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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배의 대상 한라산, 탐라국시대부터 태평성대 기원 제례 봉행
"한라산의 역사 의미 알면 제주와 한라산이 다르게 보일 것"

 

"한라산이 곧 제주도요. 제주도가 곧 한라산이다."

 

제주에서 한라산이 차지하는 비중, 그 중요성을 그대로 표현하는 말이다.

 

화산 폭발로 형성된 섬이 제주인 만큼 한라산은 제주를 낳은 어머니와 같다.

 

동서로 길게 해안까지 뻗은 한라산은 마치 어머니가 자식을 품듯 360여 개의 오름을 비롯해 동굴, 폭포, 초원, 마을, 사람들을 감싸고 있다.

 

제주 어디서든 한라산을 바라보고 수많은 사람이 한라산을 오르지만, 우리는 한라산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 숭배의 대상 한라산의 유래

 

제주 섬 한가운데 약 1950m 높이로 우뚝 솟은 남한(南韓) 최고봉 한라산(漢拏山).

 

한라산이라는 이름은 어디서 온 것일까.

 

조선 시대 관에서 편찬한 지리서인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등 여러 옛 문헌을 보면 한라(漢拏)라고 말하는 것은 '능히 손을 뻗어 은하수를 잡아당길 만하기 때문'(雲漢可拏引也)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한라산 꼭대기에서 손을 뻗으면 은하수(雲漢)에 닿을 만큼 산이 높고 웅장하다는 시적 표현이다.

 

은하수란 뜻을 가진 '한'(漢)과 붙잡는다는 뜻을 가진 '라'(拏)를 합쳐 '한라산'이라 이름 붙였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후대 사람들은 의문을 제기한다.

 

한자가 전해지기 이전부터 이 땅에 한라산은 존재했고, 사람들은 한라산을 불러왔을 텐데 과연 이러한 한자식 해석이 맞겠느냐는 것이다.

 

옛 제주 사람들이 '한라'와 비슷한 발음 '하라' 또는 '카라', '할라' 등으로 부르던 산의 이름을 후대 지식인들이 소리가 비슷한 한자를 빌어 표기한 뒤 한자식 해석을 한 것으로 보는 게 타당하다고 일각에서는 주장한다.

 

한라산의 이름의 유래에 대해서도 다양한 주장이 나온다.

 

1930년 조선불교중앙교무원에서 펴낸 '불교' 제68호부터 제77호까지 실린 백환(白桓) 양씨(陽氏)의 '한라산 순례기'를 보면 한라산이란 말은 하늘을 뜻하는 우리 고어(古語) '한울'과 '산'이 합쳐진 '한울산'에서 비롯된 것이라 설명했다.

 

시인 이은상(1903~1983) 역시 1937년 '탐라기행 한라산'에서 '본시 우리말로는 하늘산이라 부르던 것으로 해석하고자 한다'며 한라산의 이름이 하늘산에서 비롯됐다고 말했다.

 

김공칠 전 제주대 교수는 '탐라어연구'(1999)라는 책에서 한라산의 호칭은 높은 산이나 구름을 뜻하는 칸나(kan-na)에서 유래, k가 h로 변음 과정을 거쳐 큰 산 또는 하늘의 산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고 풀이했다. 그는 고대 제주 언어가 알타이, 아이누 등 북방계열 뿐 아니라 일본 대만 등 남방계열의 영향도 받은 것으로 해석했다.

 

현재로선 어느 주장이 옳다고 단정 지을 수 없다.

 

다만, 예부터 제주 사람들이 하늘 높이 우뚝 솟은 한라산을 숭배의 대상으로 삼았다는 사실은 분명해보인다.

 

제주 사람들 사이에 전해 내려오는 신화, 전설, 민담 등에는 이와 관련한 내용이 많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한라호국신(漢拏護國神)과 관련한 광양당 전설이다.

 

전설을 요약하면 이렇다.

 

옛날 제주도는 뛰어난 인물이 끊임없이 태어나는 명당을 수없이 많이 가진 땅이었다.

 

제주에서 세상을 뒤엎을 인물이 나와 자신을 위협할 것을 두려워한 중국 황제가 호종단(胡宗旦)이라는 풍수사를 보내 명당의 혈(穴)을 끊어 없애라고 명했다.

 

제주의 주요 지혈(地穴)과 수혈(水穴) 등을 거의 끊은 호종단이 배를 타고 중국으로 돌아가는데, 분노한 한라산 신(神)이 매로 변해 폭풍을 일으켜 배를 침몰시키고 호종단을 수장시켰다고 한다.

 

바로 그 지점이 지금의 차귀도 앞바다이다.

 

'차귀도'(遮歸島)란 섬 이름도 '호종단이 중국으로 돌아가는 걸 막은 섬'이라는 뜻이다.

 

이를 가상하게 여긴 조정에서 한라산 신에게 광양왕(廣壤王)이라는 작위를 봉하고, 해마다 양초와 폐백을 내려 제사를 올리게 했다.

 

이런 까닭에 한라산 호국신, 한라호국신이라 불렸다.

 

한라호국신을 모신 신당을 광양당(廣壤堂)이라 했고, 그 터가 지금의 삼성혈 인근에 남아 있다.

 

동국여지승람과 탐라지 등 옛 문헌에는 광양당을 '한라호국신사'로 기록했으며, 사람들은 한라호국신을 지극 정성으로 모셨다.

 

 

광양당은 탐라국(耽羅國) 시대 국당(國堂)으로 여겨졌으며, 이곳에서 나라의 제의가 치러졌다고 한다.

 

'고려사'에는 고종 40년인 1253년 10월 국내 명산과 탐라의 신에게 각각 제민(濟民, 어려움에 처해 있는 백성을 구제함)이라는 호를 내리고 국태민안을 기원하는 산신제를 올리게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때 연구자들은 '탐라의 신'을 '한라산 신'으로 해석하곤 한다.

 

탐라국, 고려에 이어 성리학적 질서를 근본이념으로 삼은 유교국가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도 한라산을 국가 차원에서 중요하게 여겼다.

 

고려사와 조선왕조실록 등에 한라산을 '진산'(鎭山) 또는 '삼신산'(三神山)이라 직간접적으로 표현하는 기록이 나온다.

 

진산은 옛날 변란이 일어나지 않도록 나라와 각 고을을 지켜주는 산을 의미한다.

 

진산은 국가의 보호 대상이었으며, 홍수와 가뭄, 전염병, 재앙 등을 막기 위해 제사를 지내는 대상으로, 고려에 이어 조선시대에도 그대로 이어졌다.

 

또 삼신산은 중국 제(齊)나라 때부터 신선들이 사는 이상향이자 불로초가 자생하는 것으로 믿었던 공간으로 봉래·방장·영주산을 뜻한다. 우리나라에선 조선 때부터 봉래산은 금강산(金剛山), 방장산은 지리산(智異山), 영주산은 한라산(漢拏山)으로 여겼다.

 

이 모든 기록과 사람들의 믿음은 바로 한라산을 신성시했기 때문에 비롯된 것이다.

 

 

◇ 한라산신제 전통의 계승

 

"국왕은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 김상헌을 보내 한라산 신령께 제사를 드립니다. (중략) 탐라의 진산이 되어 남쪽 끝자락 절경을 이루었습니다. 천신의 권능을 빌어 우리 백성을 도우시니 전염병의 재앙이 없고 풍우가 때를 맞추어 곡식과 삼이 두루 자라고 축산이 번성합니다. (중략) 큰 난리가 일찍 끝났으니 신령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어찌 이렇게 될 수 있었겠습니까. 이에 마땅히 사신을 보내 경건히 아룁니다." (김상헌 '남사록')

 

선조 34년 1601년 음력 9월 25일 새벽.

 

왕명을 받아 안무어사(安撫御史) 신분으로 제주에 온 김상헌이 한라산 백록담에서 제사를 봉행했다.

 

김상헌은 두 달 전 제주에서 발생한 '소덕유·길운절 역모사건'으로 인해 불안한 민심을 진정시키기 위해 제주에 파견된 터였다.

 

'소덕유·길운절 역모사건'은 모반을 꾀한다는 죄목으로 죽임을 당한 정여립의 처사촌인 소덕유가 제주에 유배 온 뒤 유배자 신분인 길운절과 역모를 모의한 사건이다.

 

김상헌은 역모사건의 뒷수습을 하는 여러 임무를 부여받았는데 그 중 하나가 한라산 신께 제사를 올리는 것이었다.

 

당시 제문(祭文)을 보면 나라와 제주의 무사안녕이 한라산 덕분임을 칭송하며 그로 인해 역모사건의 음모가 일찍 드러나 난을 평정할 수 있었다고 밝히고 있다.

 

국가 차원에서 한라산을 '진산'으로 인정하며 중히 여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한라산에서 치러지는 제사는 '고려사'와 '조선왕조실록' 등에 수십차례 등장한다.

 

 

'한라산신제'(漢拏山神祭)다.

 

한라산신제는 탐라국 시대부터 시작돼 고려 후기인 1253년 태평성대를 기원하는 제례로 발전했다.

 

엄밀히 말해 기록에만 나오지 않을 뿐 한라산이 신앙의 대상으로 신격화한 고대사회 때부터 한라산에 대한 제사의식(祭儀)은 이어왔을 것으로 보인다.

 

다만 시대에 따라 민간 차원의 무속신앙, 국가 차원의 제사, 이어 조선에 들어서는 유교식 제사로 변형이 이뤄졌던 것이다.

 

한라산신제는 전통적으로 백록담 북쪽 기슭에서 봉행됐다.

 

과거 봄과 가을에 이뤄지다 후에 정월(正月)·2월·7월에 정기적으로 행해지는 것으로 바뀌었다.

 

또 기근과 가뭄, 변란 등이 있을 때마다 수시로 제례가 봉행돼왔다.

 

1470년(성종 원년) 이약동이 제주목사로 부임하면서 제례 장소가 현재의 제주시 아라동 산천단으로 옮겨졌다.

 

한라산신제를 봉행하기 위해 한라산 백록담에 오르는 과정에 얼어 죽는 사람이 많아 주민을 보호하는 차원에서 제단을 옮긴 것이다.

 

그런데도 정성을 다하기 위해 백록담에서 치러지는 일이 있었다.

 

한라산신제는 일제강점기인 1908년 민족문화 말살정책으로 중단됐다가 해방 이후 1950년 후반에 산천단 주민들에 의해 부활했다.

 

 

지난 2009년부터 산천단이 위치한 아라동 차원에서 제례를 봉행했으며 이듬해인 2010년 한라산신제 봉행위원회 주관으로 산신제를 지내고 있다.

 

2011년 5월에는 산천단에 있는 한라산신고선비 3기와 제단 2기 등이 '한라산신제단'이라는 이름으로 제주도기념물 제67호로 지정됐다.

 

이듬해 1월 열린 한라산신제봉행위원회 정기총회에서는 제례 봉행 일이 일정하지 않다는 지적에 따라 한라산신제를 매년 입춘 후 두 번째 정일에 봉행하기로 결정했다.

 

정일이란 '천간(天干)이 정(丁)으로 된 날'을 말하며 '손(損)이 없는 날'로 알려져 예부터 상정일(上丁日), 중정일(中丁日), 하정일(下丁日) 중 하루를 잡아 각종 제례를 지내왔다.

 

2012년 12월에는 한라산신제를 보존하고 육성하기 위한 '제주특별자치도 한라산신제 봉행위원회 지원 등에 관한 조례'가 제정됐다.

 

조례에 따라 제주도지사는 제례의 초헌관을 당연직으로 맡도록 규정하고 있다.

 

2020년부터 전세계적으로 유행한 코로나19 팬데믹으로 한라산신제 봉행이 취소되거나 봉행일이 늦춰져 6월 또는 10월에 개최된 바 있다.

 

엔데믹(endemic·풍토병으로 굳어진 감염병) 시대에 접어들면서 제주도 세계유산본부는 올해 가급적 3월 말 봉행하는 것으로 한라산신제봉행위원회와 조율하며 전통을 계승하고 있다.

 

한라산을 연구한 임재영 박사는 "한라산에서 치러진 제사는 산신제이자 하늘을 여는 천신제의 의미을 지니고 있으며 한라산 산신은 천신의 권능을 빌려 제주 백성들을 지켜주는 산신이자 하늘의 기운과 풍운뇌우를 조절하는 산신, 전염병의 재앙을 막아주고 비와 바람을 관장하고 있는 산신으로 여기는 의식을 볼 수 있다"며 "한라산의 역사와 한라산신제의 의미를 알면 제주와 한라산이 다르게 보일 것"이라고 말했다. [연합뉴스=변지철 기자]

 

[※ 이 기사는 '국가의 한라산 인식과 이용·관리에 대한 변천 연구'(임재영), '한라산 이야기'(글·사진 강정효), '제주, 아름다움 너머'(강정효) '제주의 이야기유산'(제주도, 제주연구원 제주학연구센터) 등 책자와 논문을 인용·참고해 한라산과 한라산신제의 유래를 소개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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