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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회의 '영화로 읽는 한국사회' - 브이 포 벤데타 (10)

영화의 마지막에 이르러 V는 마침내 필생의 사업으로 삼았던 영국 국회의사당 폭파를 마무리 짓는다. 참으로 당황스러운 장면이기도 하다. 파시즘과 전체주의를 홍보하는 국영방송사를 폭파하는 것까지는 수긍할 수 있지만 ‘자유민주주의’의 상징인 영국 웨스트민스터 사원까지 날려버리는 장면은 뜻밖이다. 

 

 

V는 영국 국회의사당인 웨스트민스터 사원 지하를 통과하는 지하철 열차에 화약을 가득 실어 출발시킨다. 영국 국회의사당이 폭발하는 순간 밤하늘을 덮은 폭죽은 그대로 아름다운 축제의 불꽃놀이가 된다. 런던의 밤거리에 모여 영국 국회의사당을 날려버린 불꽃놀이를 바라보는 시민들의 얼굴엔 기쁨의 미소가 번진다. 

‘빅 벤(Big Ben)’ 시계탑으로 유명한 영국 국회의사당인 웨스트민스터 사원은 누가 뭐래도 워싱턴의 미국 국회의사당과 더불어 세계 자유민주주의를 상징하는 양대 기념물이다. 마블에 등장하는 최악의 빌런이 아니고서야 인류의 오랜 염원을 담은 숭고한 자유민주주의를 상징하는 조형물을 저토록 증오하고 조롱할 수 있을까. 

빌런이 아니라 ‘우리들의 영웅’으로 그려진 V가 자유민주주의의 상징을 날려버리고, 시민들은 그 모습에 비로소 안도하고 새 희망의 미소를 짓는 영화 속 장면은 자못 기이하다. 왜 그랬을까.

자유라는 말은 대단히 ‘문제적’이다. 자유라는 개념은 플라톤의 ‘동굴의 우화’와도 같다. 한 사람이 햇빛이 들어오는 동굴 입구를 등지고 앉아 벽만 바라보고 있다. 동굴 앞을 한 사람이 지나간다. 벽에 비치는 그 사람의 모습은 실체와는 다르다. 햇빛에 따라 거대한 괴물로 비칠 수도 있고, 조그마한 토끼로 비칠 수도 있다. 날이 흐리면 있어도 없는 존재가 되기도 한다. 우리는 그 실체를 보지 못한 채 그 실체가 만들어내는 온갖 그림자만 보고 그 실체를 안다고 생각할 뿐이다. 
 

 

자유라는 말도 그와 같다. 분명 실체가 있겠지만, 아무도 그 실체를 모른다. 시시각각 변하는 자유의 그림자만 보고 자유를 생각할 뿐이다. 혹은 누군가가 정의해주는 자유를 자유라고 생각할 뿐이다. 자유란 누군가에게는 토끼가 될 수도 있고, 누군가에게는 괴물이 될 수도 있다. 해가 중천에 떴을 때는 토끼였다가 해질녘엔 괴물이 될 수도 있다. 

타이슨에게 상대를 ‘선택할 자유(freedom to choose)’를 주고 싸우라고 하는데 타이슨이 나를 선택한다면 나는 이미 죽은 목숨이다. 나에게 자유라는 말은 곧 죽음을 의미한다. ‘선택할 자유’를 부여받은 타이슨은 초등학교 교실에 난입해 ‘초딩’ 무리를 한 주먹에 제압하고 포효할 수도 있다. 골목상권에 난입한 대기업 꼴이다. 

젊은이에게 주어지는 자유도 노인에게는 죽음이다. 강자는 누구를 선택해도 이길 수 있겠지만 약자는 아무리 둘러봐도 누구 하나 만만하지 않다. 약자에게 주어지는 ‘선택할 자유’란 사실 아무런 의미가 없다. 약자에게 자유란 ‘지옥의 사자’다.

인간이라면 예외 없이 자신의 생명을 지키고, 소속감을 갖고, 소속된 곳에서 자유를 누리고 싶어 한다. 국가를 비롯한 많은 집단이 이런 인간들의 안전욕구, 소속욕구, 자유욕구를 미끼로 그들을 지배한다. 결국 자유를 보장받기 위해 인간은 소속된 집단에 자유를 저당잡히고 ‘노예’가 돼간다. 
 

 

일부는 ‘적극적인 자유’를 포기하고 ‘소극적인 자유’에 만족하며 살아가기도 한다. ‘소소한 자유’를 얻기 위해 ‘진정한 자유’를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포기한다. 그것이 속 편한 일이기도 하다. 

영화의 주인공 V의 눈에 비친 자유민주주의는 사람들의 진정한 자유를 억압하는 괴물 같은 존재로 변질돼 버렸다. V가 보기에 변질된 자유민주주의는 히틀러의 전체주의적 파시즘과 하등 다를 바가 없다. V에겐 파시스트 슈틀러 총통의 나팔수 국영방송사나 자유민주주의의 산실인 웨스트민스터 사원이나 똑같은 ‘악의 뿌리’이긴 마찬가지다. 아마 그래서 아예 ‘무정부주의’를 표방하는지도 모르겠다.

대통령이 초지일관 기회 있을 때마다 ‘자유’를 강조한다. 한발 더 나아가 그는 자신의 ‘인생 책’으로 밀턴 프리드먼(Milton Friedman)의 「선택할 자유(Freedom to Choose)」를 꼽는다고 한다. 1980년대부터 세계를 휩쓴 신자유주의에서 기인한 사회 양극화로 많은 사람이 고통받는 이 시점에 왜 굳이 사회 양극화의 주범 중 하나로 의심받는 밀턴 프리드먼의 신자유주의 교과서 「선택할 자유」를 들고 나오는지 조금은 의아하다. 

독일의 사회심리학자이자 정신분석가이기도 한 에리히 프롬(Eirch Fromm)은 자신의 저서 「자유로부터의 도피(Escape from Freedom)」에서 자유라는 것이 또 다른 많은 사람에게는 얼마나 두려운 것이며 사회를 피폐하게 하는지 절절하게 설파한다.

왠지 대통령의 모습이 가슴에 「선택할 자유」 한권만을 품은 채 비장하게 전쟁터를 향하는 장군의 모습 같아 불안하다. 「선택할 자유」도 좋겠지만 한쪽 가슴엔 「자유로부터의 도피」도 간직한다면 그를 따라야 하는 병사들의 마음이 조금은 놓일 것 같기도 하다. [본사 제휴 The Scoop=김상회 정치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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