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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시중의 숲길 산책 (6)] 돌 같은 삶의 무게를 견디는 멀구슬 나무

 

대나무 숲과 올레는 사람이 살았던 흔적이다. 올레에는 봄이 짙어 오면서 갖가지 야생화들이 피어오른다. 초록색 잎에 분홍빛과 옅은 파란색 꽃이 활짝 피어나 분위기가 달라졌다. 사람들이 꽃길만 걸을 수 있다면 좋으련만 이 땅에서 살아 온 농민들이 걸어 온 길은 모두 험난한 가시밭길이다.

 

이 꽃길 양편으로는 밭담이 끝없이 이어진다. 밭담은 조상들이 황무지를 개간하면서 쏟아져 나오는 돌을 걸러내어 밭을 일구고 그 돌로 울타리를 쌓아 올려졌다. 제주도의 밭담은 길이가 2만2108km이고 만리장성의 10배에 이르러 흑룡만리(黑龍萬里)라는 이름으로 세계중요농업유산에 등재 되었다.

 

밭담은 토지 경계선이기도 하고 바람과 짐승을 막으며 비바람에 무너지면 다시 쌓기를 반복하면서 수백년을 이어왔다.

 

그런데 돌 한 덩어리는 보통 10kg 이상이라서 한 사람이 들기에도 벅차고 그 보다도 훨씬 큰 돌들이 수없이 많다. 수백이 아니라 수천 수만개다. 조상들이 맨손으로 쌓아 올린 이 밭담의 무게는 삶의 무게다. 밭담만큼 무거운 삶이었다.

 

그 밭담들 사이로 백년은 더 살았을 듯한 '멀구슬 나무'가 힘이 겨운 듯 허리를 잔뜩 구부리고 있다. 거친 농사와 영양부족으로 허리가 잔뜩 구부러진 할머니들처럼.

 

멀구슬 나무는 아름드리로 자라면서 더운 여름철에는 햇빛을 가려주고 나무 그늘 아래로 시원한 바람이 지나가면서 농민들이 땀을 삭히기에 안성마춤이다. 잘 모르면서 그럭저럭 '멍쿠슬 나무'라고 부르기도 했었다.

 

 

겨울을 지나면서 나뭇잎은 하나도 남김없이 떨어졌지만 아직도 열매를 달고 있다. 쭈글쭈글해진 열매는 할머니의 거친 손으로 토끼 같은 손자들에게 주려고 정성스럽게 만든 떡을 고이 간직하다고 말라 버린 것 같다.

 

할머니는 도시에 사는 아들이 손자들하고 매일이라도 찾아 올 것 같아 눈에 밟히지만 찾아와 주지 않아 야속하기만 하다.

 

도시에서 단 맛에 익숙한 손자들은 할머니가 흙손으로 만든 떡을 먹기야 하랴마는 받아주면 더 이쁘다. 며느리는 더럽다고 눈을 흘기겠지만 그래도 원망하지 않고 허리가 굽어 일을 할 수 있을 때까지 돌을 치워 밭담을 쌓고, 밭을 일구어 씨앗을 뿌려 풍성한 수확으로 지갑을 채운다. 손자들에게 용돈을 나눠줄 생각을 하니 마음이 넉넉하다.

 

멀구슬 나무는 이제 좀 있으면 다시 푸르른 잎이 돋아나서 무성해지고 화려한 꽃을 맺을 때에는 보리가 부쩍 자라는 여름이 멀지 않았다.

 

1803년 다산 정약용은 「농가의 늦봄(田家晩春)」에서 멀구슬 나무를 보며 귀양살이 하는 심정을 보여 주기도 한다.

 

“비 개인 방죽에 서늘한 기운이 몰려오고,
멀구슬 나무 꽃바람 멎고 나니 해가 처음 길어지네.
보리 이삭 밤사이 부쩍 자라서,
들 언덕엔 초록빛이 무색 해졌네“

 

 

마을 길가에는 새로 예쁘게 지은 집 울타리를 돌로 쌓아 가는데 맨손으로 쌓아 올리는 솜씨가 보통이 아닌 것 같아서 인사를 건넸다.

 

“대단허우다 예!”

 

“보통입주 마씨!”

 

무거운 돌을 거뜬히 들어 올려 아귀를 착착 맞추면서 자신감이 철철 넘치는 대답에 '이 정도가 보통이라면?' 이보다 더한 예술가 수준인 모양이다. 하기야 곳곳에서 정교하게 쌓아 올려진 돌담 울타리를 자주 보았다.

 

작은 키에 호리호리하여 체력이 따라주지 않을 것처럼 보였지만, 만리장성이라도 쌓을 듯 무거운 돌을 가뿐히 들어 올려 빈틈없이 척척 맞추어 가는 모습은 돌 만큼이나 무거운 삶의 무게를 이겨냈다는 징표이다.

 

이 작업을 보면서 '조상들이 특별한 도구도 없이 맨손으로 어떻게 이 무거운 돌들을 옮겨 밭담을 쌓았을까?'하는 의문은 이제 풀렸다.

 

조상들이 무거운 돌을 캐어 나르고 쌓아 올리기를 수백년 동안 반복하면서 아무리 무거워도 거뜬하게 들어 올리며 익숙하게 다루는 요령을 터득하여 이겨낸 때문이다. 그 밭담 사이에 멀구슬 나무는 돌 같이 무거운 삶의 무게를 이겨내고 있다. 〈다음 편으로 이어집니다〉

 

☞조시중은? = 제주특별자치도의 사무관으로 장기간 근무하다가 은퇴하였다. 근무 기간 중  KDI 국제정책대학원에서 정책학 석사, 미국 캘리포니아주 웨스턴 로-스쿨에서 법학 석사, 제주대학교 대학원에서 법학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현재는 제이누리 논설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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