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한 경우도 있었다. 거지 단체가 그걸 기회로 함부로 협박해 재물을 강요하였다. 진우문(陳雨門)의 『개봉춘절구침(開封春節鉤沉)』에 한 사례를 기록하고 있다.
“설 전후 연말연시 때에 거지가 많았다.”
『개봉기구전불진노인담(開封耆舊傳拂塵老人談)』 기록을 보자 :
청나라 말기 민국 초기에, 음력 섣달부터 음력 섣달 그믐날까지 상국사(相國寺)의 속인들과 잡팔제(雜八弟, 강호에서 상하구류의 한 분파를 말하는데 소매치기, 유괴범, 사기꾼 등을 포함한다)가 결합하여 귀신, 부녀자로 분장해 북을 치고 휘파람을 불면서 매일 저녁 상점이 문 닫을 즈음에 길을 따라서 사기치고 강탈하였다. 섣달 그믐날이 가까워지면 더 심해졌다.
그러면 상국사 두목 노요(魯耀)가 친히 나서서 중재하였다. 연말마다 거상들이 대표를 선발하여 약간씩 갹출하여서 거지 두목에게 전달했는데 ‘송년(送年)’이라 불렀다. 민국 8년 이후에서야 처음으로 단속되었다.
중일전쟁 이전에 연화락을 실연하며 다니는 거지들이 있었다. 어린아이 머리에 부들로 엮어 만든 꾸러미를 씌우고 코와 입만 보이게 구멍을 낸 후 그 위에다 석회로 자라 모양을 그리고 가운데에 ‘왕팔(王八)’ 두 글자를 써서는 목에다 삼밧줄을 묶어서 끌고 다니면서 불운한 기운을 없애라 소리치며 구걸하였다. 상점에 이를 때마다 상점의 크기에 따라 반드시 8수(80문, 800문, 최소한 8문)를 주라고 강압적으로 요구하였다.
경험이 있는 상점에서는 80문이나 800문을 주면 행운의 말을 몇 마디 읊고는 떠났다. 그렇지 않으면 불길한 말을 하루 종일 쉬지 않고 쏟아내었다. 쟁반에 4색의 연말 선물을 올려놓고 먼저 새해 인사를 하고 그에 따라 후사(적으면 100문, 많으면 1000문)하라고 강요하는 일은 다반사였다.
위와 같은 사례는 모두 옛날 설날 풍속 중의 구성부분이다. 거지도 상응하는 관습을 형성하였다.
재미있는 일은 따로 있다. 평상시에 사람들은 약자를 동정하는 심리와 선량한 마음이 생길 때에는 힘이 닿는 데까지 거지에게 기꺼이 보시하고 구제하였다. 그런데 일단 자기 가정의 운명과 절실한 이해관계가 있는 금기와 상충될 때에는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자신을 지키는 방법을 택했다.
눈치가 있는 거지들은 금기가 많은 설날 기간에는 구걸하는 것을 피했다. 설날 전에 강압적으로 돈을 요구하는 식으로 구걸했더라도 설 때에는 습속 제약에 얽매여 교묘하게 순응하는 방식으로 전환하면서 쌍방이 공유하는 케케묵은 낡은 습관이 되었다.
옛날에 하남(河南) 거지는 ‘돈을 요구할 때에는 반드시 8수로 하여야 했다.’ 왜 그랬을까? 한족의 수(數)문화를 교묘히 이용한 까닭이다. 한족은 ‘8’을 길한 숫자, 정해진 운명, 정액의 숫자로 생각하는 관습이 있었다.
거지가 조왕신에게 제사하다
연말에 거지가 관례대로 강압적인 방식으로 구걸하는 행태는 송대에 이미 선례가 있었다. ‘타야호(打夜胡)’라 한다. 송대 맹원로(孟元老)의 『동경몽화록(東京夢華錄)』 10권 「십이월(十二月)」의 기록이다.

“이 달이 되면 가난한 자 서너 명이 한 무리가 되어 귀신 부인으로 분장하고 쟁과 북을 치면서 대문을 돌며 구걸하였다. 민간에서는 ‘타야호’라 불렀다. 요괴를 몰아내는 법이다.”
이런 ‘타야호’는 양언령(楊彦齡)의 『양공필록(楊公筆錄)』에는 ‘打夜狐’, 조언위(趙彦衛)의 『운록만초(雲麓漫抄)』에는 ‘打野胡’라 되어 있지만 실제는 이런저런 명목으로 돈을 갈취한다는 뜻인 ‘타추풍(打秋風)’과 마찬가지다. 어떤 곳에서는 재신을 건네주고 어떤 곳에서는 도깨비 모양으로 가장해 잔꾀를 부리는 것일 따름으로, 실제로는 형태를 바꾸고 기회를 틈타 동냥하는 것으로 명목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청대 소주(蘇州)에 거지가 조왕신에게 제사지냈다. 청대 고록(顧祿)의 『청가록(淸嘉錄)』 12권 「십이월·도조왕(跳竈王)」의 기록이다.
“음력 초하루에 거지 서너너덧 명이 한 무리를 이루어 조왕, 조왕부인으로 분장하여 각자 대나무 가지를 잡고 문 앞에서 시끄럽게 굴면서 구걸하였다. 24일이 되어야 그치는데 ‘도조왕’이라 부른다. 주종태(周宗泰)는 『고소죽지사(姑蘇竹枝詞)』에서 ‘또 늦겨울이 되니 분주하게 재촉하여 길거리에 재신화상이 상점마다 열리게 하네. 조왕신으로 분장한 사람이 오니 사람마다 아양 떠는데, 결국은 돈으로 주머니를 채울 속셈이라네.’ 라고 읊었다.”
이에 대하여 고록은 평어 방식으로 고증해 인증하였다.
“이랑(李廊)은 『경청사(鏡聽詞)』에서 ‘상자에서 거울을 꺼내 조왕(竈王)에게 고별하였네.’라고 했는데 조신(竈神)을 조왕이라 부른 것으로 당(唐)대에 이미 그러하였다. 또 이작(李綽)은 『진중세시기(秦中歲時記)』에서 ‘섣달 그믐날에 나(儺)가 들어왔는데 모두 귀신 형상이었다. 안에 둘이 있었는데 나공(儺公), 나모(儺母)다.’라고 했는데 가설정(家雪亭)이 『토풍록(土風錄)』에서 현재의 조공(竈公), 조파(竈婆)라고 하였다. 채철옹(蔡鐵翁)은 시에 ‘할아버지 할머니에게 돈을 요구하니 결국 쌍을 이루었다.’
『양서(梁書)』에서는 ‘나(儺)는 야운(野雲)이다.’ 『남사(南史)·조경종전(曹景宗傳)』에서는 ‘일찍이 음력 섣달 에 사람을 시켜 가택에서 사악함을 쫓도록 하였다.’……유독 강지(江志), 진지(震志)에서는 ‘24일에 거지가 얼굴에 분칠하고 모습을 바꾸어 남녀 귀신으로 분장해 구나(驅儺) 제사를 지내고 재물을 요구하였다. 민간에서는 도조왕(跳竈王)이라 한다.’ 주밀(周密)은 『무림구사(武林舊事)』에서 말했다. ‘24일, 시정에서 나(儺)를 맞이하였다.’ 오만운(吳曼雲)은 『강향절물사(江鄕節物詞)』 서론에서 ‘항주의 풍속에는 조왕에게 제사지낸다. 거지는 음력 섣달 하순에 얼굴을 검게 칠하고 시가로 나가 깡충깡충 뛰면서 돈과 쌀을 요구하였다.’라고 말했다.”
이 사이에 현지에서는 또 거지들이 종규(鐘馗)에게 재사지내는 풍습이 있었다. 『청가록』 12권 「십이월·도종규(跳鐘馗)」의 기록이다.
“거지는 낡은 갑옷과 투구로 종규처럼 분장하여 문 앞에서 춤을 추면서 귀신을 쫓았다. 음력 초하루에 시작해 섣달 그믐날에 그쳤다. ‘도종규’라 한다. 주종태(周宗泰)는 『고소죽지사(姑蘇竹枝詞)』에서 ‘흰 머리 낡은 모자 헌 옷, 만 량의 황금으로 향화 드리네. 보검을 새로 갈아 귀신을 쫓아내니 확실히 나라를 지키는 충량이구나.’ 라고 읊었다.”
거지가 종규에게 제사지내는 ‘도종규’도 돈을 버는 하나의 명분임은 분명하지만 관습이었다.
사람들은 신을 즐겁게 하고 자신도 즐기면서도 ‘인격을 잃어버리는’, 자신이 직접 귀신으로 분장하지 않으려고 어쩔 수 없이 돈주머니를 풀어 거지와 같은 ‘천민’을 고용한 것이 아니던가. 그렇다면 대가를 지불하여야 한다.
보시 방법으로 거지를 매수하여 신을 즐겁게 하고 자신도 즐기는 목적을 달성하였다. 거지에게 속세 사람과 귀신 사이를 연결시키는 역할을 담당케 하였다. 신을 공경하면서도 거지에게 신을 희롱하는 역할을 맡겨 거지의 인격을 희생시켰다.
거지를 사람과 귀신 사이를 중개하는 사자로 삼을 셈이다. 정말로 이해하기 힘든 논리다.
예부터 지금까지 여러 습속 중에서 이러한 앞뒤가 서로 맞지 아니하고 모순되는, 자가당착인 상황이 어디 한둘이던가. 일정한 의미에서 말하면 습속은 특정한 모순의 산물이라 할 수도 있다.
습속은 모든 것을 다 포괄하고 있다. 습속은 특정한 모순을 조정하고 균형을 잡는 공구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 학사, 대만 정치대학교 중문학과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자로 『선총원(沈從文) 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 『재미있는 한자풀이』, 『수달피 모자를 쓴 친구(선총원 단편선집)』, 『음식에 담겨있는 한중교류사』, 『십삼 왕조의 고도 낙양 고성 순례』, 『발자취-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찾아가는 여정』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교수로 재직 중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