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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100세 일기] 이제는 다 살았다 (6)

김종두 시인께서 돌아가시기 전, 병원에서 전화를 주셨다. 보아하니 내가 보는 당신의 시집이 많이 낡았을 것 같으니, 한 권 보내주고 싶으시다고. 어떻게 아셨을까. ‘사는 게 뭣 산디’라는 제목의 시집이 내 손에서 닳고 닳아 있음을. 하도 많이 인용해 온 ‘제주여인’ 1에서 6까지는 시 속의 글자들에게 미안스러울 정도로 손때가 묻었음을.....

 

지금, 시인께서는 멀리 가셨으나 보내주신 시집은 내 손에 있다. 하루 종일 100세 어머니와 씨루느라 고단하고 쓸쓸해진 나에게, ‘제주여인 1’이 ‘살암시믄 살아진다’라고 속삭인다. 그러고 보니 김시인께서는 이미 사는 게 무엇인지에 대한 답을 내주시고 가셨다.

 

적어도 나에게는 다음의 시에서 보여주는 우리 할망, 우리 어멍, 아〜 제주여인들의 일생이 내 인생의 답으로 다가온다; ‘시집 왕 보난 돌렝이 호나, 살아 갈 일 생각 호난 귀눈이 왁왁호여도, 우리 할망 살아 온 시상, 고슴에 새기멍 살았수게. 조냥호여사 밥 먹은다, 호다 멩심호영, 이실 때 애끼곡 젭저 놨당, 어신 듯 존디멍 살라. 올레 밖까지 좇아 오멍 고라주던 우리 어멍의 혼 시상. 아명호믄 못사느냐, 조롬 붙이지 마랑, 탕근도 졸곡 물질도 호멍 시집 어른 뜻받앙 살암시믄 살아진다. 아- 탐라 할망들의 삶이여, 제주 여인의 삶이여.’

 

어찌 보면, 이 ‘제주여인 1’은 하루 종일 삶과 씨름을 하느라 죽음이 되어버린 우리 어머니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백 년을 살아오는 동안 어느 때인들 가슴 저리지 않은 순간이 있었으랴만, 시집가던 날, 집을 떠나 올레를 걸어 나가던 때만큼이야 두렵고 떨렸으랴.

 

어머니는 다섯 살 때 아버지를 함경환 사건으로 여의었다. 함경환사건은 1928년 정월 초닷새 날에 있었다. 우리 고향인 대포마을, 큰갯물 포구에서 승객 35명을 실은 종선(풍선)이 일본으로 가는 함경환에 손님들을 옮겨 태우던 중 갑자기 폭풍이 몰아쳐서 32명이 참변을 당했다(큰갯마을, p. 241, 2001).

 

이십칠일 오후 네시경 전남 제주도 대포(大浦)에서 조선우선회사의 긔선 함경환(咸鏡丸)을 타고 저 사십여 명의 승객이 종선을 타고 긔선으로 향하야 가든 도중에 돌연히 폭풍이 일어나며 적은 종선은 고만 물결에 부듸치어 업더지고 승객 전부가 그대로 바다 가운데 빠저 일대 혼란을 일으켯는데 그 중 반수가량은 다행히 건저 내엇스나 이십이명은 급한 물결에 밀리어 간곳을 모르게 되엇다더라(동아일보 1928.10.29). [출처:제이누리(www.jnuri.net)]

 

일본에 가서 돈을 벌어다가 막내딸 고무신을 사고, 빚도 갚고, 큰 집을 산다던 아버지는 그렇게 세상을 떠났다. 그 바람에 어린애가 어머니와 함께 남의집살이를 하면서 어린 냥 한 번 못해보고 어른으로 자랐다. 7살부터 물질을 배워서 17살에 육지물질을 떠났다. 바야흐로 10년 만에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 데 없다’는 시조의 주인공이 되었다.

 

어머니가 없는 대포마을은 할머니에게 텅 빈 곳간처럼 허전하였다. 추석명절 즈음에 어머니가 귀향하자 오라방은 서둘러서 시집을 보냈다. 남편감은 대포마을의 일등 청년이었다. 촌사람답지 않게 얼굴이 희고 키가 훤칠했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한없이 좋으면서도 어쩐지 어려웠던 것 같다.

 

백 살 어머니가 이따금 하시는 소리, ‘허태행씨는 나를 버리고 어디로 갔나’하는 독백에 그러한 마음이 담겨 있다. 백세가 된 토박이 제주도 할머니가 어떻게 남편을 “○○씨”라 부를까.

 

나의 아버지 허태행씨는 조부모 밑에서 성장하였다. 가문의 종손이었다. 그러므로 어머니는 시집살이를 조부모 슬하에서 시작했다. 지금도 은근히 으스대며 하시는 당시의 회고담은, “시할머니 시할아버지로부터 한 번도 꾸중을 들은 바가 없다”는 것이다. 둘째 며느리인 창이 어멍은 ‘말이 하다, 느렁탱이여, 간세다리야’ 하는 꾸중과 핀잔을 밥 먹듯이 들었단다. 하지만 당신은 ‘우리 손지 메누리 최고여!’라는 칭찬만 받았다고.

 

그때나 지금이나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관계는 기름이 덜 친해진 미싱처럼 덜커덕거리는 게 일상이었을 것이다. 게다가 창이어멍은 키가 멀대같이 커서 손발이 유난히도 큰데 반해 일은 이상스레 서툴고 느렸다. 집안의 대소사에서도 손은 늘짝거리면서 앉으면 말이 많은 게, 우리들 눈에도 미덥지 않게 비쳤다.

 

반면에 어머니는 아담한 키에 손발이 빠르고 몸이 날렵했다. 어려서부터 어머니와 함께 남의집살이, 남의 일을 거들면서 살았을 터이니, 오죽이나 눈치를 빨리 익혔으랴. 세상에 공짜는 없다고, 우리 어머니 김성춘 여사는 초년의 고생이 시집살이의 밑거름이 되었다. 기실 어머니는 온 동네가 인정하는 대포 최고의 신붓감이었다. 대포마을처럼 농업과 어업이 어우러진 곳에서는 ‘물질도 하

고 밭일도 잘하는 처녀가 최고의 메누리 고슴(며느릿감)’으로 꼽히던 때가 아니던가.

 

하지만, 그처럼 행복한 생활은 그다지 오래 가지 않았다. 아버지가 동네 최초의 예수쟁이가 되면서 할아버지 집에서 쫓겨나고 말았으니.... 어느 날 가문의 친척들을 집결시킨 할아버지는 장손인 아버지를 마당에 꿇어앉히고서 큰소리로 하문했다. “너 태행이, 이 가문의 제사를 지내면서 재산을 물려받고 종손의 자격을 계속할 터이냐, 아니면 그 예수교를 붙들어 안고 당장 이 집에서 쫓겨날 것이냐?”라고. 한참 있다가 입을 연 아버지 입에서는 ‘예수를 버릴 수 없다’는 대답이 떨어졌다.

 

마치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이, 친척들은 하나같이 달려들어서 몽둥이로 때리고 멍석에 말아서 발길질을 하였다. 그 당시는 예수쟁이가 몹쓸 죄인이나 병자처럼 마을에서 따돌림을 당하던 시절이었다. 할아버지가 한 번 더 회유를 하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버지는 그 밤에 종갓집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따라서 어머니도 아버지와 함께 내쳐져서 남의 집 헛간에서 밤을 지새우는 처지가 되었다.

 

다행히 그렇게 시작된 고난은 끝없이 계속되지는 않았다. 아버지가 워낙 힘이 센데다가 술 담배를 끊고서 오직 일에 전념하시니 자기 밭을 병작해달라는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생겨났다. 게다가 어머니는 상군 해녀가 아니신가. 두 분이 밤낮으로 땀 흘려 일을 하는 가운데 2남7녀를 낳아 대가족을 이루었다.

 

집과 밭도 생긴데다가 병작도 늘어서, 그야말로 사정을 모르는 동네 아이들은 우리를 부자로 오인할 정도였다. 그 당시는 밭이 많아서 온 식구가 부지런히 일에 동원되는 집이 부자이던 시절이었다. 언젠가 초등학교만 나와서 육지물질을 다니던 친구가, ‘정옥이, 너희 집은 부자니까’라고 해서 깜짝 놀란 적이 있다. ‘일하기 싫으면 먹지도 말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셨다면서, ‘근면’을 가훈으로 세우신 어머니가, 우리들을 밭으로 몰고 가서 일렬횡대로 줄을 세워 김매기를 시키셨으니.....

 

그러니까 영화구경, 수학여행 등 공부가 없는 학교 행사에는 자발적으로 빠져나와 밭으로 달려가는 게 우리 집의 말없는 규칙이 되었다. 다행히 농번기가 돌아오면 자발적으로 ‘가사조력’의 결석계를 내고서 밭으로 가는 아이들이 제법 많았다. 어떤 아이들은 동생을 업고 와서 교실 바깥을 서성거리기도 하였다. 그 덕분에 학교에서는 농번기 방학을 제도적으로 실시했고, 우리는 어머니들의 타는 가슴에 단비가 되어 밭으로 내달렸다.

 

보리, 유채, 고구마 등이 주요 농작물이던 시절에는 골갱이(호미)로 김을 매거나 호미(낫)로 곡식을 베는 일이 여자들의 몫이었다. 남자들은 밭을 갈거나 밭담을 다거나 소를 먹이는 일을 주로 하였다.

 

어느 가을 날, 고구마를 파던 것으로 기억된다. 증조할머니(왕할망)께서 우리 밭에 오셔서 마치 한 식구인 양 부지런히 골갱이 질을 하시는 거였다. 90이 넘은 꼬부랑 할머니가 말이다. 반가움 반 놀라움 반으로 벌떡 일어나신 어머니가 할머니를 덥석 안고서 “고맙수다”라고 하였다. 어머니 얼굴이 벌겋게 달아서 마치 더위를 먹은 것처럼 보였다. 저만치서 고구마 줄기를 걷으시던 아버지가 한참 동안 할머니를 바라보셨다. 특유의 헛기침을 하시고서 먼 산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얼굴에 햇빛이 비쳐들었다. 눈물이었을까? 모래밭의 사금파리가 햇빛에 반사되듯 아버지의 눈에서 보석 같은 게 반짝거렸다.

 

점심때가 되자 한 자리에 둘러앉아서 밥숟가락을 들었다. 아버지는 언제 사 오셨는지 마른 가지에 불을 붙여서 갈치를 구웠다. “할마님, 점심 잘 드시곡 해영 오늘은 손지영 곹이 집으로 가십서 양!” 고개를 끄덕이는 할머니 입 속에서 앞니 두 개가 삐죽이 웃었다.

 

그날부터 증조할머니는 우리 집 식구가 되었다. 증손녀들과 룸메이트가 되어 비좁은 방에서 있는 듯 없는 듯 사셨다. 체구가 작아서 그런지 밥도 조금, 국도 조금 드셨다. 어머니는 할머니가 애기와 같다고 하셨다. 당신이 시집 왔을 때 할머니가 아껴주셨던 것처럼 지극정성으로 돌보셨다. 식사 때가 되면 어머니 옆이 할머니 자리가 되었다. 이빨이 거의 없는 할머니를 위해 생선가시를 고르고 돼지고기도 잘게 저몄다.

 

왕할머니는 그렇게 우리와 함께 6년을 사시다가 96세에 돌아가셨다. 할머니가 돌아가신다는 소식을 듣고 중문에 사는 큰아들이 구루마를 끌고 왔다. 이불과 함께 싣고 가는 게 장자의 도리인지 권리인지 모를 일이었다. 할머니는 워낙 작아져서 이불 속에 계신 것 같지가 않았다. 어쩌면 한 줌 껍데기를 남겨놓고서 이미 하늘나라로 가셨는지도..... 아버지는 구루마를 외면하고서 먼 산을 바라보셨다. ‘한라산의 얼굴은 우리 집 앞에서 보는 게 최고’라고 하시던 그 자리에 정물처럼 굳어진 채로.

 

고생의 끝은 어디까지일까? 살아가는 것 자체가 고생이라면, 죽어야 끝나는 것인가. 갤럽이 지난 8월에 미 전역의 미국인 3649명을 상대로 삶에 대한 평가를 조사하였다. 응답자에게 자신의 삶을 0~10점 사이의 점수로 나타내도록 했다. 7점 이상이면 번영(thriving), 5~6점이면 고생(struggling), 4점 이하면 고통(suffering)으로 분류했다. 그 결과 ‘고통’이라는 응답자가 5.6%로 나타났다. 미국 전체 인구로 대입하면 1400만 명에 해당하는 미국인들이 "사는 게 고통"이라고 응답해, 고통스럽다고 느끼는 미국인들이 폭증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갤럽이 해당 조사를 수행한 2008년 이후 가장 높은 비율이다. 갤럽도 "고통 지수가 5%를 넘어선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며 "경제 상황이 주요 원인일 가능성이 크다"고 설명했다. 반면에 번영으로 분류되는 응답자는 51.2%였다. 번영하고 있다는 응답은 2008년 11월 금융위기 때와 코로나19 대유행 초기인 2020년 4월 각각 46.4%로 역대 최저치를 기록한 바 있다(CBS 노컷뉴스, 2022-08-23).

 

지난 10월, 제주장수복지연구원이 초청하여 서귀포시 노인들을 대상으로 특강을 해주신 김형석 교수님은 ‘사랑이 있는 고생이 기쁨이었다’고 하셨다. 고생 중에도 사랑이 담기면 기쁨이 되고 행복한 삶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 보면 우리 어머니도 “고생은 많았으나 사랑이 있어서 행복했다”고 할 수 있으리라. 시할머니를 사랑했고, 시어머니를 사랑했고, 9남매를 사랑하며 백년을 살아내셨으니까. 나 또한 그러한 어머니와 함께 살아가는 시간 속에서 가끔은 고단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어머니의 사랑과 나의 사랑이 마주치는 순간순간들이 엮여서, 누군가 ‘어떠냐?’고 물으면, ‘행복하다!’고 답할 것 같다. 육십이 넘도록 어머니와 함께 살 수 있음은, 또한 행운이 아닐까? 돈 보다는 사랑이 고생조차 행복으로 바꾸는 비결임을 가르쳐 준 어머니의 삶에 경의를 표하고 싶다. 그런데, 고생이 없으면 정말 행복할까?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허정옥은?
= 서귀포시 대포동이 고향이다. 대학 진학을 위해 뭍으로 나가 부산대학교 상과대학에서 회계학을 공부하고 경영대학원에서 석사과정을 마친 후 미국 볼티모어시에 있는 University of Baltimore에서 MBA를 취득했다. 주택은행과 동남은행에서 일하면서 부경대학교에서 경영학 박사학위를 이수했고, 서귀포에 탐라대학이 생기면서 귀향, 경영학과에서 마케팅을 가르치면서 서귀포 시민대학장, 평생교육원장, 대학원장을 역임했다. 2006년부터 3년간 제주국제컨벤션센터(ICC JEJU)의 대표이사 사장과 제주컨벤션뷰로(JCVB)의 이사장 직을 수행한데 이어 제주평생교육장학진흥원장을 거쳤다. 현재는 서울과학종합대학원에서 서비스 마케팅과 컨벤션 경영을 가르치고 있다. 한수풀해녀학교와 법환좀녀학교도 다니며 해녀로서의 삶을 꿈꿔보기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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