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의힘을 이끌 새 선장에 한동훈 전 비상대책위원장이 선출됐다. 한 신임 대표와 함께 '친한(친한동훈)계' 최고위원 2명도 지도부에 입성했다. 한 대표는 23일 경기 고양 킨텍스에서 열린 전당대회에서 당원 투표와 일반 국민 여론조사를 합산한 결과 과반인 62.84%(32만702표)를 득표, 결선투표 없이 승리를 확정했다. 원희룡 후보는 18.85%(9만6177표), 나경원 후보는 14.58%(7만4419표), 윤상현 후보는 3.73%(1만9051표)의 득표율을 각각 기록했다. 대표 선거와 별도로 1인 2표 방식으로 치러진 최고위원 선거에서는 장동혁·김재원·인요한·김민전 후보가 당선됐다. 45세 미만 청년최고위원에는 진종오 후보가 선출됐다. 장동혁 수석최고위원과 진종오 청년최고위원은 한 후보의 러닝메이트다. 인요한 최고위원은 원희룡 후보의 러닝메이트로서 '친윤(친윤석열)계'로 분류된다. 한 대표는 수락 연설에서 "민심을 어기는 정치는 없다"며 "국민의 마음과 국민 눈높이에 더 반응하자"고 말했다. 또 "건강하고 생산적인 당정관계와 합리적인 토론을 통해서 민심을 정확히 파악하고 그때그때 때를 놓치지 말고 반응하자"고 강조했다. 아울러 "저를 지지하지 않았던 분들
국민의힘 새 대표로 한동훈 후보가 선출됐다. 한 후보는 23일 경기 고양 킨텍스에서 열린 전당대회 대표 경선에서 당원 투표와 일반 국민 여론조사를 합산한 결과 과반인 62.8%를 득표, 결선투표 없이 승리를 확정했다. 원희룡 후보는 18.8%, 나경원 후보는 14.6%, 윤상현 후보는 3.7%의 득표율을 각각 기록했다. 최고위원에는 장동혁·김재원·인요한·김민전 후보, 청년최고위원으로는 진종오 후보가 선출됐다. [연합뉴스]
대학로 소극장의 상징 '학전'을 30여년간 운영하며 후배 예술인을 배출해 온 가수 김민기가 위암 투병 끝에 21일 별세했다. 향년 73세. 김민기의 조카이자 학전 총무팀장인 김성민 씨는 22일 서울 대학로 학림다방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댁에서 요양 중이던 선생님(김민기)의 건강이 지난 19일부터 조금 안 좋아졌고 20일 오전 응급실을 찾았다"며 "병원에 갔을 때부터 상태가 좋지 않아 다음 날 오후 8시 26분에 돌아가셨다"고 밝혔다. 김씨는 고인이 눈을 감기 직전 유언이 없었느냐는 질문에 "갑작스럽게 떠나셨지만 3∼4개월 전부터 가족 등 가까운 사람들에게 고맙다는 말을 많이 하셨다"며 "학전과 관련해선 '지금 끝내는 게 맞다. 나는 할 만큼 다 했다'고 말씀하셨다"고 전했다. 이어 "선생님은 배우 설경구, 장현성 씨가 와도 '밥은 먹었냐'고 하실 분"이라며 "(평소 성격을 미뤄) 가족들과 상의한 끝에 조의금과 조화를 받지 않기로 했다"고 말했다. 김민기는 1951년 전북 익산에서 10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경기중·고등학교를 다닐 당시 미술에 몰두했던 학생이었으나 1969년 서울대학교 회화과에 입학한 뒤 붓을 놓고 가수의 길로 접어들었다. 획일적인 수업 방
조 바이든 대통령이 21일(현지시간) 민주당 대선 후보직에서 사퇴하면서 미국 역사상 현직 대통령이 당내 대선 후보 경선에서 승리한 뒤 사퇴하는 초유의 사례로 남게 됐다. 미 CNN 방송은 이날 "미국 현역 대통령이 재선 선거운동을 포기한 선례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드물다"고 보도했다. CNN에 따르면 재선 도전에 나섰던 현직 대통령이 당내 경선에 나섰다가 포기한 가장 최근의 사례로는 1952년과 1968년이 꼽힌다. 한국전쟁 당시 미국 대통령이었던 민주당 소속 해리 S. 트루먼 당시 대통령은 1952년에 재선에 도전했으나, 지지율 하락으로 경선 초기인 뉴햄프셔 프라이머리(예비선거)에서 기대에 못 미치는 성적을 거두자 그해 3월 "나는 후보 재지명을 받아들이지 않겠다"며 출마 포기를 선언했다. 1968년 당시 대통령이었던 민주당의 린든 B.존슨도 재선에 도전했으나 트루먼 전 대통령과 비슷한 결말에 이르렀다. 존슨 대통령은 미국에서 베트남전 반대 기류가 확산하며 지지율이 크게 떨어졌고, 그해 3월 12일 뉴햄프셔 프라이머리에서 경쟁자인 유진 매카시 상원의원과의 표차가 기대보다 적게 나타나자 3월 말 연설에서 재선에 나가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따라서 바이든 대통령
15일 아침 제주시 추자면 신양리 신양분교 운동장은 고요했다. 기다란 단층 건물 오른편에 2층 건물이 증축된 것 같은 학교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교실은 대충 10개쯤 되어 보였다. '꿈과 끼를 마음껏 펼치는 행복한 학교'라고 적힌 현판 아래 연구실에서 이 학교의 유일한 교사인 이정래 선생은 현재 재학생이 4학년 여학생 1명뿐이라고 말했다. 이 여학생은 원래 하추자도 신양리 출신이지만 또래 학생들과 어울리기 위해 다리로 연결된 상추자도에 있는 추자초에 진학했다. 하지만 휴교 위기에 놓인 신양분교의 사정을 고려해 다시 분교로 전학한 것으로 알려졌다. 신양분교 재학생 한 명이 졸업하면서 학생이 없어 휴교 위기에 처하자 이 학생이 '억지로' 옮겨와 다시 분교 명맥을 유지하게 됐다. 이 선생은 "작년에 새로 부임한 마을 교회 목사의 딸이 전학을 왔으나 지난주에 목사가 다른 곳으로 부임하면서 그 6학년 학생이 전학을 갔다"고 설명했다. 이 학교는 원래 신양국민학교(초등학교)로 설립됐고, 학생 수가 가장 많았던 1969년 재학생은 565명에 달했다. 그러나 해마다 재학생이 줄면서 1999년 추자초 분교장으로 격하됐다. 제주도의 부속 섬 가운데 두 번째로 큰 섬인 추자도
'집 떠나와 열차 타고 훈련소로 가는 날…' 김광석의 대표곡 '이등병의 편지'는 입대하는 까까머리 젊은이들과 연인, 가족의 심금을 꽤나 울렸던 노래다. 노래에 등장하는 훈련소로 논산훈련소('육군 제2훈련소'에서 '육군훈련소'로 개칭)를 떠올리는 사람은 많지만, 제주에 '원조' 훈련소가 있었던 사실을 기억하는 이는 드물다. 과거 6·25 전쟁 당시 50만 장병을 양성했던 제주 '육군 제1훈련소'다. ◇ "제주서 강한 신병 양성 훈련소 초석 다져" 제주 서귀포시 대정읍 상모리의 한 교차로. 차들이 오가는 도로 양옆으로 높이 3.7m, 가로·세로 2.5m 크기의 시멘트 기둥이 나란히 서 있다. 두 기둥의 간격은 17m 정도다. 갈라지고 금이 간 기둥과 현판을 걸어뒀던 것으로 보이는 녹슨 철근은 오랜 세월의 흔적을 담고 있었다. 기둥의 정체는 옛 제주 육군 제1훈련소 정문이다. 지난 2021년 11월 국가 등록문화유산으로 고시됐다. 2008년 국가 등록문화유산으로 기존 등록된 '제주 구 육군 제1훈련소 지휘소'에 정문을 추가해 '제주 구 육군 제1훈련소 지휘소와 정문'이라는 명칭으로 새롭게 등록됐다. 도로 한복판에 덩그러니 남은 2개의 시멘트 기둥, 인근에 몇 안되
24일 30명의 사상자를 낸 경기 화성 일차전지 제조업체 아리셀 공장 화재가 22시간여 만에 완전히 진화됐다. 경기도소방재난본부는 25일 오전 8시 48분을 기해 아리셀 공장 화재 진화 작업을 마쳤다고 밝혔다. 소방당국은 상황 판단 회의 결과 연기가 보이지 않아 화재가 재발할 위험이 없다고 보고 이 같이 판단했다. 다만 현장에서 실종자를 찾기 위한 수색은 이틀째 계속되고 있다. 소방당국은 조명등이 설치된 조연 차량 3대를 화재 현장 인근에 세워두고 연락이 두절된 1명을 찾기 위해 공장 내부에서 밤샘 수색 작업을 벌였다. 소방당국은 이날 인원 100여명과 구조견 두 마리를 투입해 실종자를 찾을 때까지 인명 수색을 계속한다는 방침이다. 수색 과정에서 2차 사고가 없도록 예방 대책도 철저히 할 계획이다. 앞서 화재 현장에 내려졌던 비상 발령은 이날 0시 42분을 기해 해제됐다. 경기도소방재난본부는 공장 화재 발생 9분 만인 전날 오전 10시 40분께 대응 1단계(3∼7개 소방서에서 31∼50대의 장비를 동원하는 경보령)를 발령하고, 오전 10시 54분께 비상 발령을 대응 2단계(8∼14개 소방서에서 51∼80대의 장비를 동원하는 경보령)로 확대한 바 있다. 소방당
경기 화성시 소재 일차전지 제조업체인 아리셀 공장에서 24일 화재가 발생해 다수의 인명피해가 우려되는 가운데 20명이 넘는 직원이 여전히 연락 두절 상태다. 이날 경찰과 소방당국 등에 따르면 화재 발생 4시간여가 지난 오후 2시 30분 현재 연락이 닿지 않는 아리셀 공장 근로자는 총 21명이다. 불은 아리셀 공장 11개 동 중 3동 2층에서 발생했다. 3동에서 일한 근무자는 67명으로, 화재 당시 1층에서 15명이, 2층에서 52명이 각각 있었던 것으로 파악됐다. 이 중 21명이 불길을 미처 피하지 못한 채 건물 내부에 고립된 것으로 소방당국은 추정하고 있다. 현재까지 파악된 인명피해는 사망 1명, 중상 2명, 경상 4명이지만, 향후 인명피해 규모가 상당히 늘어날 가능성이 있다. 사망자는 60대 남성이며, 발화 지점인 3동 2층에서 발견됐다. 이 밖에 부상자 6명 역시 30~60대 남성으로 알려졌다. 지금까지 나온 사상자는 모두 한국인이다. 소방당국은 공장 안으로 진입해 실종자를 수색하는 데에 집중할 방침이다. 앞서 이날 오전 10시 31분 화성시 서신면 전곡리 소재 아리셀 공장 3동에서 불이 났다. 이 공장 3동에는 리튬 배터리 완제품 3만 5천여개가 보관
제주 유일의 승전사 을묘왜변(1555년) 이후 40년이 채 안 돼 발발한 임진왜란(1592∼1598년). 조선을 거쳐 중국을 집어삼키려는 일본의 침략 야욕으로 인해 7년간 한반도 전체가 전쟁터가 됐고, 온 국토는 황폐해졌다. 조선의 백성 절반 가까이가 목숨을 잃었던 참혹한 전쟁이었지만 불행 중 다행히도 제주도는 무사할 수 있었다. 6월 호국보훈의 달을 맞아 임진왜란 당시 제주가 무사할 수 있었던 이유와 당시 제주의 숨은 영웅들을 알아본다. ◇ 임진왜란 속 제주의 숨은 영웅들 1592년 임진년 봄 임진왜란이 발생했다. 일본은 부산에서 한양까지 최단 거리로 진격해 조선의 왕을 사로잡고 전쟁을 단숨에 끝내려 했다. 4월 13일 부산에 상륙한 왜군은 조선군을 격파하며 파죽지세로 북상, 20일 만인 5월 3일 한양에 무혈 입성했다. 사흘 전 선조가 의주로 피난 간 뒤였다. 일본의 당초 계획대로 되지 않은 전쟁은 결국 장기전에 돌입했다. 임진왜란 초기 제주가 무사할 수 있었던 것은 일본의 침공 우선순위에 제외됐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왜군이 언제 들이닥칠지 모르는 상황에서 제주 백성들은 공포에 떨어야 했다. 당시 제주 섬 전체를 책임지고 다스렸던 목사(牧使)는 이경록이었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이전인 1555년 을묘년 조선 건국 이래 최대 규모의 왜구가 우리나라를 침입했다. 제주와 전남에서 발생한 을묘왜변이다. 전남 영암을 중심으로 왜적의 침임이 시작됐지만, 결과적으로 이들을 무찌르고 왜변을 마무리 지은 곳은 제주였다. 이 승리를 '을묘왜변 제주대첩'이라 부르고, 제주 유일의 승전사로 입에 오르내린다. 6월 호국보훈의 달을 맞아 제주 백성이 힘을 합쳐 왜적과 싸워 이긴 제주 유일의 승전사 '을묘왜변 제주대첩'의 의미를 알아본다. ◇ 70명의 날랜 군사와 치마돌격대로 왜구 격퇴 1555년 6월 21일 왜선 40여척이 제주 앞바다에 모습을 드러냈다. 한 달 전 전라남도 남해안 일대를 침략, 영암과 진도·강진·장흥 등에서 약탈과 노략질을 일삼았던 왜구들이었다. 이들은 전라도에 큰 피해를 주고도 모자라 일본으로 돌아가는 대신 제주로 눈을 돌렸다. 애초 70여척에 달했던 규모는 다소 줄었지만, 조선 개국 이후 제주를 침략한 가장 큰 규모의 왜구였다. 을묘왜변 제주대첩의 서막이 올랐다. 며칠간 정탐을 벌인 끝에 왜구 1000여명은 6월 27일 제주 화북포로 상륙, 곧바로 제주성으로 쳐들어왔다. 전투는 동성(東城)을 중심으로 전개됐다. 제주
제주 관광업계가 항공편 좌석 감소와 '비계 삼겹살' 논란, 고물가 등 부정적 이미지로 시름이 깊다. 1일 한국공항공사 통계에 따르면 올해 들어 지난 4월까지 제주∼김포 항공노선 편수는 6만1096편으로 집계됐다. 이는 2022년 1∼4월 7만3111편에 비해 16.4%(1만2015편) 감소한 것이다. 2022년에는 코로나19 팬더믹으로 해외여행이 제한되자 여행객들이 발길을 대거 제주로 돌리면서 제주 관광업계가 특수를 누렸다. 제주∼김포 노선 운항 편수는 2021년 1∼4월 6만1159편, 지난해 1∼4월 6만2539편이다. 올해 같은 기간(1∼4월) 운항 편수는 2021년 대비 63편(0.1%), 2023년 대비 1443편(2.3%) 줄어들었다. 연도별 제주∼김포 노선 운항 편수를 보면 2023년 19만1065편으로 2022년 21만6445편에 비해 11.7%(2만5380편) 감소했다. 2021년 21만2690편과 비교하면 10.2%(2만1625편)가 줄어들었다. 제주∼김포 노선은 국내선 항공편 중 가장 많은 비행기가 투입된다. 항공사들은 코로나19 팬데믹 종료 이후 해외여행 수요가 되살아나자 제주 출발·도착 항공편 좌석을 국제선으로 대거 돌렸다. 이로인해
제주를 여행하다 보면 곳곳에 말고기 식당이 눈에 띈다. 오늘날 말고기가 소고기·돼지고기·닭고기처럼 대중화된 음식은 아니지만 말의 고장 제주에서만큼은 점차 향토음식으로 자리 잡으며 인기를 끌고 있다. 제주의 말고기 식용의 역사와 문화에 대해 알아본다. ◇ 알다가도 모를 제주의 말고기 식문화 언제부터 제주에서 말고기를 먹었던 것일까. 제주 신화를 통해 예부터 제주에 말고기 식용 문화가 있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농경신이 된 자청비의 이야기를 담은 '세경본풀이'(제주에선 '신화'를 '본풀이'라 일컫는다)를 보면 자청비의 하인인 '정수남'이 아홉마리의 소와 말을 몰래 먹는 내용이 나온다. 이외에도 소와 말, 돼지 등을 먹는 육식신(肉食神)과 그렇지 않은 미식신(米食神)이 등장하는 여러 제주 신화를 보면 먼 옛날부터 말고기를 먹었던 것으로 보인다. 농경사회에 들어서면서 말고기를 먹는 일이 크게 줄었지만, 고려 시대 몽골식 목마장이 들어서면서 제주 중산간 지역을 중심으로 몽골식 도살법과 요리법이 전해졌다. 고려말 조선 초기에는 말과 말가죽 교역으로 생계를 유지하기도 했고 도축 과정에 나온 고기를 먹었다. 제주에서 말은 농사의 중요한 수단이었기 때문에 제주 사람들은 웬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