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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100세 일기] 102세 어머니, 오늘도 “이 어멍, 오늘은 미신 일 허코 이?"

이 글은 아버지에 대해 한 번만 더 써달라는 독자의 요청으로 쓰였다. 20년도 더 지나 누렇게 바랜 봉투 속으로 들어가 있던 편지들을 다시 꺼내 읽어보며, 새삼 아버지를 다시 만나게 해 준 진심이 감사했다. 이 삼복더위에 가슴속으로 솔바람이 스며드니, 사랑도 여름에는 화끈한 정열보다 은근한 보챔으로 다가오나 싶다.

 

‘이 세상에서 섬길 어른이 없어졌다는 건 이승에서 가장 처량해진 나이이다. 만추(晩秋)처럼. 돌아갈 고향이 없는 쓸쓸함, 내 정수리를 지그시 눌러줄 웃어른이 없다는 허전함 때문이었을까. 예년에는 한 번 가던 추석 성묘를 올해는 두 번 다녀왔다(박완서, 내 식의 귀향).’

 

박완서 선생님의 에세이를 발견하게 된 건, 불볕더위에 짓눌려서 피신을 간 서점에서 주어든 행운이었다. 우선은 수려한 산이 있고 그 앞에 냇물이 흐르는데 일가족이 그곳으로 피서를 가는 표지가 눈길을 잡아끈 덕분이었다. 그리고 무작정 펼쳐 든 페이지에서 ‘섬길 어른이 없어졌다’라는 구절이 강하게 가슴을 두드렸기 때문이다. 102세 어머니가 잠깐 잠이 든 새 살짝이 도망쳐 나온 나를 두고 하는 경고가 아닌가.

 

그런데 ‘소박하고, 진실하고, 단순해서 아름다운 것들’을 사랑한 작가로 소개된 첫 장에서 작가는 파안대소(破顔大笑)를 날리며 더 바랄 것 없이 행복한 삶의 순간을 드러내고 있다. 궁금했다. 다음은 책 제목이 ‘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인데, 서문이나 목차에서 그 주제를 찾아볼 수가 없었다. 책의 이곳저곳을 아무리 뒤적여보아도 마치 모래 속에 파묻힌 사금파리가 햇빛을 받아서 반짝이지만, 정작은 그 실체를 붙잡을 수 없는 것처럼 행방이 묘연하였다. 어디에 숨어 있을까. 한참을 찾아보는 사이에 목차의 마지막 주제인 ‘이왕이면 해피엔드’가 시선을 끌었다. 그리고 ‘그때가 가을이었으면’이라는 마지막 주제가 마음을 설레게 했다. 비록 그것이 ‘가을과 함께 곱게 쇠진하고 싶다’라는 종말에 대한 소망이지만, ‘아, 가을이 어서 왔으면 좋겠다’ 싶은 마음이 되어, 어느새 책을 들고 나풀나풀 계산대로 향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면 나에게 보살필 어머니가 있다는 건 아직은 처량함, 쓸쓸함, 허전함이 덜하다는 얘기다. 내 나이 65세, UN이 정한 노인이 됐음에도 불구하고 어머니가 살아계심은, ‘아직 너는 노인이기를 유예한다’라는 예외적 특권으로 선물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순전히 어머니 덕분이다.

 

그렇다. 사실 내 나이 또래 중에는 어머니가 안 계신 이들도 더러 있다. 고명딸이거나 외동딸도 예외가 없다. 나처럼 2남 7녀 중 7번째가 102세 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경우는 흔치 않을 거다. 게다가 어머니는 얼마나 정정하신가. 오늘 같은 복더위에도 세 끼 식사를 너끈히 드시고 간식까지 찾으신다. 가만히 앉아 있지를 못하시고 부엌에 갔다, 안방에 갔다, 거실에 누웠다가, 다시 벌떡 일어나 마당을 살펴보시는 게 너무도 활동적이다. 이를 두고 요양보호사 표준교재에서는 ‘치매 노인의 배회 현상’이라고 하지만 말이다.

 

현재 전국 대부분 지역에서는 최고 체감온도가 35도를 넘나드는 불볕더위가 계속되고 있다. 제주도라고 예외는 아니다. 기상청은 최소한 이달 19일까지 이런 불볕더위가 이어질 것으로 내다본다. 8월의 반환점인 광복절을 전후로 더위가 꺾이던 예년 여름 날씨와는 판이한 양상이다. 사상 최장 일수를 향해 가고 있는 열대야도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따라서 기상청은 폭염기 안전에 유의할 것을 거듭 당부하는 중이다. 야외 활동을 자제하고 식중독과 탈수에 주의해야 한다. 특히 영유아, 노약자, 만성질환자는 수시로 건강 상태를 확인해야 한다. 산업현장에선 시원하고 깨끗한 물을 충분히 섭취하고 보랭장구를 착용해 체온을 낮춰야 한다. 농촌에선 고령층의 나홀로 작업을 제지하고 농작물이 햇볕 때문에 피해를 입지 않도록 관리해야 한다. 축산농가는 가축이 더위에 집단 폐사하는 일이 없도록 송풍기와 분무장치를 적극 가동해 축사 온도를 조절할 필요가 있다(끝날 줄 모르는 '체감 35도' 폭염... 최소 열흘 더 이어진다. 한국일보, 2024. 8. 9. 15:30)

 

그런데 우리 어머니의 저 기운과 기력은 어디에 연유한 것일까. 다음은 아버지의 편지 중 일부이다.

 

‘정옥 앞

보내준 편지와 결혼 기념사진은 잘 받아 보았다. 지난주 LA 폭동 사건으로 전 세계가 떠들썩하게 돼서 고향에서도 모두 염려가 되어 정복이랑 정심이 정례까지 직접 전화해 주어서 반갑게 받아 보았다(아버지는 줄줄이 이어져 나오는 딸들의 이름을 손수 지으셨는데 '정열·정복·정희·정숙·정심·정옥·정례'라고 뒤로 밀렸다고 결코 그 이름이 사소해지지 않도록 같은 옥편에서 한결같은 정성으로 심사숙고하셨다). 우리는 이번 한국 갔다 오니까 모두 회사에서 해고당해서 지금까지 놀고 있다. 논다고 못 살 바는 아니지만, 어머니는 궁금해서 말이 아니다. 나도 마찬가지이지만, 그러나 별 수가 없구나. 주정부에서 1인당 316.50불하고 그 전에 타던 거(203불 모아둔 것)면 먹고사는 데는 별일 없겠지만, 시간 보내는 게 지루해서 문제다. 허나 저번 네 결혼식 때와 용익이 결혼식 때를 회상하면, 그저 하나님께 감사한 것뿐이다. 매일 비가 오다가 그날만은 아침부터 오후까지 좋았다가 예식이 끝난 후에 다시 비가 오니, 하늘을 우러러 ‘하나님 감사합니다’라는 소리가 절로 나오더구나. 앞으로 너희들도 하나님께서 지켜주시고 축복해 주셔서 잘 살게 하시리라 믿는다. 그러니 앞으로 더욱 열심히 살기를 바라며 이 글로 회답한다. 추신: 앞으로 전화는 특별한 일이 아니면 생략하겠다.’

 

편지 내용을 보면, 미국에 가서도 어머니는 영락없는 제주 여인으로 살아가고 계신다. 어머니의 리더십은 제주시에서 여고를 마친 두 언니를 서울로 보내놓고, 그 밑으로 줄줄이 서 있는 네 딸은 나란히 밭고랑에 앉히고서, ‘일 하기 싫으면 먹지도 말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라고 선언하는 담대함을 지녔다.(어머니는 그 두 딸이 서울에서 취직을 하면 동생들을 하나씩 책임져서 고등학교를 마치게 해 줄 것이고, 그러한 순리대로 우리 동네 최초의 여고생을 배출한 집안답게 딸 많이 낳은 허물이 오히려 자랑이 되리라는 기대를 하셨는지 모르겠다. 이모님은 이따금 그런 어머니를 나무라면서 딸만씩 한 것들을 공부시키느라고 네 허리가 휘어지는 줄도 모르느냐고 안쓰러워하셨다.)

 

‘그래봤자 딸은 때가 되면 남의 집 식구가 되고 말 것’이라는 이모님 예언대로, 어머니의 계산은 산산이 부서져 버리고 말았으니. 내 위로 두 언니는 중문에서 부모님 일을 도와가며 주경야독으로 고교를 마쳤지만, 나는 고등학교에 갈 형편이 더 어려워져서 서귀포에 생긴 실업 여고에 3년 장학생으로 입도선매되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그러니 어머니는 새벽기도를 가시기 전에 밥을 미리 지어놓고, 동이 떠오르기도 전에 어두컴컴한 길을 디디며 밭으로 나가셨다. 틀림없이 우리 동네에서는 어머니가 일등으로 밭고랑에 앉으셔서 김을 매기 시작하셨으리라.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으로 시작되는 정지용 시인의 향수에서는 그야말로 소도 해가 떠야 음메 하면서 거동을 시작하는데, 우리 어머니는 ‘쇠로도 못 나난 제주 여자로 나신에’라는 속담이 실제가 된 삶을 오지게도 사셨다.

 

우리들 또한 일어나자마자 책가방을 들고 밭으로 가서 일하는 사이, 당번이 해 온 조반을 먹은 후, 학교 종이 울리면 헐레벌떡 교실로 달려가는 새벽 일꾼으로 자랐다. 어쩌다 불운하게 용의 검사라도 할라치면 손톱 끝에 박혀 있는 흙 때문에 회초리를 맞았던 기억이 지금 생각해 보아도 여전히 쓸쓸하다. 선생님은 정말 그 당시 농촌 아이들의 가정형편을 그리도 모르셨을까.

 

어쨌든 어머니는 ‘일이 없으면 밥도 없다’라는 철학을 가지신 분인데, 그런데도 미국 땅에서는 별수 없이 놀고먹을 수밖에 없었으니 얼마나 애가 타고 온몸이 저렸을까. 아니 하늘의 아버지께서 그런 어머니가 안쓰러우셔서 “여기는 천국 아래 미국이니, 성춘아, 제발 무엇을 먹을까 염려하지 말고, 좀 놀아도 보고 쉬어도 보면서, 하늘에서 만나가 떨어지는지 기다려보면 어떻겠느냐?”라고 말씀하셨을 텐데….

 

어머니의 그 부지런도 습관인 듯 102세가 된 오늘도 “정옥아, 이 어멍, 오늘은 미신 일 허코 이?"라고 물으신다. 아, 오늘도 아침 공기에 이리도 무거운 더위가 단단히 실려 있는 걸 보면, 일기 예보 그대로 섭씨 35도가 넘는 무더위가 기승을 부릴 게다. 부디 더위에 먹히지 않도록 다음의 찜통더위 예방 및 대처법을 유념할 일이다;

 

찜통더위에는 노인, 어린이, 병자 등 면역력이 뚝 떨어진 사람은 건강에 특히 신경을 써야 한다. 불볕더위엔 온열병만 무서운 게 아니다. 미국 건강 매체 ’헬스라인‘에 따르면 면역력이 약한 사람은 심장마비(급성심근경색), 뇌졸중, 편두통, 콩팥병, 고혈압 등의 발작 증상과 악화에 조심해야 한다.

 

이 글을 마무리하기 위해 박완서 선생님의 책을 다시 훑어보았다. ‘모래알만한 진실이라도’는 다음의 문장에서 찾을 수 있었다. ‘자랑할 거라곤 지금도 습작기처럼 열심히라는 것밖에 없다. 잡문 하나를 쓰더라도 허튼 소리 안 하길, 정직하길, 조그만 진실이라도, 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 진실을 말하길, 매질하듯 다짐하며 쓰고 있지만, 열심히라는 것만으로 재능 부족을 은폐하지는 못할 것 같다. 작가가 될까 말까 하던 4년 전의 고민은 아직도 끝나지 않은 채다(중년 여인의 허기증, p.202)’

 

아, 나는 아버지의 편지에서 ‘앞으로 전화는 특별한 일이 아니면 생략하겠다’라는 말뜻을 이제야 알아채고서, 아무것도 해드리지 못한 나의 새가슴을 서럽게 때려주고 있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허정옥은?
= 서귀포시 대포동이 고향이다. 대학 진학을 위해 뭍으로 나가 부산대학교 상과대학에서 회계학을 공부하고 경영대학원에서 석사과정을 마친 후 미국 볼티모어시에 있는 University of Baltimore에서 MBA를 취득했다. 주택은행과 동남은행에서 일하면서 부경대학교에서 경영학 박사학위를 이수했고, 서귀포에 탐라대학이 생기면서 귀향, 경영학과에서 마케팅을 가르치면서 서귀포 시민대학장, 평생교육원장, 대학원장을 역임했다. 2006년부터 3년간 제주국제컨벤션센터(ICC JEJU)의 대표이사 사장과 제주컨벤션뷰로(JCVB)의 이사장 직을 수행한데 이어 제주평생교육장학진흥원장을 거쳤다. 현재는 서울과학종합대학원에서 서비스 마케팅과 컨벤션 경영을 가르치고 있다. 한수풀해녀학교와 법환좀녀학교도 다니며 해녀로서의 삶을 꿈꿔보기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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