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못. 숲 속 한구석에 자리를 잡아 조용하고 평화로워 보이는 이 연못은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다고 한다. 농사지을 땅이 아쉬운 농민들이 무심코 메워버리지 않아서 원형대로 보존되었다. 이 연못은 여러 종류의 새들을 위한 안식처이기도 하다. 발자국 소리를 들었는지 청둥오리를 비롯한 물새들이 힘찬 날개 짓으로 하늘로 날아올랐다. 하얀 몸통에 기다란 다리와 목을 가진 새 한마리가 날아올랐다. 허공을 가르며 한 바퀴 돌아 높은 소나무 꼭대기에 내려앉아 귀족같은 모습이 돋보였지만 짝을 기다리는지 외롭게 혼자 멍하니 북쪽 하늘을 쳐다보는 중이다. 대여섯 마리 꿩 새끼(꿩 병아리)들은 어미 꿩의 뒤를 따라 줄을 지어 밭 가운데로 뒤뚱뒤뚱거리며 바쁜 걸음을 재촉했다. 아직은 날개에 힘이 없어 날지 못하는 모양이다. 이 연못이 없었다면 보지 못할 평화로운 모습이다. 이 연못은 가뭄이 오래 갈 때에는 식수와 가축 급수용으로 사용되었단다. 가뭄이 이어지면 대지가 바싹 말라 타들어 가면서 흙먼지가 날릴 때에는 하늘이 온통 부옇다. 농작물들이 고사(枯死)하고 가축들은 목이 말라 헉헉대면서 못견뎌했었다. 농민들은 어찌할 바를 몰라 애를 태웠었다. 먹을
▲ 으름나무 꽃. 파란 색으로 점점 깊이 덮여지는 숲에 으름 덩굴이 파란 잎을 배경으로 꽃을 맺었다. 제주에서는 '졸갱이' 혹은 '유름'이라 불려 지는 덩굴은 다른 나무를 감고 올라가면서 잎은 다섯 개의 손바닥을 펼친 것 같다. 나무 하나에 암꽃과 수꽃이 피어난다고 하는데 보라색 꽃잎에 더 짙은 꽃술이 암꽃인지 아니면 수꽃인지도 구분이 어렵다. 그게 그것 같기도 하다. 이 꽃이 지고난 후 맺어진 열매는 초록색이었다가 소시지 같이 커가면서 가을이 되면 차츰 갈색으로 변해간다. 때가 되면 활짝 갈라지면서 하얀 속살을 드러내면서 익어간다. 으름은 산에서 나는 머루와 다래와 함께 3대 과일 중의 하나라고도 한단다. 옛날에 먹을 것이 귀하고 어려운 시절에 지금은 어른이 된 아이들의 입에 넣으면 살살 녹는 그 맛이 특별하고, 임금과 신하들이 나누어 먹을 만큼 그 맛이 뛰어 났단다. 지금은 먹을 것이 풍부하고 흔한 시대에 으름의 달콤한 맛은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졌지만, 새들이나 곤충들이 풍족한 만찬을 즐기기에는 더없이 좋은 열매다. 사람들이 찾지를 않을 테니 새들이나 곤충들에게 더 많은 몫이 되어 돌아간다. 나
▲ 복숭아꽃. 숲속 한 편에는 비닐하우스 설치 작업이 한창이다. 익숙한 솜씨로 철재 구조물을 설치하고 비닐을 씌우더니 금새 감귤묘목이 심어졌다. 이 땅에서 살아 온 농민들은 뛰어난 과학자들이다. 감귤이 재배된 이후로 짧은 기간에 크게 성장하더니 기술적으로도 큰 발전을 이루어 한라봉, 천혜향, 레드향과 같이 전세계 어디에 내어놔도 손색이 없는 뛰어난 상품을 만들었다. 감귤(citrus)은 오렌지(orange), 레몬(lemon), 만다린(mandarin)으로 구분되며, 이 땅에서 재배되는 품종은 만다린으로 껍질을 벗겨서 먹는 종류이다. 만다린에는 유럽에서 생산되는 탠저린이나 클레멘타인이 있으나 껍질을 까려면 물이 질질 흘러 내려서 불편하기도 하고 씨도 많아 먹기도 힘들다. 외국의 오렌지나 레몬이라도 이 땅에서 농민들이 만들어 낸 감귤이 더 뛰어나다. 불모지에서 레몬을 생산해서 수출한다니 쾌거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앞으로 농민들은 꾸준하게 연구하여 더욱 우수한 상품을 만들어 낼 것이다. 누가 부르지는 않았지만 소리도 없이 살며시 다가온 봄기운이 숲속에 가득하다. 숲 속 한구석에서 하얀색으로 피어나는 빛나는 꽃은 벚꽃인줄 알았다.
▲ 최근 재선충 소나무 제거 작업으로 잘려나간 아름드리 소나무. 숲 속에서 포크레인과 전기톱 소리가 요란하다. 재선충으로 붉게 물들은 소나무를 제거하는 작업이 진행되면서 아름드리 소나무가 밑둥에서 잘려나갔다. 숲 속 깊이 들어가면서 포크레인 바퀴자국이 선명하게 드러나고, 잘려나간 소나무 주변에는 돌과 흙이 파헤쳐지고, 작은 관목과 덤불이 이리저리 흩어져 있다. 포크레인 삽질은 두세번 좌우로 훑어버리면 한 무더기 청미래 덩굴이 흩어져 버리지만 포크레인을 탓할 수는 없는 형편이다. 또 하나의 숲의 공해는 외래 식물이다. 여러 가지 외래식물 중에서도 '도깨비 가지'라 이름 붙여진 이 식물은 서양 도깨비 같이 번식력이 강하여 다른 토종 식물을 밀어내면서 자리를 넓게 잡아가면서 순식간에 숲의 생태계를 파괴해버린다. 날카로운 가시와 함께 주둥이를 내밀고 역한 악취를 내뿜으며 열매를 키워 번식해 나가는 중이다. 이 고약한 외래 식물은 당장 캐어 버리고 싶지만 도구가 없어서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다. 관계 공무원에게 신고를 하였더니 "즉시 처리하겠다!"고 한다. 이럴 때 '도깨비 가지'에게 딱
▲ 까맣게 익어가는 삼동나무 열매. '보리밭!' 이 밭 사잇길을 걸어가면 '뉘이 부르는 소리!'가 들릴 것 같아 뒤를 돌아보았지만 인적이 없이 고요하다. 대신에 숲속에서 이름 모를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들려오고 가끔은 꿩들이 날라 다니는 소리도 들을 수 있다. 보리는 이삭이 패어 두어 달 지나면 성큼 수확기가 다가온다. 보리가 익어가는 시기에 까만색으로 익는 열매는 제주도의 토종 불루 베리라는 삼동나무 열매다. 열매는 초록색으로 태어나서 빨간 색으로 물들어 가다가 완전한 까만색으로 익어 간다. 나이가 든 어른들은 어렸을 때 이 열매를 먹고 입이 검붉은 보라색으로 물들여졌던 추억을 간직하고, 먹을 것이 귀하던 춘궁기에 허기를 달래기도 했었다. 군것질도 힘들고 밥을 제때에 차려먹기도 힘든 시절에 아이들은 특별하게도 달콤한 맛으로 즐겨 찾았던 친숙한 나무지만, 지금은 누가 처다 보지도 않을 정도로 관심이 멀어져 버렸다. 마스크와 시커먼 안경으로 얼굴을 가리고 모자를 깊이 눌러 쓴 아주머니가 렌트카에서 내리더니 다가왔다. 코로나 덕분에 요즈음 많이 볼 수 있는 외계인 같은 모습이다. 경기도 화성(華城)에서
▲ 까마귀쪽나무. 노루 한마리가 숲 속에서 튀어 나오다가 눈을 마주치자 다시 후닥탁 숲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사진을 찍으려 했는데 또 놓쳤다. 봄을 시샘하듯 폭풍 같은 바람의 차가운 기운으로 대지는 다시 움츠려 들었다. 북풍인지 동풍인지도 구분이 안 될 정도로 여러 방향에서 몰아치는 바람에 한적한 사찰 전각 처마에 매달린 풍경이 흔들리며 맑고 은은한 소리가 사방으로 울려 퍼졌다. 고요한 숲길에서 들려오는 풍경 소리는 사람들의 온갖 잡념을 가라앉히는 항상 그리워해도 좋은 소리다. 전각의 처마에 그려진 문양과 색상은 많이 퇴색해 졌지만 정취가 물씬 풍긴다. 사찰 밖에는 물감을 뿌려 놓은 듯 짙은 초록색 보리밭을 배경으로 강렬하게 눈부시도록 유난히도 짙은 빨간색 꽃이 조화가 잘 어우러진다. 짙은 립스틱을 바른 여인처럼 멀리서도 한 눈에 확 들어왔다. 매화와 유사한 명자나무(산당화) 한그루다. 이육사 시인의 '광야'에서와 같이 눈보라 속에서도 매화는 홀로 꽃을 피워 향기를 피운다. 그 향기는 숲길에까지 가득하다. 서울에서 온 중년 부부는 차에서 내리자마자 “와아!” 연신
▲ 멀구슬 나무. 대나무 숲과 올레는 사람이 살았던 흔적이다. 올레에는 봄이 짙어 오면서 갖가지 야생화들이 피어오른다. 초록색 잎에 분홍빛과 옅은 파란색 꽃이 활짝 피어나 분위기가 달라졌다. 사람들이 꽃길만 걸을 수 있다면 좋으련만 이 땅에서 살아 온 농민들이 걸어 온 길은 모두 험난한 가시밭길이다. 이 꽃길 양편으로는 밭담이 끝없이 이어진다. 밭담은 조상들이 황무지를 개간하면서 쏟아져 나오는 돌을 걸러내어 밭을 일구고 그 돌로 울타리를 쌓아 올려졌다. 제주도의 밭담은 길이가 2만2108km이고 만리장성의 10배에 이르러 흑룡만리(黑龍萬里)라는 이름으로 세계중요농업유산에 등재 되었다. 밭담은 토지 경계선이기도 하고 바람과 짐승을 막으며 비바람에 무너지면 다시 쌓기를 반복하면서 수백년을 이어왔다. 그런데 돌 한 덩어리는 보통 10kg 이상이라서 한 사람이 들기에도 벅차고 그 보다도 훨씬 큰 돌들이 수없이 많다. 수백이 아니라 수천 수만개다. 조상들이 맨손으로 쌓아 올린 이 밭담의 무게는 삶의 무게다. 밭담만큼 무거운 삶이었다. 그 밭담들 사이로 백년은 더 살았을 듯한 '멀구슬 나무'가 힘이 겨운 듯 허리를 잔뜩 구부
숲길은 한적하고 아직 억새들은 바싹 말라 황량하지만 새 풀이 돋아나면서 봄이 더 가까워 졌다. 두꺼운 등산화를 신었지만 구름 위를 걷는 것처럼 촉감이 상쾌하다. 곶자왈이나 올레길, 오름을 걸을 때와는 다른 기분이다. 아스팔트나 보도블럭, 주차된 차량들 사이를 비집어 걸어야 하는 도시 사람에게 부드러운 흙을 밟고 풀잎 냄새를 맡으며 부드럽게 걸을 수 있는 기회를 만난 것은 특별한 축복이다. 조용하고 평화로운 숲길을 걸어가다가 붉게 물들며 시들어 가는 소나무들이 다가왔다. 몇 년 전부터 제주의 산야를 휩쓸어 버린 소나무 재선충 전염병이 아직도 진압이 다되질 않은 모양이다. 가까운 밭에서 콜라비 수확 작업 중인 젊은 농민에게 안타까운 심정으로 말을 붙여보았다. 농민은 “신 군수님이 셔시믄 이런 일 어서실 꺼우다!”라며 언성이 높아졌다. 돌아가신 신철주 군수님이 계셨으면 이런 자연재난은 미리 막았을 거라고 확신한단다. 뛰어난 지도자가 없어서 자연재난을 막지 못한 아쉬운 결과로 오래도록 이어지고 있단다. “책상에 아장 인터넷이나 두닥두닥 허당....밥 먹어지믄 몇 글자 찍어 보당....인사철 되민 자리 다툼이나 허멍
▲ 동백꽃. 나즈막한 언덕 양지 바른 숲 사이로 동백나무의 빨간 꽃 한송이가 눈에 들어왔다. 가시덤불을 뚫고 솟아오르려 몸부림치는 이 동백은 잠시 화려하게 피었던 한송이가 시들어가며 곧 떨어질 듯이 위태롭고 다른 꽃송이들이 곧 피어날 준비를 하는 중이다. 도시에서 많이 보던 개량종이 아니라 이 숲속에서 나고 자란 야생동백이다. 동백은 사연이 많다. 제주의 근대사에 큰 아픔을 간직한 채 살아가는 농민들은 매해마다 동백꽃이 떨어지는 계절이 다시 오면 가슴이 쓰려오고, 큰 상처가 다시 돋아나기도 한다. 아파도 너무 오래 아프다. 겨울에 꽃을 피워 붙여진 이름이 동백(冬柏)이다. 다른 나무와 꽃들은 모두 낙엽이 지고 겨울잠을 자는 사이에 동백은 홀연히 꽃을 피운다. 북풍 한설이 몰아치는 겨울에도 붉은 꽃은 하나둘씩 피어나다가 봄이 끝자락에는 한꺼번에 화려하게 피어난다. 동백은 항상 윤기가 흐르는 푸른 잎을 배경으로 삼아 붉고 화려한 꽃잎과 꽃가루를 만드는 노란 수술과 꽃밥을 자랑한다. 그러다가 동백꽃은 가지에 매달려 시들어 가면서 화려하였던 시절의 미련을 버리지 못한 모습으로 툭 떨어져 버린다. 한 송이씩 떨어지는 모습이 처연하여 슬프
▲ 송악나무. 다른 나무들은 하늘을 향해 쑥쑥 자라며 기지개를 켜듯이 가지를 뻗어가며 다른 나무 가지들을 밀어내면서 힘자랑을 하기도 한다. 그런데 송악나무는 시골의 돌담에 붙어 살아야 하는 운명이다. 뿌리와 가지들은 돌담에 얽히면서 한 몸처럼 자라난다. 송악나무 잎은 돌담 위에서 사철 무성하게 자라면서 오랜 세월을 소의 훌륭한 먹이가 되어왔다. 그래서 제주 방언으로는 '소왁낭'이나 '소밥나무'라고 불려 지게 되었다 한다. 농부들은 밭에서 일을 끝내고 날이 어두워지면서 소들을 몰고 집으로 올 때 소들의 고개는 싱싱한 송악나무 잎으로 쏠리며 군침을 흘렸는데도 야박하게 고삐를 죄어 재촉했었다. 그래도 농부들은 힘든 밭 일이 끝나면 소의 식욕을 돋구어 주기 위해서 송악나무 잎을 한 짐 베어다가 특별한 식단을 만들어 주었다. 소들은 허겁지겁 먹어치웠다. 소의 먹이로 쓰여졌던 송악나무는 지금은 돌담이 안보일 정도로 무성해지고 있지만, 가공 사료가 대량으로 공급되면서 관심이 멀어져 버렸다. 송악나무 열매는 5월이 되면 까맣게 익어 갈 것이다. 누가 알아주지는 못할망정 할 일은 한다. 신선한 바람을 타고 새로이 돋
▲ 호랑가시나무. 다른 지방에서 호랑가시나무는 햇빛이 잘 들고 토심이 깊어 양분이 풍부한 비옥한 토지에서 잘 자란다. 이에 비하여 제주도의 호랑가시나무는 튼튼한 암반 사이로 뿌리를 내리면서 강한 생명력으로 어떠한 폭풍이나 눈보라가 치더라도 견디어 내면서 자란다. 제주도의 암반은 시멘트 콘크리트 바닥이나 다름이 없다. 흙 한줌도 보기 힘들고 양분도 없는 커다란 돌 덩어리 위에서 금방 흘러 내려 한 모금 남는 빗물에 의지하면서 자라나는 이 나무는 조상들의 강인함을 이어받은 듯하다. 그런데도 겨울에 하얀 눈이 쌓여 내려앉을 때에는 항상 빛나는 푸른 잎과 속이 알찬 빨간 열매는 도드라진다. 찬바람이 불 때에는 새들에게는 피난처가 되기도 하고, 늦은 가을에 맺는 빨간 열매는 겨울을 견디고 이듬해 봄날까지 버티면서 새들에게 먹이가 되기도 하지만 한 치도 흐트러짐이 없다. 나뭇잎의 가시가 호랑이 발톱과 같이 억세다고 하여 붙여진 '호랑가시나무'라고 이름과 '가정의 행복'이라는 꽃말을 가진 이 나무는 자신은 한 톨의 영양분을 공급받지 못하면서도 빨간 열매를 알차게 키워낸다. 자신을 희생하며 가정의 행복을 지켜낸 이
코로나로 전세계는 물론이고 제주에서도 어려운 상황이 이어지고 있다. 수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당하고 있지만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어두운 터널을 지나고 있다. 조시중 제이누리 논설위원은 독자들에게 잠시나마 위안을 주기 위하여 제주도 구석구석에 숲길을 걸어가며 자연과의 대화를 통해 얻은 소재를 글로 옮긴다. 주요 소재는 사람들 발길이 드문 숲속에서 자생하고 있는 야생나무와 열매들이다. 자연을 있는 그대로 사진에 담기도 하고, 열매를 먹어보기도 하며 그 맛을 느껴보기도 한다. 농민들과 대화를 나눠보기도 하고, 조상들이 살아왔던 흔적을 찾아보기도 하고, 농작물들이 자라는 모습을 관찰하기도 한다. 풍부한 자연 생태계의 고마움에 감사하는 마음을 다시 새겨보기도 하는 생각이다. 학명이나 원산지 같이 어려운 내용은 전문가들의 몫이고 아름다움을 찬미하는 것은 시인의 몫이다. 이 영역을 넘어서기에는 과분하다. 대신에 이 글은 보통 사람이 느끼는 감정을 적은 이야기이므로 그저 신변잡기처럼 가벼이 읽어도 될 일이다. [편집자 주] ▲ 보리밥 나무. 또 한 해의 겨울이 지나간다. 봄이 가까워 오면서 보리 싹이 푸릇푸릇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