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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제주人] 전쟁역사평화박물관 이영근 관장
국가가 버린 아픈 역사 빛을 보게 해…위기에도 역사 발굴 계속

“아버지는 일제 강점기 당시 일본군에 의해 끌려가 갖은 고초를 당하며 전쟁 준비를 위한 갱도를 팠다. 군수품을 실은 마차가 동산을 제대로 넘지 못하자 아버지는 말과 함께 마차를 끌었다. 그런데 일본군은 마차 위에 앉아 더 힘을 내라고 말과 아버지에게 채찍질을 해 댔다.”

 

“아버지는 일본군의 감시와 채찍을 맞으면서 등잔불에 의지한 채 두더지처럼 삽과 곡괭이로 땅굴을 팠다. 땀과 흙먼지가 뒤범벅 됐다. 흙먼지가 묻은 땀을 닦으면 눈이 따가웠다. 햇빛을 보는 날에는 눈이 아파왔다. 아버지는 2년 반 동안 그렇게 일본을 위해 진지동굴을 만들어야 했다.”

 

아버지는 침략자 일본에 억압을 당했던 일을 회상하면 항상 눈물을 흘렸다. 그 눈물을 보고 자란 아들은 아버지를 위해, 아버지 세대를 위해 무언가를 해야겠다고 늘 생각했다.

 

아들은 성장해 아버지가 당한 고통의 현장에서 아픈 역사를 잊지 말자고 박물관을 지었다. 가진 재산을 모두 쏟아부으면서도 ‘우리 선조들이 왜 고통을 겪어야만 했는지,  다시는 그런 역사가 되풀이 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후손들에게 전해야 하는 일념 하나에서다.

 

2004년 그의 나이 51세. 번듯한 사업가로 성공한 그는 행정에서도 내팽개쳤던 역사의 현장을 복원해 문을 열었다.

 

제주시 한경면 청수리 가마오름에 있는 전쟁역사평화박물관 이영근(59) 관장.

 

 

#가난 딛고 일어난 사업가

 

지금은 고인이 된 이영근 관장의 아버지(2010년 작고)는 가마오름 진지동굴에서 강제노역에 시달렸다. 1943년부터 해방직전까지 일본군에게 착취를 당했다. 23세였다. 당시 제주의 많은 젊은 청년들은 진지동굴 구축을 위해 강제노역을 당했다. 일본이 패망하고 나서야 제주 청년들은 그 고통에서 벗어났다.

 

하지만 찢어지는 가난은 계속됐다. 이 관장의 아버지는 강제노역으로 인해 눈이 멀어 1~2m 앞도 제대로 보지 못할 정도가 됐다. 결국 생계는 그의 어머니가 책임져야 했다.

 

이 관장은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진학조차 못해 1년 동안은 남의 밭에서 일을 해야 했다. 그후 중학교에 진학해 학교 잡일을 하면서 겨우 중학교를 마쳤다.

 

학업은 그걸로 끝이었다. 그는 곧바로 생계를 위해 일터로 나가야 했다. 모슬포까지 나뭇짐을 져 날랐다. 등이 까지고 어깨가 결리는 아픔도 참았다. 1972년 19세가 되던 해에 운전면허 시험을 통과, 면허증을 땄다. 다행히 그는 중학교를 다니면서 신문에 실린 운전 관련 '간이록'을 보고 운전하는 방법을 터득한 터였다. 곧바로 서귀포 시내에 있던 주류 대리점 운전기사를 했다. 당시 서귀포에는 화물차가 5대에 불과했다.

 

돈을 모은 그는 1년 뒤 동료 1명과 함께 화물차 1대를 구입해 사업을 하기 시작했다. 밤낮으로 열심히 일을 했다. 1년 뒤에는 그 화물차의 나머지 지분도 인수해 본격적인 화물차 영업을 했다. 화물차를 10대까지 불렸다. 

 

1987년 서울과 부산, 경기, 인천 등의 뜻있는 사람들과 함께 개별화물을 처음으로 만들어냈다. 제주에서는 그가 맡았다. 처음에는 ‘영세차주 보호협의회’로 출범한 개별화물조합의 3대 조합장까지 맡으면서 그는 사업을 확장했다. 번듯한 회사도 차렸다. 9년 뒤에는 전세버스 회사도 운영했다.

 

 

#아버지의 눈물과 한으로 일궈낸 역사박물관

 

성공한 그는 아버지의 한을 풀어드리기 위해 전쟁역사박물관을 열었다. 당시 북제주군도 외면한 사업이었다. 토지를 매입하고 아버지가 직접 강제노역을 했던 가마오름을 사들였다. 43세가 되던 해인 1996년. 아버지의 얘기를 토대로 가마오름 진지동굴을 조사하고, 막혔던 진지동굴 입구도 찾아냈다. 환경파괴 위험이 있다는 지적에 직접 인력이 들어가 공사를 하고 조사를 했다. 

 

그 동안 사들였던 땅을 정리하고 가마오름에 쏟아부었다. 빚은 점점 늘어났다. 주변사람들은 미친 짓을 하고 있다고 했다. 하지만 그런 말은 그의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아버지가 겪은 고통, 다른 사람들이 모르고 있는 것을 세상에 알려야 한다는 일념이 그를 사로잡았다. 

 

5년여 동안의 조사와 4년여 간의 공사를 마친 그는 드디어 아버지와 아버지 세대의 한을 풀어주기 위한 전쟁역사평화박물관을 개관했다. 이 관장은 박물관 운영에 주력하고 있지만 제대로 된 역사를 후손들에게 알려주기 위한 작업도 끊임없이 하고 있다. 일제 강점기는 그에게는 절대 잊혀지지 않는 아버지의 아픈 과거이지만 후대를 위한 또 다른 역사다.

-왜 전쟁역사박물관을 계획했나?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는 일제강점기 시대에 겪은 강제노역이 한이 됐는지 앉으면 자주 눈물을 흘리며 당시를 얘기했다. 나라를 잃은 설움과 비참함을 느꼈다. 전쟁으로 민간인들도 고통을 받는다는 것도 알게 됐다. ‘힘없는 나라의 비운.’ 그 비운의 시대를 산 아버지 세대를 깊이 느꼈다. 그래서 자식 된 도리로서 아버지의 한을 풀고, 아버지와 같은 시대에 사신 분들의 고통을 알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역사박물관이라는 게 운영이 쉽지 않았을 텐데 왜 직접 하게 됐나?

 

“처음부터 직접 할 생각은 없었다. 사업에 성공하면서 땅을 매입했다. 가마오름 일대도 매입했다. 전세버스 사업을 하면서 일반 관광객들을 대상으로 일본군 전적지를 돌아다니는 역사 투어를 했다. 그 사람들은 한결같이 ‘일본군전적지를 그냥 놔두면 안 된다’고 했다. 그래서 ‘가마오름을 활용해도 되겠다’는 확신을 가졌다. 2001년에 당시 북제주군청에 가서 활용방안이 담긴 계획서를 제출했다. 그러나 담당직원은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 오히려 ‘일본놈이 쓰던 것인데 무슨 소용이 있느냐’며 화를 내고 서류를 던져 버렸다. 그래서 행정에 기대할 게 못 된다고 생각해 개인적으로 나서게 됐다.”

 

 

-가마오름에 진지동굴이 있다는 것을 언제 알았나?

 

“어렸을 때부터 알고 자랐다. 초등학교 3~4학년 때로 기억한다. 친구들과 들어갔다가 나오지 못한 적이 있다. 지푸라기를 갖고 들어갔다. 지푸라기 하나씩 불을 지피고 들어갔는데 길을 잃었고, 지푸라기가 모두 타 땅굴은 어두웠다. 신고 간 검정고무신을 불에 태웠는데 검은 연기가 나서 아버지와 어머니가 찾은 적이 있다. 당시에는 일본군이 살았던 동굴, 전차를 숨겼던 동굴 정도로 불렀다. 또 일본군들이 만든 것으로만 알았다. 그런데 나중에 진지동굴을 찾고 들어갔을 때에는 ‘이것을 어떻게 제주사람이 팠을까. 곡괭이로 파면서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눈 멀고 가난한 아버지를 창피하게 여겼던 어린 시절 나를 원망했다. 아무 죄 없는 아버지는 광란의 전쟁의 낳은 희생자일 뿐이었다. 아버지의 고통을 느꼈다.”

 

-올해 초 박물관이 매각될 뻔했다. 어떻게 된 일인가?

 

“경영난이 악화됐다. 박물관 개관 이후 역사교육장으로 많이 활용이 됐다. 특히 수학여행단이 꼭 찾는 코스가 됐다. 한번 수학여행단이 오면 400~500명 정도 된다. 영상을 보려면 나눠서 봐야 한다. 주변에서 ‘영상관을 제대로 만들어서 보여주면 좋겠다.’라는 의견이 많았다. 영상관 2동을 더 지었다. 2008년 준공과 함께 조류독감이 발생했다. 연이어 신종플루, 구제역이 발생했다. 영상관 2동을 더 지으면서 돈을 끌어다 쓴 터라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악재가 겹쳤다. 수학여행단 방문도 없어지고, 일반 관광객들도 줄어들었다. 감당이 안 됐다. 전세버스 사업을 하면서 번 돈을 쏟아 부었지만, 늘어나는 적자를 감당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사실 사업 초기부터 돈이 많이 들었다. 정책자금도 없어 일반자금으로 쓰다 보니 이자가 눈덩이처럼 불었다. 농지전용허가를 받기 위해서도 1억 원 이상 썼다. 빚은 더욱 늘어났다.”

 

-일본의 한 단체가 매입하려고 했다는데

 

“2005년 대전 국가기록원과 일본 기록원에서 조사를 온 적이 있다. 자료조사를 하던 중 일본 기록원에 없는 기록들이 나왔다. ‘자료 사진을 찍겠다’고 하자 국익에 반하는 것 같아 ‘겉모습만 찍으라’고 했다. 3개월 뒤 일본인 3명이 찾아왔다. ‘자료를 팔아달라’고 했다. ‘말도 안 된다’며 팔지 않았다. 또 3개월 뒤에 그 다른 일본인 2명과 함께 모두 5명이 찾아 왔다. 이번에는 ‘박물관 전체를 팔지 않겠느냐’고 제안을 했다. 이유를 묻자 ‘평화를 위해 동참하고 싶다. 그런데 일방적으로 일본이 나쁜 짓만 한 것처럼 보이는 것이 확실해 일본이 나쁜 짓만 하지 않았다는 것도 보여주려고 한다’고 했다. 따귀를 때려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그러지 못하고 주머니 속에 받은 명함을 손으로 구겨 쥐며 분을 삭였다. 그러던 중 경영난이 악화됐다. 국내를 돌아다니며 인수할 의향이 있는 곳을 찾아다녔다. 재향군인회, 광복회, 일제강점진상조사위, 기업 등등. 하지만 중요성을 인식하면서도 적극적으로 관심을 갖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그 쪽(일본 단체)에 팔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으면 박물관 보전은 물론 나도 어떻게 될지 몰랐다. 대신 조건을 달았다. ‘관장을 시켜 달라’고 했다. 역사 왜곡을 막기 위해서였다.”

 

-언론 보도 후 매각 협상이 중단 됐다. 어떤 변화가 생겼나?

 

“많은 분들이 격려가 이어졌다. 다음(DAUM) 청원 사이트 아고라 ‘희망’에는 3만5000여명이 성금을 모금해 줬다. 또 홈페이지를 통해 많은 분들이 후원을 해줬다. 방문객도 늘었다. 나를 알아보는 관광객들도 늘고, 사인도 해달라고 한다. 제주도와 문화재청도 매입의향을 밝혔다. 그러나 문화재청은 ‘등록문화재’만 국비로 100% 매입할 수 있다고 했다. 나머지는 제주도가 지방비로 매입해야 한다는 것이다. 매각은 쉽지 않다. 감정가격을 문화재청이 인정하지 않으려고 한 것이다. 문화재적 가치를 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최근 가마오름 진지동굴과 유물, 모슬포 전적지 등 5종을 교과서에 등재해 달라고 교과부에 요청했다. 결과는?

 

“14일 교과부에 가서 서명부와 함께 접수했다. 서명은 관람객들이 주로 했다. 5만2000명이 참여해 줬다. 지난해 초부터 받았다. 국내에서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출판사는 중학교 8곳, 고등학교 6곳이다. 그런데 출판사에서는 심의위원회가 있어 접수해도 출판사 심의위원회를 거쳐야 한다. 교과부에서 긍정적으로 밝혔지만 박물관은 상업적인 부분이어서 반영이 힘들 것 같다고 했다. 그래서 가마오름 부분을 빼고 나머지라도 등재될 수 있도록 해달라고 했다. ‘역사교과서 발간은 2~3년 주기로 하는데 현재 중학교는 마감이 됐다’는 말을 들었다. 고등학교는 확실치 않다. 출판사를 찾아다니면서 자료를 제출하고 설명할 것이다. 현장으로 초청하는 설명회도 열 것이다. 늦었지만 중학교 출판사도 찾아다닐 것이다.”

 

-왜 이런 작업을 하는가? 혼자서는 힘들 텐데

 

“독도를 비롯한 일제의 역사왜곡 사태를 보면 우리나라 국민들은 뜨거운 관심을 갖다가 금방 식어버린다. 마찬가지다. 제주의 일본군 전적지를 알림으로써 역사가 왜곡되지 않도록 후세들에게 가르쳐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또 묻혀 아픈 역사가 되풀이 될 수도 있다. 누군가 발 벗고 나서지 않으면 안 된다. 뜻이 맞는 단체가 있으면 함께 하려 한다. 도교육청에도 같이 할 수 있도록 의견을 제시할 것이다. 제주도의회에도 동참할 수 있도록 접촉하고 있다.”

 

-앞으로의 계획은?

 

“일단 박물관이 정상적으로 국가나 지자체에 매각될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다. 그것은 내 힘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제주도와 문화재청의 적극적인 협조 없이는 힘들다. 이것이 끝나면 교과서 등재와 함께 할 일이 많이 남았다. 1903년부터 살았던 분들의 증언록(영상)이 있다. 지금은 돌아가신 분들이 많지만 그분들의 말을 빌려 일본군의 군사유적, 유물들을 찾아내고 정리할 것이다. 또 2008년부터 방문객들이 관람소감을 적은 광목천이 있는데 현재 10km가 넘었다. 휴전선 길이인 155마일만큼 받아 전시할 계획이다. 평화를 염원하는 사람들의 마음이 담긴 이 광목천으로 전쟁의 상처를 덮고 싶다. 하지만 지금은 경영이 악화된 박물관으로 인해 매각과 정상화에 힘을 쏟아야 해서 손도 못 대고 있다.”

 

“평화를 지키는 것에만 주력할 게 아니라 주변 국가들과 함께 평화를 길러야 한다. 지금 우리는 자유와 평화를 누리며 살아가고 있다. 과연 이런 자유와 평화가 자연스럽게 다간 온 것일까? 자유와 평화는 공짜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 이영근 관장

 

 

1944년 중반. 일본이 국가의 유지상 절대 물러설 수 없는 전시국방경계선인 ‘절대국방권’(絶팲國防圈)이 무너졌다. 그해 7월 사이판섬이 함락되고 태평양전쟁의 전황이 불리하게 전개되자 대본영은 일본 본토결전에 대비해서 주요시설의 지하화를 서두른다. 일본 내부에서도 1944년 하반기 들어서야 본격적으로 '마쓰시로(松代) 대본영' 등이 지하화가 시작된다.

이어 일본은 1945년 2월, 제주도에서 ‘결호작전’(決號作戰)을 수행한다. 일본 본토사수를 위해 오키나와 등 일본 6개 지역 외에 제주도를 이용하기로 한 것이다. 그들은 미군 상륙 지점으로 예상됐던 제주도 모슬포 일대를 요새화하고 ‘결7호작전’이라 이름을 붙였다. 작전을 독자적으로 수행할 제58군이 신설됐다. 제111사단, 108여단 등 모두 7만5000여 명의 병력을 두었다. 당시 제주도 인구는 21만여 명 정도였다. 일본군은 이미 1940년대 초에 조선인 노무자들을 징집해 진지를 구축하고 부대를 배치해 미군과의 결전에 대비했다.

 

1944년 봄부터 미군 잠수함이 일본 근해에 진출했다. 일제의 수송선들이 격침됐다. 동남아시아와 남태평양에서의 물자 수송이 어렵게 되자 새로운 보급기지가 절실해졌다. 제주도는 지리적으로 일본 규슈 지방과 중국 남부, 필리핀과 한반도 사시에 놓여 있어 군사전략적인 요충지로 손꼽혔다. 그들은 대정읍 상모리 송악산 해안의 공유수면 절벽에 해안동굴진지를 구축했다. 가미카제(神風) 공격용 비행기가 배치된 알뜨르 비행장과 함께 자살특공대가 배치됐다.

 

※마쓰시로(松代) 대본영

 

일본 도쿄(東京)에서 북서쪽으로 200㎞ 남짓 떨어진 나가노(長野)현은 일본의 대표적인 산악 지역이다. 이곳에 일본 군국주의를 상징하는 중요한 시설이 남아 있다. 마쓰시로 대본영이다.

 

전쟁의 패색이 짙어가던 1944년 일본 군부는 본토에서 본격적인 전쟁이 벌어질 경우 도쿄 방어가 어렵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그 해 11월부터 나가노시 남쪽 지쿠마가와(千曲川)를 끼고 있는 마쓰시로마치(松代町) 일대 12곳에 엄청난 규모의 갱도를 파기 시작했다. 주요 정부 시설과 천황이 사는 황거(皇居)를 이곳 산악 갱도로 옮겨와 전시 수도로 삼을 작정이었다.

 

착공 당시 동원된 일꾼 1만 명 중 징용된 조선인이 7000명. 공사가 본격으로 시작된 이듬해 4월부터는 조선인 1만 명, 일본인 1만 명으로 늘었다. 변변한 착굴 설비 없이 맨손으로 땅 파듯 다이너마이트와 삽으로 진행된 공사는 8월15일 일본의 패망과 함께 중단됐다.

 

최고사령부인 대본영과 황거가 들어설 마이즈루야마(舞鶴山) 갱도는 2.6㎞, 정부 시설과 NHK가 옮겨올 가장 규모가 컸던 조잔(象山) 갱도는 5.9㎞에 이른다. 75%의 공정으로 그친 벌집형 갱도의 전체 길이는 11㎞나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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