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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회의 '영화로 읽는 한국사회' - 브이 포 벤데타 (2)

영화 ‘브이 포 벤데타’의 주인공은 V라는 신비로운 인물이다. 주인공이지만 ‘얼굴’이 없다. 첫 등장에서 마지막 죽음까지 마스크 속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다. 영화 주인공의 캐릭터를 V가 쓰고 있는 마스크의 상징성으로 유추하는 수밖에 없다.

 

V의 마스크는 가이 포크스(Guy Fawkes)의 얼굴을 형상화하고 있다. 하얀 얼굴에 볼은 분홍빛이다. 콧수염은 양쪽으로 치켜 올라가 있고, 턱수염 역시 아래로 날카로운 칼처럼 내리꽂혀 있다. 웃는 얼굴 같기는 한데, 어쩐지 웃고 있는 것 같지 않은 기묘한 느낌이다.

영화의 ‘얼굴’ 역할을 하는 가이 포크스라는 인물은 1605년 영국 제임스 1세의 가톨릭 탄압 정책에 항거해 그를 암살하기 위해 영국 국회의사당 상원 건물을 국회 개원 날 폭약으로 ‘날려 버리려 했던’ 무척이나 과격했던 인물이다. 

감히 국왕과 영국 귀족들을 일거에 날려버리려 어마어마한 양의 폭약을 의사당 건물 지하에 쌓아놓았다가 적발됐으니 그 처벌 수위가 어떠했을지는 짐작이 간다. 그에겐 ‘Hanged, Draws, Quartered(목매달고, 끄집어내고, 토막내기)’라는 설명하기조차 끔찍한 왕정 시대 영국법이 정한 최악의 형벌에 처해진다.

일단 교수형에 처하는데, 숨이 끊어지기 전에 내려서 의식이 있는 상태에서 배를 가르고 내장과 심장을 적출한 다음 머리를 자르고 도끼로 시신을 네토막 내서 전국에 나눠 보내 전시하는 형벌이다. ‘상상도 해선 안 될’ 반란죄를 상상할 수도 없는 형벌로 대응했던 거다.  

이 꼴을 보고도 반란을 꿈꾼다면 실로 대단한 강철 멘털의 소유자일 듯하다. 여기에 비하면 같은 반란죄를 저지른 범죄자라도 망나니가 한바탕 칼춤을 추고 단칼에 목을 베는 우리네의 ‘참형斬刑’은 대단히 신사적이다. ‘신사의 나라’는 대영제국이 아니라 조선이었던 듯하다.
 

이후 영국 정부는 가이 포크스의 화약폭파 음모사건을 저지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매년 11월 5일 ‘가이 포크스의 밤’을 열어 밀짚으로 만든 가이 포크스의 인형을 불태우고 불꽃놀이를 했다.

이것이 차츰 변질되더니 11월 5일은 지금처럼 가이 포크스를 추모하고 독재정권을 향한 항거 의지를 다지는 날로 바뀌었다. 제임스 1세 정부의 의도와는 정반대로 흘러가 버린 셈이다. 가이 포크스를 정부가 기억하길 원하는 대로 기억하지 않고 자신들이 기억하고 싶은 대로 기억한 17세기 영국시민들이 존경스럽기도 하다.

영화 속에서도 오늘날까지 불리는 영국 동요가 나온다: “Remember, remember, the Fifth of November, Gunpower treason and plot; For I see no reason Why Gunpower Treason should be forgot(기억하라, 기억하라 11월 5일을, 화약폭발 반란을, 그 사건이 잊힐 이유가 없다).” 

영화 속에서 V는 마스크 속 자신의 얼굴을 궁금해하는 이비(Eveyㆍ나탈리 포트먼)에게 말한다. “마스크 속 내 얼굴은 아무 의미 없는 살덩이일 뿐이다. (가이 포크스의) 마스크 속에 담겨 있는 것은 그의 신념이다. 사람은 죽일 수 있지만 신념은 죽일 수 없는 것이다.” 영국 시민들은 아마도 V의 말처럼 가이 포크스의 ‘신념’을 기억해 가면서 세계에서 가장 앞선 민주주의 국가를 건설해 나갔는지 모르겠다.

그렇게 가이 포크스의 마스크는 ‘나쁜 권력’에 항거하는 자유시민의 상징으로 거듭나 전세계 시위 현장에 등장한다. ‘나쁜 권력’에 불복종하는 시민운동을 전개하고 해킹을 통해 국가기관과 단체들에 압력을 행사하는 ‘어나니머스(Anonymous)’ 운동의 상징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세계적인 사조(思潮)를 놓칠 리 없는 우리나라 시위 현장에서도 가이 포크스의 마스크는 심심치 않게 등장한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서 시민 불복종과 저항의 상징이 ‘가이 포크스’여야만 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우리 역사에서 찾을 수 없어 ‘외국의 예’를 가져다 쓰는 건 이해하겠지만, 멀쩡한 우리 얘기를 놓아두고 쓰는 외국 예는 마뜩잖다. 
 

부당하고 포악한 권력에 분노하고 저항하다 처형당했던 1894년 동학운동의 지도자 전봉준을 제쳐두고 왜 저 머나먼 나라의 가이 포크스인지 모르겠다는 거다. 누군가의 말처럼 ‘National Memorial Park’라고 쓰고 ‘내셔널 메모리얼 파크’라고 읽으면 쿨하고 ‘국립 추모공원’이라고 쓰고 읽으면 왠지 촌스러워서 그런가.

17세기 영국 시민들이 신념의 자유를 억압하는 국가 권력에 저항한 ‘가이 포크스’의 기억을 소중하게 간직했듯이, 우리도 저급하고 난폭한 권력에 저항했던 ‘전봉준’의 신념을 잊지 않고 간직했다면 어땠을까. 지금 우리 사회가 지금보다는 더 나아지진 않았을까. 

적어도 부당한 권력에 항거하는 우리 사회의 시위 현장에선 조금은 뜬금없는 가이 포크스의 마스크 대신 맨상투에 결의와 분노에 찬 전봉준의 마스크를 보고 싶다. 전봉준은 대전에서 서울로 압송돼 1895년 4월 23일 사형선고를 받고 다음날 4월 24일 새벽 교수형에 처해졌다. 

영국인들은 가이 포크스가 처형당한 11월 5일을 ‘가이 포크스의 밤’으로 기념하는데, 전봉준의 4월 24일을 기억하는 한국인은 아무도 없는 듯하다. 그렇게 가이 포크스는 죽어도 그의 신념은 살아남았는데, 전봉준은 사형장에서 사라지면서 그의 신념까지 사라진 듯해서 안타깝다. [본사 제휴 The Scoop=김상회 정치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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