥을 더듬으면서 소라 한 두어 개는 주워 올릴 수가 있었다. 그런데, 10m에 이르자 수압으로 머리가 납작하게 짓눌리는 느낌이 들었다. 귀속이 찌르듯이 아파왔다. 얼굴이 얼얼하고 심장이 답답하게 조여들었다. 바닥에 이르자 벌써 호흡이 가빠왔다. 그래도 문둥구제기 하나는 찾아봐야지 않
▲ 허정옥 교수가 물질을 마치고 바위 위에 앉아 있다. [사진작가 강길순 촬영] 모처럼 날씨가 맑았다. 하늘도 청명했다. 선생님과 함께 바다로 나가, 모처럼 편안하게 작업을 할 수 있었다. 특히 선생님께서 ‘오늘은 전복 서식처를 제대로 학습하고, 전복을 스스로 찾아보라’고 하셨다. 세심하게 눈을 크게 떠서 전복을 발견하리라 작정하고 살피고 또 살펴보니, 드디어 내 눈에도 전복이 들어왔다. 녀석은 정말로 잘생긴 돌 옆에 점잖게 붙어 있었다. 참 근사하다! 역시 전복은 바다의 여왕이다. 먹음직하고 보암직한 게 얼마든지 값을 쳐주게 생겼다. 그런데, 이 녀석은 머리도 좋은가 보다. 우리가 자꾸 살피자 드디어 무수한 더듬이 발을 드러내고 도망갈 자세를 취한다. 얼른 달려들어서 비창(전복을 뗄 때 쓰는 칼처럼 생긴 도구)으로 옆구리를 찔러 보았다. 순간, 녀석은 쏜살같이 더듬이를 껍질 속으로 집어넣더니 입을 꾹 다물고서 온 힘을 다해 바위에 찰떡같이 달라붙었다. 철로 된 비창이 아무리 용을 쓰면서 입을 벌리려고 사력을 다해 애써 봐도, 죽을힘으로 버티는 녀석은 요지부동이었다. 무리하게 더 공격하다가는 껍질에 상처가 나서 상품성이 없어지기 십상이
▲ 허정옥 교수가 물질을 마치고 태왁을 들고 바다에서 나오고있다. [사진작가 강길순 촬영] 그러나 멘토는 내게 뇌선을 권하지 않았다. “니랑 뇌선 먹으멍 물질호지 말라. 이녁만씩 다 턱이 있저(각자의 몫, 역할이 있다)”라면서. 본격적인 인턴실습은 주로 보목 포구 내에 있는 어촌계의 소라양식장에서 이뤄졌다. 양식장에는 몇 년째 방류되어 채취가 금지된 소라들이 알차게 자라고 있었다. 파도가 높지 않을 뿐 아니라 만조 시에도 수심이 3∼4미터에 불과해 물질 실습을 하기에 안성맞춤인 장소다. 드디어 태왁을 두둥실 띄워놓고 선생님이 가리키는 바닷속을 향해 힘차게 잠수해 들어갔다. 소라들이 자라기 좋은 바위들 사이로 해초들이 적당하게 우거져 있었다. 소라는 주로 모래보다 돌로 된 곳에 서식한다. 감태와 같은 먹잇감이 붙어 있으면 금상첨화다. 소라가 붙어사는 바위틈과 구멍 속을 이리저리 뒤져서 아이들 주먹만 한 소라를 두어 개 찾아냈다. 껍질에 뾰족뾰족하게 살이 돋아 있는 쌀구제기다. 식감이 부드럽고 맛이 있어서 횟집이나 해녀식당에서 주로 구워 파는 것들이다. 첫 번째 물질치고는 머정이 좋은 편이다 싶어, 선생님 눈앞에다 자랑스레 흔들었다
해녀들과 공동물질을 하려면 어느 곳에 소라가 많은지, 전복은 주로 어디에 있는지를 알아야 한다. 또한 바다 속의 지형을 탐색해서 위험한 곳과 물건이 많은 곳, 작업하기 좋은 곳을 익혀 놓아야 한다. 대체로 바다 속의 지형과 지세는 맞닿아 있는 육지와 비슷하다. 보목동에도 제지기 오름이 있는 곳은 그 앞바다 속에 오름같이 생긴 여(바다 밑에 있는 암반 섬)들이 폭넓게 퍼져 있다. 섬 가까이에는 조류가 세게 흐르는 지대가 있어서 섶섬 근처에서 물질을 할 때는 썰물과 밀물시 급변하는 조류에 주의해야 한다. 조류가 섬 바깥쪽으로 세게 흐를 때는 해안가로 올라가는 물 흐름과 자신의 위치를 가늠하면서 작업을 해야 한다. 몇 년 전에는 이 근처에서 물질하던 할망좀수가 조류에 떠밀려가 하효바다에서 발견된 적이 있다. 파도가 좀 거칠어서 물에 들지 말라고 했는데도 설마 하니 들어갔다가 조류에 휩쓸린 것이다. 재작년에도 소라를 잡던 해녀가 해안가에 시신으로 떠올라서 장례를 치렀다. 아무리 상군해녀라도 언제 어떤 사고로 죽게 될지 모르는 게 바다의 일이다. 바다에서는 소라 하나를 더 잡으려다가 숨이 다 해서 죽기도 한다. 물숨(물속에서의 호흡)을 먹은 것이다. 대체로 물질할
보목바다는 평대보다 비옥한 편이었다. 처음 시집 와서 물에 들었더니 그리 깊지도 않은 바위 주위로 전복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얼마나 신바람 나게 전복을 땄던지, 그 후로는 늘 그곳을 지날 때마다 살펴보는 버릇이 생겼다. 전복은 떼고 나면 그 자리에 흔적이 남는데, 얼마 있다가 다시 가보면 새 전복이 붙어 있곤 했다. 하지만 지금은 ‘죽은 돌이 되어버렸다’며 가리켜 주는 바위는 잿빛을 띄고 있었다. 한 번 내려가서 만져보라는 말에, ‘이때다’하고 얼른 숨비질해 들어갔다. 해녀학교서 배운 물질기량을 선보일 절호의 기회였다. 마치 허물을 뒤집어 쓴 것처럼 울퉁불퉁한 혹을 붙인 바위는 손으로 만지자 푸석거리며 먼지를 날렸다. 생명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는 주위에는 버려진 플라스틱 병들이 나뒹굴어져 있었다. ‘이제는 눈을 씻엉 촞아봐도 전복이 어서(눈을 씻고 찾아봐도 전복이 없다). 한 물찌 넘어도 전복 구경하기가 어렵고. 구제기는 놈만 못해도 전복은 머정이 따라신디(소라는 남만 못해도 전복은 운이 따랐는데)... ’라며 등을 돌리는 멘토의 얼굴에 쓸쓸함이 일었다. 우리의 태왁 옆으로
멘토의 고향인 평대리는 평평하고 널따란 지대를 뜻하는 ‘벵디’에서 유래한 마을이다. 백사장 해안을 끼고 있어서 모래땅에서는 당근을 주로 생산하지만, 700가구의 주민들 중 130명이 해녀일 정도로 물질이 활발한 해촌이다. 아무리 부자라도 물질을 하지 않으면 돈 구경하기가 어려울 정도여서 웬만한 여자아이들은 어려서부터 바다로 나갔다. 딸로 태어났으면 어머니를 도와서 생활비를 버는 게 당연할 때였다. 누가 먼저 모래를 집어오는지, 돌멩이를 많이 주워오는지를 내기하는 게 놀이였다. 10살부터 어머니께서 만들어 준 소중이를 입고 바다에 들기 시작했다. 어머니가 발을 지그시 누르면서 “오래 숨벼보라” 하면, 숨이 끊어질 때까지 물속을 견뎠다. “저 메역 끊엉 와 보라” 하면 얼른 숨비질 해 들어가서 욕심껏 잡아채고 올라왔다. “우리 똘, 잘도 잘 햄저, 이 동네 일등상군 허키여”하는 소리가 얼마나 듣기 좋던지, 더 깊이 들어가서 더 많이 캐내려고 발버둥을 쳤다. 그러다가 숨이 다 끓어질 것 같아서 “후우∼”하고 가슴 터지게 내지른 것이 숨비소리가 되었다
▲ 법환좀녀마을 해녀학교에서 허정옥 교수(우측 두번째)가 소속된 흑조 팀원들과 찍은 사진. <사진작가 강길순 촬영> 알퐁스 도데의 단편 소설, 마지막 수업처럼 오늘은 우리의 마지막 수업일이다. 소설 속에서 프란츠는 여느 때처럼 공부보다 뛰어놀기를 좋아하는 기분으로 학교에 간다. 그런데 교실에는 이상스레 무거운 분위기가 흐르고, 뜻밖에 동네 어른들도 교실에 와 앉아 계신다. 선생님이 ‘우리의 모국어로 공부할 수 있는 수업은 오늘이 마지막’이라는 말에, 프란츠는 마음 깊이 ’자신이 프랑스어를 소홀히 배운 것‘에 대해 후회하고 반성한다. 그러한 아이의 마음을 읽으신 선생님이, "너는 이미 네 마음속으로 너를 반성하고 있구나. 나는 그걸로 만족한단다."라고 오히려 아이를 위로해 주신다. 수업이 끝나는 시간, 저 멀리 교회당 종탑에서 그 시간을 알리는 종이 울리자, 선생님은 더 이상 말을 잊지 못하시고, 칠판에다 글을 쓰기 시작한다 .“Viva La France!(프랑스 만세!)”라고. 우리의 마지막 수업은 시험으로 이루어졌다. 졸업 후 인턴으로 보내기 위한 최소한의 해녀
이상하게도 물질 수업을 할 때마다 간혹 오영수의 소설 ‘갯마을’의 주인공인 해순(海順)이를 떠올리게 된다. 그녀는 어머니를 따라 바닷바람에 그을리고 조개껍질을 만지작거리면서 갯냄새 속에서 자랐다. 어머니는 제주에서 원정물질을 떠나 부산 근처인 기장에서 물질을 하다가 결혼을 해서 해순이를 낳았다. 그런데 어느 날 남편이 바다로 고기잡이를 나갔다가 풍랑을 만나 돌아오지 않자 혼자서 물질로 딸을 키웠다. 그 딸이 열아홉 되던 해에 시집을 보내고 나서, 그녀는 마치 기다리기라도 한 듯이 고향인 제주도로 떠나버린다. 해녀의 인생도 모전여전으로 대물림되는 것일까? 해순이의 남편도 원양어선을 타고 고등어잡이를 나갔다가 그만 풍랑을 만나서 영영 돌아오지 않는다. 스물셋의 청상인 그녀는 재혼을 하게 되고, 산골 마을에서 콩밭을 매다가 바다가 보고 싶어서 산으로 마구 올라간다. 수숫대가 미역발 같고 콩밭이 바다처럼 보이는 해순이를 두고 동네 사람들은 매구혼이 들었다며 수군댄다. 결국 바다귀신을 쫓아내야 제정신이 돌아온다며 무당이 굿을 하는 사이, 그녀는 마을을 빠져나와 갯마을로 달려간다. 때마침 멸치떼가 들어와서 비릿한 갯냄새가 사방으로 퍼져 가는 갯가
오랜만에 좌혜경 박사의 해녀 노래와 무속신앙에 대해 들을 수 있었다. 그녀는 어머니가 해녀도 아니었고, 자신이 해녀를 꿈꾸지도 않았는데, 해녀를 위한 연구에 그의 생애를 바쳐 왔단다. 왜 그랬을까? 그녀가 하는 말을 들어보면, 그것은 순전히 그의 순수성 때문인 듯하다. 해녀 노래를 정리하기 위해 몇 개월씩 해녀할망들의 얘기를 듣고, 제주도 전역을 다니면서 해녀들의 생활상을 관찰하고, 그 문화를 집대성하는 일은, 정말 바보 같은 순수함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다. 다만 그로 하여금 그토록 해녀문화에 빠져들게 만든 그 무엇이 있다면, 국문학을 전공한 그에게 스며드는 해녀들의 노래소리가 아닐까 싶다. 숨비소리로밖에 내지를 수 없는 해녀들의 한, 열 길 물속보다 더 깊은 삶의 애환이 그녀의 심연을 흔들어 놓았음에랴. 해녀들의 노래를 들어보면, 유독 해녀박물관이 있는 구좌와 세화 일대 해녀들의 노래가 더 힘차고 투박하다. 특히 육지로 원정물질을 나가, 낯설고 물 설은 그곳 바다에서 노를 저으면서 목숨을 던져 놓고 잠수하러 가는 마음, 두고 온 가족들에 대한 그리움, 시퍼런 물에 떠 있는 두려움과 고단함, 운명에 대한 체념, 삶에 대한 애환과 아픔, 살아내야만 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