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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100세 일기] 나는 왜 어머니의 백세일기를 쓰는가?

지난 월요일 아침, 제이누리 발행인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카톡 메시지를 받았다.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으나 이번 주 100세 일기는 현재 조회수 2만여건을 돌파하며 우리 하루 방문자 1만5천명을 만들어내는 등 경이로운 기록을 세우는 중. 이제 열혈 독자들이 생긴 듯^^ 감사합니다”

 

세상에!

 

하루하루 살아가는 게 버거워서, 그냥 버텨내려는 통로 삼아 쓴 글. 그저 일상의 허드레를 보고하듯, 반성 삼아 적어놓은 일기같은 글에, 이토록 뜨거운 ‘격려사’라니... 누가 내 마음을 알랴 싶어서 감정을 꾹꾹 눌러 쓴 혼자만의 중얼거림에, 이렇게 반응해 주시는 뜨거운 마음들이라니....

 

‘울컥’ 하니, 감정이 복받쳐 올라, 소리내어 10초 가량 울었던 듯 하다. 그러고는, 이내 믿어지지 않아서, 제이누리로 들어가 보았다. ‘올 봄에 맞는 어머니의 100세 생신 ... 장수노인의 비결은 무얼까?(6)’라는 헤드라인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그저 ‘장수의 비결 6-긍지’라는 제목으로 글을 보냈는데, 역시 전문가는 달랐다. 이어서, ‘[어머니의 100세 일기] 어머니의 장수비결 10가지 중 한가지 ... 긍지’라는 부제가 뒤따르고 있었다. ‘장사는 아무나 하나’ 싶은 생각이 들어서, 빙그레 웃음이 나왔다. 이번 글의 대박은 순전히 헤드라인의 매력적인 첫인상 덕분인 듯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한 마음에, 일주일 내내 고민을 하다가, 일요일 저녁에 이 글을 쓴다. 말로만 들어본, ‘팬들에게 보내는 감사인사’라고나 할까.

 

우선, 내가 왜 어머니의 백세일기를 쓰게 되었는지부터 돌아보게 된다. 벌써 1년이 지나간다. 제주평생교육장학진흥원장의 임기를 마치고 나서, 요양보호사가 되어 어머니를 전담해서 모셔온 지가.... 진흥원에서 일하던 어느 날 오후, 어머니가 다니는 요양원의 주간보호에서 전화가 왔다. ‘김성춘 어르신의 보호자시죠? 어르신이 아침부터 지금까지 아무것도 드시지 않고, 눈을 감고 계속 주무시기만 합니다. 아무래도 상태가 심상치 않아 보이니, 오셔서 모시고 가는 게 좋겠습니다’라고. 아이쿠나! 이를 어쩌지....

 

부리나케 달려서 요양원으로 가는 길. 5.16 도로는 왜 그리도 혁명적이지 않게 구불거리는지..... 불길하게도, 92세 가을, 어머니가 폐렴으로 임종 통보를 받고서 제주시 종합병원으로 옮겨가던 날이 떠오른다. 담당 과장님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다 했습니다. 아무래도 임종을 준비해야 할 것 같습니다’라고 하시는 어두운 말에, 목사님을 모시고 눈물의 임종예배를 드렸던 일. 예배가 끝났는데도 눈을 감지 않으시고, ‘어떻게 살려달라’는 눈빛으로 나를 간절하게 바라보시던 어머니.

 

“과장님 말씀대로, 이제는 돌아가시라고 예배까지 다 드렸는데, 저렇게 애절한 눈빛으로 차마 눈을 감지 못하시니...., 과장님의 어머니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라고 되묻던 상황. ‘1%의 확률을 안고서, 호흡기 내과가 있는 종합병원으로 가보겠습니다’라고 답해주던 진실의 순간. ‘그러면, 우리 어머니도 그렇게 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라는 애원에, 바로 제주시 병원으로 연락하고 앰블런스를 조치해주던 진심. 그 덕분에 제주시로 가서 3일만에 건강을 회복하고 한라산을 유람하며 서귀포로 돌아오던 기적의 시간.

 

‘그래, 우리 어머니는 이번에도 꼭 위기를 극복하고 씩씩하게 일어나실거야’라는 소망과 달리, 눈을 꾸욱 감으신 채 축 늘어져서, 딸도 알아보지 못하는 어머니. 그래도 병원에 가서 링겔을 맞고 서너 시간 지난 후, 게슴츠레하게 다시 눈을 뜨신, 불굴의 우리 어머니. 그 강한 생명력으로 두어 차례 더 위기를 넘기면서 살아나신 어머니를 놔두고, 새로운 직장을 찾아 서울로 가볼까 망설이던 시간 속.

 

우연히 친구 집에 놀러갔다가, 탁자 위에 펼쳐져 있는 요양보호사 표준 교재와의 만남. 남편이 뇌졸증으로 쓰러진 적이 있는 친구가, 혹시나 남편을 요양보호할 수도 있겠다 싶어서 자격증 공부를 하고 있다는 이야기. 아, 이런 걸 두고 ‘친구 따라 강남 간다’는 거로구나. 그렇게 해서 요양보호사 자격증을 따고, 어머니의 요양보호사가 되어 있는 나.

 

‘99세 어머니가 사시면 얼마나 사시겠나...’ 하는 마음으로 어머니의 전속 요양보호사가 된 지도 어느새 훌쩍 1년을 넘겼다. 올 봄에 만 백 세를 넘기셨으니, 가을이 되어 10월 2일, 노인의 날이 되면, 어머니에게도 ‘장수노인에게 보내주는 대통령의 하사품’-청려장(지팡이)이 소포로 내려올까?

 

그렇게만 되면, 더 바랄 나위 없이 기쁘고, 감사하고, 행복하겠다. 공활한 가을하늘에다 ‘우리나라, 좋은 나라’라고 목청껏 외칠 것 같은 흥분이, 벌써부터 설레임으로 가슴을 뛰게 한다. 부디 그때까지 ‘어머니가 무사히 살아계시기를... 그 청려장을 짚고서 집 앞 바닷길, 10월의 아름다운 바다를 ‘호오이, 호이!’ 하는 숨비소리로 마음껏 호흡하시고 나서, 고요하게 열리는 하늘 길로 천천히 여행을 떠나시면....,

 

아, 그때는 울지 말고, ‘한평생 잘 사셨으니, 편안히 가시라’, ‘수고하셨다, 고맙고 감사하다, 천국에서 다시 만나보자’고 손을 흔들 수 있을 것 같다. 그렇게 어머니와 함께 하도록 허락된 시간 동안, ‘우리 어머니와 함께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시간들을 행복하게 보내야지’ 싶은 게, 나의 꿈이요, 소원이요, 일상이다.

 

그런데, 백 세 어머니를 모시고 살아가는 게 생각과 의지처럼 잘 되어지지 않는다. 아침마다 기저귀를 갈아드리고, 옷을 갈아입히고, 식사를 떠먹여드리는 것은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지금이 몇 시냐, 칠월이냐?’라고 반복적으로 묻는 질문들도 문제가 아니다. 양말을 네 다섯 켤레씩 껴신고, 스웨터 위에 내복을 입거나 코트 위에 스웨터를 끼우는 모양도 괜찮다. 모자를 서너개나 겹겹이 쓰는 일도 병가지상사와 같이 예사로운 일이다. 밥을 일일이 떠먹여드려야 하고, 물이나 우유를 드리면서 ‘삼킵서!’라고 연하곤란(삼킴장애)의 훈련을 반복해야 하는 것도, 이만하면 다행이지 싶다.

 

문제는 치매로 생기는 불편한 행동들이다. 아무데나 코를 풀어서 쓰윽 문대고선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점잖게 앉아 계시는 모습. 금방 식사를 하셨는데도, ‘우리, 밥 먹어져시냐?’고 물으시는 황당함. 음식물을 아무데나 뱉어 놓고, 고구마나 떡 등을 이구석 저구석에 숨겨놓고. 교회나 자동차에서도 끊임없이 웅얼거리는 알 수 없는 치매 증세....

 

하지만, 이 모든 것을 차치하고 가장 큰 문제는 아무데나 침을 뱉는 것이다. 집에서는 늘 휴지를 손에 쥐어드리고, 침뱉는 소리가 나면 달려가서 닦아드리면 된다. 하지만 교회나, 식당, 모임 등과 같은 공공장소에서 소리나게 침을 뱉으면, 사람들이 어머니를 예민하게 주목한다. 몸둘 바를 몰라서 어머니를 타박하고, 눈치가 보여서, 얼른 물휴지로 여기저기를 훔쳐낸다. 점잖게 코트를 입고, 멋있는 모자를 쓰고, 얼굴에 화장을 하더라도, 아무데나 침을 뱉는 지저분함을 가려줄 방책이 없다. 그럴 때 어머니가 받는 시선이, 설사 ‘불결하다’가 아니라, ‘안됐다, 가엾다’일지라도, 어머니의 아픈 가슴 속에, ‘늙으면 죽어야지’ 싶은 감정을 불러일으킬까 봐, 그저 간이 졸아든다.

 

침뱉는 당신의 문제를 알고 그러시는 것일까? 어머니는 휴지만 보면 두루두루 말아서는 주머니가 비틀어지도록 집어넣는다. 스웨터, 바지, 코트를 막론하고, 모든 옷들의 주머니마다 휴지가 가득하다. 만에 하나, 세탁할 때 휴지가 들어 있는 옷이 그대로 들어가면, 모든 빨래에 휴지가루가 퍼진다. 그 허연 가루를 일일이 털어내고 다시 빨아야 하는 고역이라니.... 생각해 보니, 그것도 그다지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가장 슬픈 것은, 기억의 상실이다. 사진틀 안에서 당신과 나란히 앉아 있는 아버지를 보고서, ‘저 사람, 누게니?’라고 물을 때....., “아버지!”라고, “어머니가 그렇게 좋아하시던 아버지도 모르겠냐”고 되물을 수가 없어서...그저 슬프다. “게매양, 누겐고 예? 누게 닮아수과? 어머니영 같이 이시난, 어머니가 더 잘 아실 건디?”라고 되물을 수밖에 없어서, 가슴 한 켠이 시리다. 그리고 아버지를 바라보면, 가슴이 온통 저리고 아프다. 열일곱살 꽃다운 처녀시절에, 이웃에 사는 열여덟살 총각-인물 좋고, 일 잘하고, 성품도 그만인 청년과 혼례를 올리고, 60년을 넘게 같이 살았는데, 누구라니.... 사실, 어머니를 모시고 살아 가면서, 나는 늘 아버지를 생각한다. 이럴 때, 아버지가 보시면 무어라 하실까, 어떻게 생각하실까, 속상하지 않을까 싶은 생각으로 하늘을 바라보다 고개를 떨군다.

 

어머니와 함께 생활하면서, 나는 아버지와 함께 살아간다. 실상, 내게 있어서 어머니는 ‘아버지의 아내’로 자리할 때가 더 애틋하다. 때로는 서럽고, 때로는 아프다. 아버지가 얼마나 사랑한 여인인가. 아버지가 그리워서, 보고 싶어서 눈물이 나올 때도 있다. 그래서, 어쩌면 아버지에게 미안해서, 이 백세 일기를 시작했는지 모르겠다. ‘아버지, 힘을 주세요. 저희를 지켜 주세요. 하늘 저 끝에서 이 땅, 우리집을 바라보아 주세요...’라고 기도하면서. 아버지가 떠나신지 어언 20년이 흘렀다. 그래도, 아버지는 언제나 우리 곁에 계신다. 어머니가 여기에 계시므로....

 

어머니와 아버지는 한 마을에 이웃하여 살았다. 약천사와 주상절리를 동과 서에 두고서, 농사와 어업으로 생계를 이어가는 대포마을이, 우리들의 고향이다. 아버지는 조부모 밑에서 자랐다. 아버지가 조강지처인 어머니를 버리고, 다른 살림을 차려서 중문으로 떠나버렸기 때문이다. 그 후로, 아버지는 할아버지의 장손이지만, 족보의 위상에 걸맞는 돌봄을 받지 못하였다. 친구들과 바다에 놀러갔다가 귀에 물이 들어가서, 썪어 문드러져 피고름이 흐르고, 구더기가 생겨서 귀가 막혀버릴 때까지, 아무도 돌봐주지 않았다. 아버지는 평생을 보청기와 더불어 사셨다.

 

나는 예닐곱살 때까지도, 어른들은 잠을 자지 않는 줄 알았다. 아침에 눈을 떠도 부모님이 안 계시고, 저녁에 잠을 잘 때도 부모님을 볼 수가 없었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해가 뜨기 전, 어두룩 할 때 일어나서 밭으로 나가시고, 해가 지고나서 어두컴컴해져야 집으로 들어오셨다. 가장 불편했던 일은, 동네에 제사가 생겨서 우리집에 떡을 갖다주었는데, 공평하게 나눠주실 아버지가 안계셔서, 누구의 손도 닿지 않는 높은 궤짝 위에다 올려놓고, 아버지가 오시기만을 기다리던 시간의 무심함이다. 끝내 기다리지 못하고 졸다가 잠들어서, 아침에야 내 몫의 떡 한 조각을 받아들고, 고개를 갸우뚱하던 마음속 전쟁이라니....

 

아버지를 생각하면, 가장 가슴 아픈 게, 그 외로움과 서러움이다. 아버지는 서른 즈음에 예수를 믿게 되면서 가문에서 쫓겨났다. 혼자 버려져서 실성한 어머니가 대포마을 최초의 신자가 되어, 아들에게 같이 다니자는데, 그 불쌍한 어머니의 부탁을 어떻게 거절할 수 있었으랴. 그렇게 예수쟁이가 되어, 동네에서 외톨이가 된 아버지를 생각하면, 온통 숨이 막혀서 머리가 얼얼하도록 서럽고 슬프다. 아버지는 학교에 가는 갑장(같은 나이 또래)들의 뒷모습을 몰래 바라보면서, 머슴처럼 소를 키우고 밭일을 하였다.

 

그래서 그러셨을까? 내가 기억하는 아버지는 늘 공부를 하셨다. 새벽에는 라디오의 농사정보를 듣고, 신문을 받아보고, 새농민을 열독하였다. 동네 사람들이 농사법을 물으러 왔고, 워낙에 소작농으로 경험이 많으신 아버지는 친절하게 당신의 노하우를 가르쳐주었다. 더욱이 교회의 전도사님이 육지로 가버리면, 아버지가 대신 설교를 하셨다. 특히 수요일 저녁 예배를 그렇게 힘들어 하셨다. 밭에서 돌아오자 마자 땀을 씻기가 바쁘게 교회로 달려가서, ‘준비가 안 된 말씀을 전해야 하는 게 참으로 괴롭다’시던 아버지.... 그리고, 아버지가 짊어진 무거운 짐이 하나 더 있었는데, 바로 동네사람들의 야부의사 역할이었다.

 

아버지는 젊은 시절에 모슬포에서 병원의 조수로 한 3년 정도 일을 한 경험이 있었다. 그러므로 식구들이 감기나 배탈 등으로 아프면 집에서 간단하게 주사를 놓기도 하였다. 그게 알려져서, 동네사람들도 급하게 아프면 아버지를 찾아왔다. 아버지가 쓰는 약과 주사를 사는 일은 내 몫이었다. 서귀포의 시외버스 터미널에 있는 약방에 가서, 아버지가 써주신 메모를 보이면, 그대로 약을 포장해주었다. 그렇게 현금으로 약을 사다가, 동네 사람들로부터는 깨, 생선, 참기름, 꿀, 떡 등의 현물로 받았다. 그래서 생기는 빚은 어머니의 몫이었다. 봄의 보리와 가을의 고구마 외에는 현금이 나올 길이 없는 농촌에서, 어머니가 물질을 하셨다. 해녀는 유일하게 현금을 만질 수 있는 최고의 직업이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그러한 수지타산의 불균형을 문제나 어려움으로 여기지 않으셨다. 다만, 당신이 하는 일이 위법한 일이라, 혹여 의료사고라도 생기면 큰일임을 괴로워하셨다. 어쩌다가 동네에 낯선 사람이 찾아오면, ‘혹시나, 나를 잡으러 오나’ 싶은 두려움이 있으셨다니..... 교통이 좋아지고, 중문에도 약국이 생기면서, 어느덧 야부의사 일을 그만두게 되신 아버지. ‘이제는 두려울 게 없다. 다리 뻗고 자도 되겠다’ 하시던 아버지의 그 화안한 웃음. 꼭 한번만 더 보고싶다.

 

아버지를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따뜻해 온다. 눈이 펄펄 내리는 겨울날, 아버지 등 뒤에서 찬바람을 이리저리 피하면서 산지동산(대포에서 중문으로 올라가는 길의 오르막)을 오르던 일. 아버지는 검은색 황오바(천이 두껍고, 폭이 넓고, 길이가 무릎까지 내려오는 코트)를 입으셨는데, 그 뒤에 숨으면 어떠한 찬바람도 피할 수가 있었다. 아버지는 그렇게 태산처럼 든든하고, 아늑하고, 자랑스러웠다. 그 아버지를 기쁘게 해드리려고, 이불 속에 숨어서 시험공부를 하던 일이 어제 일처럼 새롭다. ‘어서 전깃불 끄고 자라’던 어머니는, 아직도 이곳에 계시는데, 20년 전, 하늘로 가신 아버지는 얼마나 우리가 보고싶으실까.

 

그 아버지를 생각하면서, 어머니와 함께 살아간다. 어머니가 이곳에 계시니, 아버지도 늘 우리를 바라보시며 지켜주실 것 같다. 나에게 아버지는 목사님, 의사 선생님, 새마을 지도자에 다름 아니었다. 우리 마을에서 가장 자랑스러운 어른이셨다.

 

어머니는 10명을 낳아서, 2남 7녀를 키우셨다. 일도 남보다 두 배는 더 하셨고, 목숨 건 물질도 ‘이 무슨 횡재인가’ 싶은 감사함으로 해내셨다. 이제는 조금만 걸어도 숨이 차고, 식사를 좀 더 하셔도 호흡이 불편하시다. ‘이제는 다 살았다’는 어머니의 한숨을 붙들고서,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를 한다. ‘올 가을, 청려장을 짚고서 섶섬앞을 거닐 수 있도록, 이 연약한 숨결을 붙들어 주소서’라고. 백세를 넘어서면, 하루를 살아가는 게, 바람앞의 등불처럼 훅 하면 꺼져버릴 것 같은 풍전등화(風前燈火)의 운명과 같다.

 

그래도 자연보다 위대한 건, 사람의 목숨이다. 백 세를 넘어서도 다시 신부처럼 웃을 수 있는 어머니처럼. 역시나,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

 

1923년 3월 22일 생, 백세를 넘어선 김성춘 어머니에게 보내주시는 독자들의 뜨거운 응원에, 머리 숙여 인사를 드린다. 고맙고 감사합니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허정옥은?
= 서귀포시 대포동이 고향이다. 대학 진학을 위해 뭍으로 나가 부산대학교 상과대학에서 회계학을 공부하고 경영대학원에서 석사과정을 마친 후 미국 볼티모어시에 있는 University of Baltimore에서 MBA를 취득했다. 주택은행과 동남은행에서 일하면서 부경대학교에서 경영학 박사학위를 이수했고, 서귀포에 탐라대학이 생기면서 귀향, 경영학과에서 마케팅을 가르치면서 서귀포 시민대학장, 평생교육원장, 대학원장을 역임했다. 2006년부터 3년간 제주국제컨벤션센터(ICC JEJU)의 대표이사 사장과 제주컨벤션뷰로(JCVB)의 이사장 직을 수행한데 이어 제주평생교육장학진흥원장을 거쳤다. 현재는 서울과학종합대학원에서 서비스 마케팅과 컨벤션 경영을 가르치고 있다. 한수풀해녀학교와 법환좀녀학교도 다니며 해녀로서의 삶을 꿈꿔보기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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