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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 2주년 특별기획] 격동의 현장-남기고 싶은 이야기(제2화)
양영철 교수가 전하는 '제주근대화의 선구자' 맥그린치 신부 (6)

 

맥그린치의 이시돌 목장은 한국축산업의 역사를 새로 쓴 곳이다. 개량종 돼지를 들여오고, 미군부대에서나 봄직한 트랙터가 1950년대에 일찌감치 이시돌 목장에 자리잡았다. 한국기업농의 시초였다. 60년대 초 나라도 실패한 목초지 개발을 해낸 것도 맥그린치 신부의 손에 의해서다.

 

하지만 그런 전국 최초의 타이틀은 돼지 한 마리에서 시작됐다. 거짓말 같은 이야기다. 돼지는 어느 나라에서도 흔한 동물이다. 키우기 쉽고 잘 자라주니 식용으로 딱이다. 궁핍한 살림인 당시 제주에서도 집안에 돼지 한 두 마리는 키우고 있었다. 맥그린치 신부는 그 돼지에 눈독을 들였다. 제주사람에게 익숙한 가축이기 때문이다.

 

경제는 노동·자본·토지만 뒷받침되면 돌아간다. 맥그린치가 정착한 한림만 하더라도 노동력이 풍부했고, 땅도 얼마든지 있었다. 자본만 얹으면 될 판이었다. 하지만 그 시절 자본을 거론한다는 것 자체가 사치였다. 물물교환의 경제였던 시절이다. 맥그린치는 그 자본을 돼지에서 찾았다.

 

 

 

유일한 자본인 그 돼지는 그가 보기에 시원찮았다. 당시 제주에서 키우는 돼지는 인분과 구정물 등으로 키우는 흑돼지다. 게다가 성장 속도는 매우 더디었다. 1년 반을 키워도 60kg이 고작이었다. 게다가 사람의 기생충이 인분을 먹는 돼지로 옮겨가서 결국 사람에게 다시 옮기는 숙주역할을 돼지가 하게 돼 제주도에는 다른 지역에없는 낭충이라는 풍토병이 유행될 정도였다. 오죽이나 심했으면 서울대 의과대학이 서귀포에 풍토병 연구소를 지었을까.

 

맥그린치 신부의 고향 아일랜드는 달랐다. 새끼 돼지를 6개월만 키우면 60~80kg이상으로 자라는 걸 그는 숱하게 보아 왔다. “제주토종돼지를 우량 돼지로 바꾸기만 하면 훌륭한 자본이 될 수 있겠다.”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그는 전국을 수소문했다. 1955년 전후의 일이다. 전쟁 직후였고 경기도 일대엔 아직 비상계엄령이 해제가 되지 않을 때였다. 경기지구 사령관인 미군 대령 앤더슨은 경기도지사나 다름 없었다. 그에게 매달렸다. 그러자 이리저리 궁리를 하더니 새끼를 밴 요크셔 품종의 서양돼지 한 마리를 헐값으로 구해 팔아줬다.

 

돼지는 생겼지만 키우는게 고민이었다. 보기만 했지만 키워본 경험이 맥그린치에겐 만무했다. 경기도 4H클럽을 찾아가 돼지사육법이 적힌 책을 구했다. 그리고 한림 4H 회원들과 학습에 들어갔다. 그 돼지는 처음 키울 곳이 마땅찮아 신축한 지 얼마 안 된 성당 마당에서 키웠다. 털이 하얀 돼지, 크기도 제주흑돼지와는 비교할 수 없는 새끼 송아지만큼이나 큰 돼지가 한림 성당에 들어 왔다. 생뚱맞게 생긴 돼지로 보였는지 그 돼지는 구경거리가 됐다. 그 돼지를 보러 ‘성안’(제주시)사람들이 찾아오는 일이 부지기수였다. 쑥스러운 ‘명물’이 된 것이다.

 

그 돼지가 10마리 새끼를 낳았다. 맥그린치 신부는 4H 회원들에게 암컷 한 마리씩을 나누어 주면서 새끼를 낳으면 암컷 두 마리를 가져 오는 계약을 맺었다. 이 두 마리가 다시 새끼를 치면 다시 분양하는 릴레이 방식을 고안한 것이다. 키우는 방법도 기존 제주 스타일을 버렸다. 우선 사료부터 바꾸었다. 인분은 절대 먹이지 못하도록 했다. 정 궁하면 최소한 보릿 겨라도 먹이도록 했다. 그런데 그 정도 먹이론 잘 자라지 않았다. 이 궁리 저 궁리를 하며 한림항 부두를 지나칠 때였다. 맥그린치는 무릎을 쳤다. 한림부두에서 어부들이 어획감 손질을 하며 생선의 내장, 머리 등을 그냥 내다버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거다.”

 

 

어부들이 버린 쓰레기를 주워와 보릿겨와 섞어 돼지에게 사료로 줬다. 게다가 그가 예전에 ‘식물성 단백질의 보고’라고 귀동냥으로 안 클로바는 그 시절 이시돌 목장 지천에 널려 있었다. 그것도 섞었다. 먹이가 제대로 갖춰진 것일까? 돼지는 쑥 쑥 잘 자랐다. 분양된 돼지엔 이시돌 목장 만의 마크를 했고, 한 달에 한 번씩 체중을 달아 충실히 기록했다. 우리 축산업계에서 최근 도입한 이력제는 사실 이시돌에서 이미 50년대에 시작한 것이다.

 

잘 자라주는 돼지를 보며 맥그린치는 축산업의 메카가 될 한림마을을 생각하며 벅찬 꿈을 꾸기 시작했다. 하지만 중·고교생인 4H클럽 회원들에게 분양해 준 돼지는 시간이 흘러갈 수록 두 마리의 암컷으로 되돌아오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오히려 그 어린 중학생들의 울음소리만 듣게 됐다. 사연을 듣고보니 황당했다. 그 어린 학생들이 학교에 간 사이에 부모가 시장에 내다 팔아버리거나 집안의 경조사 용으로 잡아 먹을거리로 둔갑했다는 것이다. 어린 4H 회원들은 신부와의 약속을 지키지 못한 것 때문에 죄인의 심정으로 찾아와 울기만 했다.

 

맥그린치는 그때 깨달았다. “아차 나의 실수다”라고 생각했다. 유교사회인 한국에서 어른이 아이를 가르치지 아이가 어른을 가르칠 수 없다는 걸 알았다. 아이들의 성공을 통해 부모의 마음을 바꾸려는 시도였는데 오히려 아이들의 좌절과 분노만 커지게 만들어 버렸던 것이다. 하지만 눈물을 흘리는 그 아이들이 그래도 밑천이었다. 울음을 감추지 않던 중·고생 4H회원들은 그 시절 25명이었다.

 

골칫거리는 또 생겼다. 한림성당 마당에 키우는 돼지가 20마리 정도로 불어나자 냄새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신자들과 마을 주민들이 수군대기 시작했다. 불만의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아무래도 키우는 장소를 옮겨야 했다.

 

그 시절 먹을 것도 구하기 힘들었던 때다. 맥그린치는 틈 나면 어느 미군이 버리고 간 엽총으로 꿩과 노루사냥을 다니곤 했다. 한라산 중턱을 헤매던 일이 잦았는데 그 때 봐두었던 장소가 퍼뜩 기억에 떠올랐다. ‘정물’이라는 곳이었다. 일제 강점기에 일본군 부대가 있었던 장소라서 물도 있고, 막사도 있는 것을 눈여겨보았던 터다. 당시 맥그린치 신부의 월급은 미화 70달러. 생활하기도 벅찬 돈이었다. 할 수 없이 고향 친구와 친척들에게 매일 편지를 쓰면서 손을 내밀었다. 1달러에서 10달러의 돈을 친구들은 맥그린치에게 부쳤다. 십시일반으로 모은 돈을 갖고 그 정물 주변 땅 3000평을 샀다. 그 때 돈으로 평당 0.5원씩 고작 1500원이 들었다. 도로도 없고, 가시덤불만 있는 땅이지만 그 때 시세로 치면 큰 돈을 주고 산 것이다.

 

소문이 퍼지자 그 주변 땅 주인들이 제 땅도 사달라고 문전성시였다. 하지만 그들은 뒤켠에서 “아무 물정도 모르는 외국 신부가 바가지를 쓰고 있다”고 콧노래를 불렀다. 그렇게 사들인 땅이 지금 250만평의 거대 이시돌 목장이다. 돼지 키울 축사를 찾다가 어거지로 넘겨받은 땅이 대규모 목장의 터전이 된 것이다.

 

 

일은 벌어졌다. 땅 걱정도 없었다. 넓디 넓은 땅이 있기에 이젠 돼지를 키울 사람만 구하면 됐다. 눈물을 흘리던 그 어린 친구들이 생각났다. 그 땅에 4H 회원들을 합숙시키면서 돼지를 본격적으로 키우기 시작하였다. 돈이 없는데 월급을 줄 수도 없는 노릇. 하지만 밥은 먹여줘야 했다. 쌀과 최소한의 부식만 제공했다. 그런데도 그들은 정말 열심이었다. 지금도 고마움이 가슴을 적신다. 그 당시에 고생한 분들 중에 끝까지 이시돌에 남아서 목장장까지 지낸 김봉원씨, 사료공장장을 한 홍성무씨는 이시돌 목장의 산 증인이다. 그 회원 중에 신부삼씨는 현재 4천마리 돼지를 키우는 등 부농으로 성장, 고소득을 올리는 축산전문가들이 수두룩하다.

 

맥그린치 신부는 본격적으로 양돈 사업을 하기 위해 1957년 3월 4-H 가축은행을 설립했다. 공동으로 생산하고 공동으로 판매하는 집단 농장을 만든 것이다. 지금 13만마리의 돼지가 자라는 한림지역의 양돈산업은 거기서부터 시작됐다. <글=양영철/ 7편으로 이어집니다>
 

 

맥그린치 신부는? = 1928년 남아일랜드의 레터켄에서 태어났다. 성 골롬반 외방선교회 사제로 1954년 제주로 부임한 후 지금까지 60년간 제주근대화·경제발전의 견인차 역할을 했다. 성당을 세운 뒤 수직물회사를 만들고, 4H클럽을 만들어 청년들을 교육했다. 신용협동조합을 창립, 경제적 자립의 토대를 만들었고, 양과 돼지 사육으로 시작된 성이시돌 목장은 제주축산업의 기초가 됐다. 농업기술연수원을 설립하고 우유·치즈·배합사료공장을 처음 제주에 만든 것도 그다. 그는 그 수익금으로 양로원·요양원·병원·호스피스복지원과 어린이집·유치원을 세워 가난한 이들을 도왔다. 그 공로로 5·16민족상, 막사이사이상, 대한민국 석탑산업 훈장 등을 받았고 1973년 명예 제주도민이 돼 ‘임피제’라는 한국명을 쓰기 시작했다.

 

 

 

 

양영철 교수는?

 

=제주대 행정학과를 나와 서울대와 건국대에서 행정학 석·박사학위를
받았다. 학위 논문은 “내생적 지역개발에 관한 연구 .” 맥그린치 신부의 제주근대화 모델을 이론적으로 살핀 저술이다. 현재 한국지방자치학회 회장, 대통령 소속 지방자치발전위원회 위원 및 제2소위 위원장을 맡고 있다. 조선말 ‘의녀’로 불리는 김만덕 기념사업회 기획총괄위원장이면서 ‘나비박사’로 알려진 석주명 기념사업회 공동대표이기도 하다. 제주특별자치도 출범, 자치경찰 탄생의 이론적 산파 역을 한 게 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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