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전통문화 중 충효 윤리 관념은 일찍이 주(周)대, 진(秦)대 이래로 유가 등 사상가들이 종족 가정의 범주를 뛰어넘어 ‘나라를 안정시키고 천하를 평안하게 하는’ 정치 도덕으로 승화시켰다. 충효는 중국 민족문화 전통의 핵심이다.
우순(虞舜), 한문제에서 맹종(孟宗), 황정견(黃庭堅) 등 24명의 효행에 대하여 서를 달고 시를 읊어 아동을 훈몽하는 『이십사효(二十四孝)』, 『이십사효도시(二十四孝圖詩)』를 편찬하였다. 사회에 광범위하게 유행하였고 경전과 같이 영향력도 대단했다.
효도를 위하여 자살한다거나 살을 베어낸다는 등의 극한 사례 이외에 충성을 다하고 효도를 다하기 위하여 기꺼이 거지가 되어 구걸하는 사례도 있다. 바로 역대로 세상 사람들이 표창하고 영광으로 여기는 ‘효개(孝丐)’다.
효행한 거지의 사례는 역대 필기잡저에 많이 기재되어 찬탄 받고 사회 풍습이 되었다. 역대 ‘효개’ 중에는 명나라 때 사람이 많다. 몇 가지 사례를 살펴보자.
효행한 거지 : 효개(孝丐)
명대 경초동(耿楚侗)의 『이효자전(二孝子傳)』 기록이다 :
오문(吳門)에 귀인 한 명이 달밤에 다리를 건너고 있었다. 다리 아래에서 노랫소리가 들려 바라보니 거지가 구걸해온 술을 들고 무릎 꿇은 채로 노부인에게 주면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귀인이 이상하다 여겨 위에서 무슨 일이냐고 물으니 거지가 답했다.
“나는 가난한 집안 자식이라 이렇게라도 하면서 노모를 기쁘게 해드리는 것이요.”
그 말과 광경은 귀인의 찬탄을 자아냈다. 그 이야기가 퍼져나가 사람들 모두 기이하다 여겼다. 어떤 호사가가 직접 찾아가 확인해 봤더니 거짓이 아니었다.
그때부터 부잣집에서 주연을 베풀 때에는 빈 술잔 하나를 더 준비한다고 전한다. 이름을 알 수 없는, 효행을 하는 거지에게 주려고 남겨두는 것이었다. 이 미담은 사람들이 입에서 입으로 전하면서 널리 알려졌다.
오군(吳郡) 사람이 쓴 『서초야기(西樵野記)』 의 기록이다 :
장주(長洲) 상성(相城)에 거지 한 명이 있었다. 매번 심은군(沈隱君), 맹연(孟淵)에게 구걸해서 얻은 음식을 다 먹지 않고 밥과 반찬을 나누어 가지고 온 그릇에 따로 담아 보관하였다.
심은군은 처음에는 별 관심을 두지 않다가 오랫동안 그렇게 하니 궁금증이 나서 이유를 물었다. 가지고 가서 노모에게 드린다고 답하였다. 심은군이 이상하게 생각하여 사람을 시켜 몰래 따라가 살펴보라고 하였다.
그 거지는 밥과 반찬을 구걸한 후 강가에 있는 배에 올랐다. 배는 낡았으나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그곳에 노부인이 살고 있었다. 거지는 구걸해온 음식을 모친 앞에 놓고 술을 한 잔 따라 무릎 꿇고 올린 후 옆에서 춤추고 노래하면서 모친을 즐겁게 해주는 게 아닌가. 노모가 식사를 마친 후에야 거지는 다른 일을 하였다.
매일 그렇게 했다. 나중에 노부인이 죽자 그 거지는 어디로 갔는지 사라져 버렸다.
이익(李翊)은 그 일과 그 사람이 『이효자전』 속의 상술한 내용과 같은 것이지 알지 못했다. 그래서 앞 내용을 기록한 후 부록하였다. 『고금도서집성』 거지부 명류열전 3에 「심효자(沈孝子)」라는 제목으로 이 일이 수록되어 있다. 그 거지의 성도 심 씨라고 한 후 말미에 ‘진짜 효자다’라고 명기하였다.
청대 저인획(褚人獲)의 『견호비집(堅瓠秘集)』 4권 『효개(孝丐)』에서 인용한 『도공담찬(都公談纂)』에서 말했다 :
명대 정통(1436~1449) 연간에 거지 한 명이 신체장애를 가진 부모를 모시며 남창교(南倉橋) 근처에서 살고 있었다. 그는 아침 일찍 나가 저녁 늦게 돌아왔다. 시내에서 구걸해온 고기 중에 좋은 것을 골라 다시 요리한 후 술과 함께 무릎을 꿇고 부모에게 올렸다. 옆에서 노래를 하면서 흥취를 돋우다가 부모가 만족할 때쯤에 멈췄다. 사람들은 그 거지의 효행에 감동해 기꺼이 그에게 보시하였다.
벙어리 효자
청대 장조(張潮)가 명나라 말기 청나라 초기 사람들의 이야기를 모아놓은 문언소설 『우초신지(虞初新志)』 15권에 왕길(王洁)의 『아효자전(啞孝子傳)』이 수록되어 있다.
벙어리 효자의 성은 최(崔), 이름은 장생(長生)이었다. 비주(邳州) 사람으로 태어날 때부터 벙어리였다. 손도 오그라들어 잘 쓸 수 없었다.
그가 구걸하면서 부모를 공양하자 사람들이 가련하게 여겨 때때로 보시하기도 하고 보살펴 주기도 하였다. 구걸해온 음식을 먼저 부모에게 주고 자신은 초근으로 허기를 때우면서 다리 저는 부모와 가뭄 겪은 해를 무사히 보냈다.
어느 날, 폐지를 줍다가 떨어져 있는 금을 발견하고 잃어버린 사람을 찾아주려 하였다. 한 달여 동안 잃어버린 사람이 나타나지 않자 돈으로 바꾸어 부모를 공양하고 남은 돈으로 상복과 관을 준비하였다.
나중에 부모가 죽자 벙어리 효자는 슬픔에 눈물을 흘리면서 3일 동안 아무 것도 먹지 않았다. 부모를 안장한 후에 벙어리 효자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렸다. 이에 어떤 사람이 탄식하였다.
“지금 사대부는 날마다 시서를 암송하고 인의를 얘기하고 아침저녁 마다 내성한다면서도 벙어리 효자가 어떻게 됐는지 알지 못한다! 오호, 탄식하지 않을 수 없구나.”
자녀를 위하여 재물을 쌓은 늙은 거지
이와 같은 사례가 일시에 널리 알려져 미담이 된 것을 보면 한 시대의 풍조를 익히 알 수 있다. 기꺼이 구걸하면서 부모를 공양하는 것은 효성이 지극하다 할 것이다.
노인을 공경하고 효도하는 것은 중국의 전통 미덕 중 하나다. 이와 반대로 자손이 효도하지 않아 부모가 거지로 전락한 경우도 허다하다. ‘효자 거지’와 선명한 대조를 이룬다.
현대사회는 복지사업이 발전함에 따라 ‘효자 거지’나 자녀가 불효해 거지로 전락한 노인이 그리 많지 않다. 그렇지만 가끔 자손이 효도를 하지 않는다는 명목으로 구걸하는 늙은 거지가 보인다.
예를 들어 A시 근교에 칠순 가까이 된 노인이 늙은 얼굴을 재산으로 구걸하면서 자식들에게 돈을 보태주었다. 현지에 육순 가까이 된, 전족한 노파도 자식들이 불효해 쫓겨났다면서 구걸하며 다녔다. 실제 노파도 늙은 얼굴을 무기로 구걸하여 자식들에게 돈을 보태주었다. 그 노파에게는 아들이 셋 있었다. 모두 텔레비전, 녹음기가 있는 기와집에 살고 있었다.
며느리 셋이 노파의 돈을 놓고 서로 싸움까지 하였다.
이런 노인들은 비정상적인 사랑, 변태적 심리로 거지가 되어 돈을 벌었다. 이런 행위 그 자체는 사회 풍조를 오염시키고 손상시켰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오문(吳門)은 소주(蘇州) 혹은 소주 일대를 가리킨다. 역사상 소주를 부르는 별칭의 하나다. 춘추시대 때에 오(吳)나라에 속했던 지역이기에 붙여진 이름이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 학사, 대만 정치대학교 중문학과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자로 『선총원(沈從文) 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 『재미있는 한자풀이』, 『수달피 모자를 쓴 친구(선총원 단편선집)』, 『음식에 담겨있는 한중교류사』, 『십삼 왕조의 고도 낙양 고성 순례』, 『발자취-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찾아가는 여정』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교수로 재직 중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