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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속 특별기획] 격동의 현장-남기고 싶은 이야기(제2화)
양영철 교수가 전하는 '제주근대화의 선구자' 맥그린치 신부 (20)

 

이달 9일의 일이다. 한림체육관에서 맥그린치 신부를 되돌아봤다, '제주를 사랑한 푸른 눈의 신부‘란 주제로 맥그린치 신부에 대한 회고대회를 열었다. 맥그린치 신부기념사업회가 주최하고 제주특별자치도와 한림읍이 후원했다. 대회의 모든 프로그램은 제주대학교 스토리텔링 연구개발센터장인 양진건 교수가 수고했다. 진행 사회는 제주MBC 라디오의 최장수 프로그램인 ’돌하르방 어디로 감수과‘의 양기훈씨가 맡았다.

 

회고에는 다섯 명이 나섰다. 이시돌 병원의 추억에 김수렬씨와 장창두씨가, 양돈업에 신부삼씨, 한림수직에 이봉선씨, 4H 활동에 남상민씨다. 하지만 정작 맥그린치 신부는 그 자리에 나타나지 않으려 했다. 자신이 나서는 게 아무래도 스스로 자랑거리를 늘어놓는 것 같아 마뜩치 않았던 모양이다. 더욱이 오늘날 이시돌협회의 성장이 스스로 혼자 일궈낸 성과가 아니란 이유였다.

 

기념사업회에선 이시돌협회와 동고동락한 이들의 회고전이란 이유를 들어 그를 졸랐다. 어렵사리 응낙한 그는 절대 화려하게 하지 말 것, 돈을 쓰지 말 것, 내 사진을 크게 하지 말 것 등의 조건을 대고 마지못해 그 자리를 수락했다. 그래서 기념사업회에서는 조용하게, 그리고 검소하게, 언론에 노출도 하지 않고 회고전을 가졌다. 이날 참석한 분들의 증언이야 말로 오늘날 이시돌협회가 이룩한 성공의 디딤돌을 가늠케했다. 그 이야기를 싣는다. 맥그린치 신부에 대한 이해의 또 한 부분이다.

 

 

 

제주에 의료봉사의 문을 연 한림 이시돌 병원

 

김수렬 여사의 회고다. 김 여사는 이시돌 의원이 설립할 당시부터 근무를 하였기 때문에 맥그린치 신부와 인연은 1989년 이시돌병원에 근무하면서부터 시작된다. 그는 지금도 이시돌의원 호스피스 병동에서 근무하고 있다. 그는 이시돌 병원에 지금까지 근무하면서 배운 건 ‘사랑’이라고 단언했다. 사랑은 끝이 없다는 것이다. 특히, 외국 의사인 엔다 원장 수녀를 모신 이후에 이 분들이, 외국인들이 왜 이렇게 우리를 위하여 그 먼 곳에서 와서 봉사를 하는지에 대해서 ‘사랑’말고는 설명할 수가 없다고 말했다.

 

그의 말을 그대로 올려본다.

 

“이시돌 병원 설립땐 제주도에 그나마 제주시에 병원 하나만 있을 때였으니 한림 이시돌 병원은 제주도에서는 금방 유명한 병원이 되었다. 거기에다 외국인 수녀님이 원장이었고, 친절하였으니 인기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당시에는 의료보험이 안 되어 있었기 때문에 가난한 사람은 병원에 갈 수도 없었고, 약도 사먹을 수 없는 정말 가난한 시절이었다. 이시돌 병원은 병원비도, 약도 저렴하였다. 이 소문을 듣고 제주도 전역에서 환자들이 몰려들었다. 하루에 100~150명은 보통일 정도였다. 엔다 원장 수녀님은 이 환자들을 정말 성심성의껏 돌보아 주었다. 가정사 이야기도 잘 들어 주었다. 이야길 듣다 정말 가난한 사람일 때는 처방전에 ‘F’란 사인이 표시됐다. 무료라는 Free의 약자다. 하루에도 수십 명이 무료 환자였다. 원장 수녀님은 이것으로도 성이 차지 않아서 이들에게 꼭 먹을 것을 주도록 하였다. 없으면 음료수라도 주도록 하였다. 배도 못 채우고 약을 먹이면 안 좋다는 것이었지만 굶주린 그분들에 대한 배려인 것이었다.

 

 

원장 수녀님은 당시에 제주도에 유독 간질환자가 많았는데 이를 치료하기 위하여 ‘로즈회’를 만들어서 이들을 치료하고 보살펴 주었다. 이들 환자 중에는 지금도 우리 이시돌 병원에서 약을 타고 가는 사람이 있을 정도다. 이시돌 병원은 매주 수요일과 토요일 오후에 가정방문, 소위 왕진을 하러 다녔다. 특히 암환자의 집에는 꼭 방문하여 진통제를 놓아 드리는 등 할 수 있는 치료를 다 하였다. 교도소도 매주 한차례 방문, 치료도 해 주고 인생 상담도 했다. 1998년 골롬반 수녀님들이 철수하면서 앤다 원장수녀님도 이시돌 병원을 떠났다. 지금도 그 분이 한림과 제주도민에 대한 사랑을 잊을 수가 없다.“

 

이어지는 장창두씨의 회고다. 이시돌 병원에서 1965년부터 근무를 한 이다.

 

그는 “엔다 원장 수녀님이 노약자 집을 방문할 때마다 운전을 하면서 따라 다녔는데 그렇게 정성스러울 수가 없었다”고 말했다. 퀴퀴한 악취가 풍기는 잡동사니 쓰레기장 같은 집구석이 대부분이었지만 수녀님은 그 더러운 집일지언정 진료만 하고 끝내는 법이 없었다. 팔을 걷어부치고 빗자루와 걸레를 들어 집 구석구석을 청소하기까지 했다. “천사가 따로 없었다”는 게 장 씨의 기억이다.

 

국내 첫 기업형 양돈 시작해 돼지축산업 길을 트다

 

신부삼씨의 회고다. 그가 맥그린치 신부와 인연을 맺은 건 1957년 전후. 맥그린치 신부가 한림성당에 첫 부임했을 때 신자였던 25명 중 한 사람이 자신의 형이라는 것. 형이 성당을 다니면서 4H활동을 하는 것을 보고 부러워서 자신도 성당에 나가게 되고, 4H 활동도 하게 되었다. 모두가 너무나 가난한 시절이었다. 지금 자신이 키우는 돼지도 먹지 않을 음식물쓰레기를, 그것도 없어서 못 먹었던 시절이었다.

 

맥그린치 신부는 4H클럽 활동을 통해 농사짓는 법에서부터 돼지·닭 키우는 법을 가르쳤다. 조그마한 성당 건축 예정지 땅에 어린애들을 모아 놓고 농사짓는 방법, 특히 감자를 심고 가꾸는 방법을 가르치던 모습을 생각하니 지금도 눈에 선하다는 것. 하지만 그 때는 절체절명 시절이었기에 모두 열심히 배웠다. 특히 돼지를 나누어 주고 새끼를 낳으면 다시 두 마리씩 가져 오게 하고, 또 이를 분양하면서 동물은행을 만들었던 기억이 아련하다. 신씨는 차례가 되지 않아 암퇘지를 못 받고 수퇘지를 받아 왔다. 열심히 키웠는데 워낙 먹을 게 없어서인지 잘 크지 않아 애를 먹었다. 그런데 두달이 채 되지 않아 학교를 다녀와 보니 돼지는 사라져 버렸다. 어머니가 몰래 시장에 내다 팔아버린 것이다. 그러던 시절이었다.

 

그러다 신씨는 군대를 갔다왔다. 3년 복무뒤 고향에 오자 맥그린치는 그에게 양돈관리사 일을 맡겼다. 그러다 그의 군 행정경험을 눈 여겨 본 맥그린치는 다시 이시돌협회의 행정 일을 그에게 맡겼다.

 

맥그린치는 돼지를 수출하고자 동분서주 중이었다. 처음에는 각 가정에 나누어준 돼지를 갖고 수출을 하려고 하였다. 철저한 관리로 일정한 체중이 나와야 되는게 관건이었다. 그런데 아무리 노력해도 돼지 몸무게는 늘지 않았다. 돼지를 키우기 위한 사료용 옥수사가 각 가정으로 들어가 사람이 먹는 음식으로 대체되는가 하면 아예 빼돌려 시장에 내다 팔아버리기 일쑤였기 때문이다. 너무도 어려운 시절이라 맥그린치는 보고도 모른체 할 뿐 그저 가슴만 쓸어내렸다.

 

 

결국 맥그린치는 가정 양돈이 아닌 기업형 양돈느로 방향을 틀었다. 국내 최초의 일이다. 그리곤 홍콩과 일본으로 수출을 시작했다. 부산에 가서 도축하고 가공하여 수출하였다. 일이 잘 풀렸다. 그런데 5·16 군사쿠테타가 터졌다. 군인들은 경제를 잘 몰랐다. 갑자기 돼지 값이 올라가자 이시돌 목장에 다그쳤다. “수출을 중단하고 국내에서 팔라”는 명령이었다. 수출은 계속하고 돼지를 더 키워서 국내에 팔면 되는데, 수출하는 돼지를 국내에 돌리라는 이어없는 처사였다. 설득도 통하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수출을 포기했다. 돼지 값이 오르자 너도 나도 양돈업에 뛰어들었다. 심지어 대기업까지도 양돈업에 손을 댔다. 이게 화근이었다. 이젠 너무 많은 돼지가 시장에 나와 돼지값이 곤두박질쳤다. 그 시절 소위 ‘돼지 파동’이다. 그러자 정부가 내놓은 대치는 전업 돼지사육농부터 생산을 중단하라는 소리였다. 결국 맥그린치는 다른 양돈농가의 피해를 막고자 기업형 양돈을 접고 다시 일반 가정으로 분양을 결정했다.

 

신씨도 그때 돼지를 분양받았다. “앞으로 돼지를 잘 키우면 자가용 타는 시대가 올 것이다”는 알듯 모를듯 한 말이 맥그린치의 입에서 나왔다. 농담인 줄 알았다. 신씨를 포함, 이시돌 목장 직원 15명이 돼지를 분양받았다. 거의 공짜나 다름 없었다. 각기 사정이 그러니 3년을 이시돌 목장에서 키우게 하였다. 그리고 이후 독립해 지금 키우는 돼지는 무려 4500마리다. 물론 자가용을 탄 지는 꽤나 오래됐다. 그 시절 맥그린치 신부는 미래를 보고 있었다. “지금만 보지 마라. 항상 미래를 보라”는 게 맥그린치 신부가 우리에게 전해준 교훈이다. <21편으로 이어집니다>

 

맥그린치 신부는? = 1928년 남아일랜드의 레터켄에서 태어났다. 성 골롬반 외방선교회 사제로 1954년 제주로 부임한 후 지금까지 60년간 제주근대화·경제발전의 견인차 역할을 했다. 성당을 세운 뒤 수직물회사를 만들고, 4H클럽을 만들어 청년들을 교육했다. 신용협동조합을 창립, 경제적 자립의 토대를 만들었고, 양과 돼지 사육으로 시작된 성이시돌 목장은 제주축산업의 기초가 됐다. 농업기술연수원을 설립하고 우유·치즈·배합사료공장을 처음 제주에 만든 것도 그다. 그는 그 수익금으로 양로원·요양원·병원·호스피스복지원과 어린이집·유치원을 세워 가난한 이들을 도왔다. 그 공로로 5·16민족상, 막사이사이상, 대한민국 석탑산업 훈장 등을 받았고 1973년 명예 제주도민이 돼 ‘임피제’라는 한국명을 쓰기 시작했다.

 

 

 

 

양영철 교수는?

 

=제주대 행정학과를 나와 서울대와 건국대에서 행정학 석·박사학위를 받았다. 학위 논문은 “내생적 지역개발에 관한 연구 .” 맥그린치 신부의 제주근대화 모델을 이론적으로 살핀 저술이다. 현재 한국지방자치학회 회장, 대통령 소속 지방자치발전위원회 위원 및 제2소위 위원장을 맡고 있다. 조선말 ‘의녀’로 불리는 김만덕 기념사업회 기획총괄위원장이면서 ‘나비박사’로 알려진 석주명 기념사업회 공동대표이기도 하다. 제주특별자치도 출범, 자치경찰 탄생의 이론적 산파 역을 한 게 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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