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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 2주년 특별기획] 격동의 현장-남기고 싶은 이야기(제2화)
양영철 교수가 전하는 '제주근대화의 선구자' 맥그린치 신부 (8)

1961년의 일이다. 우리나라 인구는 약 2500만 명이었다. 제주도 인구는 고작 28만 명. 게다가 맥그린치가 머물렀던 한림마을의 인구는 약 2만 명이었다. 그 마을 사람들의 1인당 소득은 고작 8853원이었다. 무일푼이나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당시 한림 등 제주도 농촌의 거래는 물물교환이 주일 수밖에 없었다.

 

이런 형편일 때의 지역개발은 외부에서 돈을 들여와서 값싼 지역 노동력을 이용하여 어느 한 부분에 집중. 개발을 하고 돈을 벌고 난 뒤 소위 쓰레기(문제점)만 남기고 떠나가는 경우가 다반사다. 이를 학문적으로 말하면 외생적, 노동집약적, 불균형 지역 개발이라고 한다. 미국·영국 등 대자본이 브라질의 커피농장을 매우 싼 값으로 사고 현지의 값싼 노동력을 이용하여 때부자가 되는 사례가 이 경우다. 지역개발론에 자주 소개되는 사례다.

 

 

흔히 "돈이 말을 한다"고 한다. 돈 가진 사람, 돈 투자 한 사람이 돈을 갖게 되는 이치가 자본주의의 기본이다. 지역개발도 외지 대기업이 주도를 하면 개발이익 역시 당연히 이들이 독점할 수밖에 없다. ‘착취적 지역개발’이다. 지역주민들이 지역의 자본과 노동을 이용하여 스스로 개발을 하면 개발이익이 지역주민에게 직접 돌아가게 되고 이는 ‘내생적 개발’이 된다. 그러나 내생적 개발은 사례가 매우 드물다. 가난한 땅이기에 자본과 기술이 없고, 경험이 없기에 소극적이고 의식은 개화되지 않아 ‘내생적 개발’은 꿈으로 남는 것이다.

 

맥그린치 신부의 스타일은 바로 꿈과 같은 ‘내생적 개발’ 방식을 채택한 것이다.

 

맥그린치 신부는 지역에 일자리가 없어서 놀고 있는 노동력, 특히 부지런한 제주 여성의 손을 빌어 밑천으로 만들고 일을 벌였다. 바로 ‘한림수직’이다. 필자의 집에도 아내가 딸이 시집가면 주겠다고 제주KAL 호텔 매장에서 산 한림수직 담요와 스웨터가 그대로 곱게 보관돼 있다. 그걸 살 때는 아마 딸이 다섯 살박이였을 때다. 중학교 교사였던 아내의 봉급에서 일부분을 떼내 산 옷과 담요였다. 명품이었다.

 

그러나 이 명품이 나오기기까진 수많은 애환과 스토리가 있다. 어린 처녀의 죽음에서 시작한다. 가난 때문에 중학교도 못 간 순임이라는 소녀신자가 부산 공장 일터로 간다고 맥그린치 신부에게 인사하고 간 지 채 3개월도 안 돼 싸늘한 주검으로 되돌아왔다. 그 소녀가 공장의 물통에 추락, 숨졌다는 것이다. 너무도 가난한 땅 제주에서 먹고 살 길이 없어 돈을 벌러 전국 각지로 제주사람들이 떠나던 시절의 얘기다. 가난하고, 게다가 4·3의 상처가 가시지 않은 제주출신들은 숱한 냉대와 설움을 겪었다. 대학선배들은 하숙집 구하기도 어려웠다. 그럴진대 이 소녀가 부산공장에서 받은 학대와 불이익은 얼마나 컸을까? 맥그린치 신부는 가슴이 미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 시절 그는 “그런 일을 만들지 말아야 한다”고 다짐했다.

 

 

 

그러던 그는 우연히 성산포에 들렀다가 면양을 키우는 할아버지를 만났을 때를 떠올렸다. 일출봉에서 면양을 키우는 할아버지 이야기다. 70마리 양을 키우고 있는데 이 양은 일본사람이 키우다가 2차 대전 패전으로 돌아가면서 그 할아버지에게 헐값으로 넘겼던 것이다. 할아버지는 일본사람이 가르쳐 준 방식으로 면양을 키우고 털을 깎아 이불에 쓰는 용도로 팔고 있었다. “벌이는 시원찮지만 하는 수 없이 키운다”는 게 할아버지의 답변이었다.

 

맥그린치는 고향 북아일랜드에서 면양 방목현장을 지켜보며 자랐다. 이불 뿐만 아니라 옷·담요 등을 만들어서 큰 수익을 올리는 것을 보고 자랐다. 그 덕에 면양으로 그는 눈을 돌렸다. 하지만 돈이 없었다. 봉급은 그저 겨우 의식주를 해결할 수준. 처음으로 고향의 가족·친지들에게 도움을 청했다. 면양을 살 돈과 어머니가 쓰던 물레를 보내달라고 편지를 썼다. 식구들은 곧바로 화답했다. 그 돈으로 성산포 할아버지의 면양 35마리를 샀다.

 

키울 곳은 마땅치 않았다. 성당 마당에 가두고 키웠다. 그 이전엔 웬 하얀색 돼지를 끌고 와 성당마당에 키우더니 이제는 면양을 성당마당에 두자 뉴스 감이었다. 역시 주민들은 뒷짐을 지었다. 일본사람들도 시도하다가 실패한 게 면양이란 소리가 뒤따랐다. 코웃음을 짓는 주민들도 많았다. 하지만 어느 덧 면양은 수북한 털을 선사했다. 그러나 실을 뽑고 옷을 만들 실력과 경험을 가진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다. 맥그린치 신부 역시 곁눈질로 보기만 했지 실제로 그런 일은 해 본 적은 없었다.

 

몇 명의 4H클럽 여성을 설득, 밤새도록 같이 공부하고 토론했다. 시행착오를 거듭하며 실을 뽑았다. 일단 양말부터 먼저 만들어봤다. 엉성했지만 어쨌든 첫 작품이라고 생각하니 감개무량했다. 맥그린치 신부는 이 첫 작품을 들고 서울로 갔다. 그것도 명동 한 복판에서 직접 양말을 팔았다. 190cm에 이르는 큰 키의 서양의 미남 청년 신부가 명동 한 복판에서 양말을 파는 모습을 상상이나 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맥그린치는 팔아야 할 사명을 안고 그 자리에 섰다. 면양을 키우고, 털을 깎고, 실을 뽑고, 양말을 짠 그 여성들에게 꿈과 자신감을 갖게 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허사였다. 양말은 단 한 켤레도 팔리지 않았다. 조악한 품질 때문이었다.

 

 

 

실이 굵기가 다르고, 짜는 솜씨도 각양각색이어서 누가 봐도 ‘영 아니다’고 느꼈다. 같은 교구소속인 골롬반 신부 숙소에 가서 사연을 털어놨다. 하나씩 사 달라고 애걸했다. 그렇게 일단 물건을 팔아치웠다. 제주도로 돌아온 뒤 맥그린치는 없는 말을 지어내 둘러댔다. 양말을 짠 여성들에게 “명동 최고의 상품이었다”고 자랑을 늘어놨다. 동료신부에게 떠넘기듯 넘겨 판 돈으로 일당을 줬다. 용기를 불어 넣었다. 훗날 이 실패는 ‘품질이 생명’이란 한림수직의 모토가 돼 성공의 자양분이 됐다.

 

품질을 고민하던 맥그린치는 결국 고향 아일랜드에 다시 손을 벌렸다. 고향에 있는 외방 골롬반 수녀원에사 양모를 잘 짜는 수녀분을 보내달라고 간곡히 빌었다. 세사람이 왔다. 보통 수녀라고 하면 신부를 돕거나 성당과 관련 있는 일만 하는 신앙인으로 알고 있던 주민들은 그들이 양털에서 실을 뽑고 옷과 양말을 능숙하게 짜는 걸 보고 놀랐다. 아일랜드 수녀들도 여성들을 모아 집중교육을 시키기 시작했다. 그때의 교육시설이 1959년 3월에 설립한 직조물(수직물) 강습소다. 이 강습소가 후에 한림수직으로 바뀐다.

 

 

교육은 품질을 일정하게 하기 위해서다. 반드시 교육과정을 이수한 사람만이 한림수직에서 취업을 할 수 있게 했다. 엄격한 교육에다 새 기계가 들어오고, 옷만이 아니라 양말·장갑·담요 등 다양한 제품들이 나오면서 한림수직은 그 명성을 전국으로 넓혀갔다. 몰려드는 수요를 감당하지 못할 정도였다.

 

한림수직에는 직원이 두 형태다. 실제로 물레로 제품을 만드는 여성들은 정규직원이다. 한창일 땐 40명을 넘었다. 또 다른 직원은 일종의 재택근무자다. 양털에서 뽑은 실을 집에 갖고 가 디자인 한 대로 짜서 오는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의 숫자가 무려 1300명에 이를 정도였다. 늘 500명은 있었다. 한림이나 한경면에서 사는 주민에 국한하지 않고 전도 각 지역 여성들을 썼다. 물론 어느덧 한림수직에서 교육 받고 일을 하는 것이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그들이 번 돈으로 대학을 나온 필자의 또래들이 많다. 당시 제주에서 꽤 알아주는 직장이었던 셈이다.

 

 

1954년 제주도에서 방목되던 면양은 기껏 118마리. 그러나 한림수직이 문을 연 1959년에는 524마리로 늘어났다. 한림수직이 최전성기를 구가하던 1995년에는 제주도에 면양이 9377마리였다. 한림수직 수요가 얼마나 폭발적으로 성장했는지를 실감할 수 있다.

 

한림수직 제품들은 나중 우리나라 최고의 명품 브랜드로 인정받아 서울 명동에 있는 조선호텔과 제주시 KAL호텔에 매장을 열었다. 명문집안의 혼숫감은 물론 외국인· 재일동포가 애용하는 호사품이 된다.

 

한 처녀의 비극적 죽음이 맥그린치 신부를 일깨웠고 그런 설움과 비극이 재연되지 않도록 하겠다는 맥그린치의 일념이 신화를 만든 것이다. 그 동기가 부지런한 제주여성을 만나 한국의 명품을 탄생시킨 것이다. 맥그린치 신부의 지도가 더해져 제주여성에게 기술을 안겨줬고, 결국 이 기술과 맥그린치 신부의 경영마인드가 얹혀져 볼품 없던 면양을 황금으로 만들어 주었다.

 

한림수직은 2004년 문을 닫았다. 2000년 이후 수입개방으로 값 싼 중국산 양모제품이 시장에 쏟아진 결과다. 가격 경쟁에서 밀린 이유다. 맥그린치 신부는 막상 문을 닫을 때 모든 시설을 직원들에게 무료로 줄 터이니 운영하라고 권유를 했다. 그러나 더 이상의 계승은 없었다. 맥그린치 신부는 지금도 한림수직에 아로새겨진 제주여성들의 눈물과 땀방울을 기억한다. 그들과 나눴던 가슴 찡한 기억을 그는 지금도 잊지 않고 있다. <글=양영철/ 9편으로 이어집니다>

 

맥그린치 신부는? = 1928년 남아일랜드의 레터켄에서 태어났다. 성 골롬반 외방선교회 사제로 1954년 제주로 부임한 후 지금까지 60년간 제주근대화·경제발전의 견인차 역할을 했다. 성당을 세운 뒤 수직물회사를 만들고, 4H클럽을 만들어 청년들을 교육했다. 신용협동조합을 창립, 경제적 자립의 토대를 만들었고, 양과 돼지 사육으로 시작된 성이시돌 목장은 제주축산업의 기초가 됐다. 농업기술연수원을 설립하고 우유·치즈·배합사료공장을 처음 제주에 만든 것도 그다. 그는 그 수익금으로 양로원·요양원·병원·호스피스복지원과 어린이집·유치원을 세워 가난한 이들을 도왔다. 그 공로로 5·16민족상, 막사이사이상, 대한민국 석탑산업 훈장 등을 받았고 1973년 명예 제주도민이 돼 ‘임피제’라는 한국명을 쓰기 시작했다.

 

 

 

 

양영철 교수는?

 

=제주대 행정학과를 나와 서울대와 건국대에서 행정학 석·박사학위를 받았다. 학위 논문은 “내생적 지역개발에 관한 연구 .” 맥그린치 신부의 제주근대화 모델을 이론적으로 살핀 저술이다. 현재 한국지방자치학회 회장, 대통령 소속 지방자치발전위원회 위원 및 제2소위 위원장을 맡고 있다. 조선말 ‘의녀’로 불리는 김만덕 기념사업회 기획총괄위원장이면서 ‘나비박사’로 알려진 석주명 기념사업회 공동대표이기도 하다. 제주특별자치도 출범, 자치경찰 탄생의 이론적 산파 역을 한 게 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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