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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럭삼춘 볼락누이-민요로 보는 제주사회와 경제(40)] 맷돌ㆍ방아노래

 

故 김영돈 교수님은 과거 제주여인들이 맷돌을 돌리거나 방아를 찧으면서 부르던 맷돌ㆍ방아노래를 자립과 근면의 노래, 팔자와 한탄의 노래, 사랑과 원한의 노래, 시집살이 노래, 집안 노래, 경세(警世)의 노래, 꿈의 노래, 신앙과 풍토의 노래 등으로 구분하였다. 그 ‘시집살이 노래’ 중에 처첩간(妻妾間)의 ‘시앗 싸움’을 다룬 노래가 있다. ‘큰 각시’는 ‘큰 각시’ 대로, ‘족은 각시’는 ‘족은 각시’ 대로 구구절절 서럽고 아픈 사연들이 가득하다.

 

“겉보리 껍질만 먹을지언정 시앗이랑 같은 집에 살 수 있으랴. 물이 없어 나쁜 물을 먹는다 해도 같은 물을 마시기 싫다. 시앗이랑 같은 길로 다니기 싫다. 길을 다시 뺄 수 있다면 시앗이 다니는 길은 따로 빼줘라.”

 

“갓 스물 나이에 여든 살 남편을 맞이하니 두 번 세 번 물 덜은 밥 씹어 달라 엄살이더라. 호강하려 남의 첩 들었는데 어디 간들 놀 수 있으랴. 느릿느릿한 한량(閑良)의 첩으로 가지 말고 부지런한 목자(牧子) 본처로 가라.”

 

현지조사를 통해 제주의 가족제도를 오랫동안 연구한 최재석 교수에 의하면(1978), 제주도의 첩(妾) 제도는 처첩(妻妾)간 신분적 차이가 심했던 육지의 전통적 첩 제도와 다르다. 제주도의 첩 제도는 오히려 제주도의 이혼(離婚)과 재혼(再婚) 혹은 삼혼제도와의 관계 하에서 설명하여야 한다. 제주도에서는 육지의 전통적 양반촌락과 달리 상당한 정도 이혼과 재혼의 자유가 있었고 실제 그렇게 행해져 왔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많은 여자가 이혼을 하고 이혼한 여자는 재혼을 한다. 이혼생활이 뜻대로 되지 않는 경우에 삼혼에 이르는 여자도 있다. 이혼녀와 사별녀(死別女)는 남편 없이 그대로 생활을 지속하는 걸 제외하면 재혼과 첩 양자(兩者) 가운데 한 길을 택하게 된다. 이렇게 볼 때 제주도의 첩은 일종의 재혼(혹은 삼혼)으로 보는 것이 더욱 타당하다. 여자입장에서 보면 재혼의 성격을 띠지만 남자입장에서 보면 처첩의 신분지위 차이가 거의 없는 ‘일부다처제’ 가족이라 할 수 있다.

 

“간간이 놀려 남의 첩 들었는데 막상 살아보니 더운 땀 흘리며 내가 놀 수 없다. 느릿느릿한 한량의 첩으로 가지 말고 부지런한 목자의 본처로 가라.”

 

놈의 첩도 들리랭(들려) 흰죽 딸령(달여)들렁
섹일(썩일) 간장 다 섹영 들라
간간 놀젠(놀려) 놈(남)의 첩 드난 살안 보난 더운 똠(땀) 지멍(지며)
어디 간간 내 놀암(놀고) 서니(있더냐)
놈의 첩광(첨과) 소낭긔(소나무) ᄇᆞᄅᆞᆷ(바람) 맛이 좋다 흰죽이라라
주전지에 물 궤(끓)듯 ᄒᆞᆫ다(한다)
첩의 방을 ᄀᆞ만이(가만히) 보난 ᄉᆞ랑(사랑) ᄉᆞ랑 놈 ᄉᆞ랑 날에
낭긔(나무) 칼에 손으로 비영(베여) 놈으(남의) 얼에 고생이라라
오롬에 돌광 지세어멍은 둥글며 댕기당도 살을메(살 도리) 난다
놈의 첩광 소낭긔 ᄇᆞᄅᆞᆷ은 소린 나도 살을메 읏나(없다)
버륵버륵 살마꼿(반하꽃)은 ᄒᆞ를(하루) 피영(피여) 웃어나(없어) 진다
느렁장이 첩으로 말앙 살메 목ᄌᆞ(목자) 밋(본처)으로 가라

 

* 느렁장이=느리광이=느릿느릿 행동하는 사람, 한량(閑良)을 뜻함.

 

이에 대해 송성대 교수는(1998), “제주도의 복혼(複婚)제 문화가 축첩(畜妾)제냐 일부다처(一夫多處)제냐 하는 것이 학자들 간에도 쟁점이 되어 왔다. 혹자는 제주도에 있어서는 그것이 경제적 자립가능성이 있었음에도 성적 본능을 추구한 결과로 나타나기 때문에 당연히 일부처첩제로서의 축첩제라고 한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여자가 남자 없이 완전하고 자립적인 경제생활을 못하므로 그것을 일부다처제라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제주도에서는 여성이 경제적으로 얼마든지 자립할 수 있었기 때문에 경제적 이유 때문에 남의 첩이 되었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들은 가정생활에서 서로 서로 그 의견을 존중히 하는 동시에 하등(何等)의 억압적(抑壓的) 강제(强制)를 요구하지 않는다. 더욱이 남녀가 다 같이 각자의 자립적(自立的) 생계(生計)를 세울 수 있다(동아일보, 1937년 9월 3일 기사).

 

이렁좌쉬(유향좌수) 첩 들지 말앙 산메 목ᄌᆞ(목자) 밋(본처)으로 가라
간간놀젠 놈의 첩 드난 놈의 종이 반이로 구나
열 석새(열세살)에 ᄌᆞᆸ아진(좁아진) 머리 어느 어멍이 일사(가려) 주코
이향좌쉬(유향좌수) 첩으로 말앙 산메 목제(목자) 밋(본처)으로 가라
은기 놋길 박으로 쓴덜(쓴들) 놈의 첩을 사름(사람)이 들랴
ᄌᆞ들(걱정할) 일 읏건 양 첩을 ᄒᆞ곡(하고) 쌍놈의 벗을 사귀라 ᄒᆞᆫ다
미운 놈 보컨(보려거든) ᄄᆞᆯ(딸) 하영(많이) 나곡
질(길) 나는 밧(밭)을 버실라(갈아먹어라) ᄒᆞᆫ다
늙은 놈이 젊은 첩 ᄒᆞ난 불 본 나비 ᄂᆞᆸ뜨듯(나대듯) ᄒᆞᆫ다

 

“첩 둘 둬서 밥 굶는 놈아 나 꼴 보면 정신 차려라. 한 마을에 세 첩 한 놈아 세 솥 밑 불 때여 보라. 연기만 나고 불 아니 난다. 한 마을에 세 첩 한 놈아 양하(蘘荷)를 닮아 불내여 앉는다. 양반은 첩 셋을 두니 명주바지 세 벌이라. 한 마을에 첩 셋 한 놈은 거짓말 주머니에 담아 쫄쫄 굶고 있더라.”

 

양 첩 ᄒᆞ영 때 굶는 놈아 나 꼴 보멍 정다실라(정신 차려라)
ᄒᆞᆫ(한) ᄆᆞ실(마을)에 싀(세) 첩 ᄒᆞᆫ 놈아 멩지 바지가 싀 허리(벌)곡
ᄒᆞᆫ 때 밥이 싀 상이라도 간 아니 거린(갈린) 말이 읏다
ᄒᆞᆫ ᄆᆞ실에 싀 첩 ᄒᆞᆫ 놈아 싀 솟밋듸(솥밑) 불 ᄉᆞᆷ아(불 때여) 보라
내만(연기만) 나멍 불 아니 난다
ᄒᆞᆫ ᄆᆞ실에 싀 첩 ᄒᆞᆫ 놈아 양에(양하) 닮앙 불 내영 앚나(앉는다)
양반은 싀 첩을 ᄒᆞ난 멩지 바지가 싀 허리라라
ᄒᆞᆫ ᄆᆞ실에 싀 첩 ᄒᆞᆫ 놈은 그짓말(거짓말)은 주멩기(주머니)에 담앙
자꾸자꾸 긂엄서라(굶고 있더라)

 

제주도에서도 육지와 마찬가지로 첩은 첩(妾), 첩가(妾家), 소실(小室), 작은집, 씨앗 등으로 불리어지고 있다. 혹은 ‘족은 각시’로 불리어진다. 즉, 첩은 ‘족은 각시’, 본처는 ‘큰 각시’로 불리어진다. 제주도의 첩은 조선중기 이후의 양반가 첩처럼 처첩(妻妾)의 신분차이가 심한 첩과는 상이(相異)하고 오히려 조선 초기 이전 고려시대의 이첩(二妾), 삼첩(三妾)의 성격을 많이 가지고 있다. 따라서 제주도의 첩은 조선중기 이후 양반가족의 첩 용어보다는 서첩(庶妾) 또는 이처(二妻), 삼처(三妻) 용어를 사용하는 편이 사실을 더 정확히 전달할 수 있다(최재석, 1978).

 

제주도의 첩은 육지 양반가족과는 달리 남자와 본처에 속하여 예속적 지위에 서 있지도 않으며 옥내(屋內)노동만 하는 소비자도 아니다. 그들은 제주도의 다른 여자(初妻, 在妻)와 거의 다를 바 없는 지위에서 옥외노동에 종사하여 자기생활을 하고 있어 전통적인 첩과는 다르다.

 

제주에 있어서 여성들은 시대를 초월하여 경제적으로 얼마든지 혼자서 자립 자활할 수 있는 사회였기 때문이다. 제주에 축첩이 성했던 것은 사회적으로 보았을 때 ‘여종필일(女從必一)’ 유교문화가 뿌리 내리지 않아서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그리고 제주에 축첩이 만연했던 또 다른 환경은 비동족(非同族) 취락문화권이라 동네 안이나 하루거리 통혼권(通婚圈) 마을 내에서의 역내혼(域內婚)이 이루어 질 수 있는 혼성(混性)취락이 대부분이다. 여기에 여자가 많다는 필요조건 외에 남녀 간에 내외(內外)함이 심한 육지부와 달리, 옥외(屋外)노동을 많이 하는 개방적인 생활과 무관하지 않다(송성대, 1998).

 

* 내외(법)=조선시대 남녀 간의 접촉을 금했던 관습 및 제도, 내외의 기원은『예기(禮記)』내측편(內則篇)에 “예는 부부가 서로 삼가는 데서 비롯되는 것이니, 궁실을 지을 때 내외를 구별하여 남자는 밖에, 여자는 안에 거처하고, 궁문을 깊고 굳게 하여 남자는 함부로 들어올 수 없고, 여자는 임의로 나가지 않으며, 남자는 안의 일을 말하지 않고, 여자는 밖의 일을 언급하지 않는다.”라고 한 예론에서 비롯되었음. 조선시대의 가옥구조는『예기』의 설을 따라 중문(中門)으로 내ㆍ외사(內外舍)를 구분하고, 내사는 여자중심의 생활공간으로, 외사는 남자중심의 생활공간으로 하였음.

 

“씨앗과 싸우러 가니 산을 넘어 싸우러 가니, 동산 밭에 메밀꽃같이 번듯이 앉았는데 씨앗을 보니, 나 눈에도 저만큼 고운데 임의 눈에야 오죽하리.” 당초 머리 체 잡고 목가지 비틀 참으로 갔는데, 막상 메밀꽃처럼 고운 시앗 모습을 보니 ‘자신이 보기에도 저리 고운데 남편의 눈에야 오죽 더 하랴’ 싶어 체념하는 대목이다.

 

마치 드라마에서, 남편의 ‘그 년’을 반쯤 죽여 놓으려고, 몇 벌 없는 명품정장 꺼내 입고 미용실 들러 마사지 받고 머리 힘주며 교양 있게 갔는데, 막상 ‘상간녀’ 모습을 보니 젊고 건강한 ‘그 젊은 년’의 자연미에 눌려 어쩔 수 없이 초라해지는 아내의 심정과 비슷하다. 그리곤 돌아오면서 ‘평생 나 밖에 모르는 순둥이 내 남편이 나처럼 우아한 조강지처 놔두고 실수로 아주 잠간, 눈 돌릴 적에야 그 정도는 되니까 그랬겠지’ 하며 그 날의 기억을 서둘러 봉합한다.

 

씨왓이옌 튿으렌 가난 산을 넘언 튿으렌 가난
동산 밧듸 메마꼿(메밀꽃) ᄀᆞ찌(같이) 휘번듯이(번듯이)나 앉아시난
나 눈에도 저만ᄒᆞᆫ(저만한) 각시 임의 눈에사(눈에야) 아니 들리야
한락산의 고지(수풀) 단풍 무정ᄒᆞᆫ 남ᄌᆞ야(남자) ᄇᆞ레여(쳐다) 보라
웃인 섬의 세(띠) 비례(베러) 감은 ᄌᆞ녀(자녀) 머리 매레(매러) 감이여
무에당도(매다가도) 나 손에 드난 물 싼 돌에 베(배) 배 듯이여
서월(서울) 각신 씨왓이 궂엉 물을 넘엉 튿으레(싸우러) 간다
즤주(제주) 각신 씨왓이 좋앙 산을 넘엉 살리레(살리러) 온다

 

“물이 없어 같은 물을 먹은 들 시앗과 같은 길을 가랴. 길을 다시 뺄 수만 있으면 시앗이 가는 길은 따로 빼게. 길이 없어 같은 길을 걷고 물이 없어 같은 물을 먹고.” 본처는 ‘제주지역은 본디 먹는 물이 귀해 어쩔 수 없이 첩과 같은 물을 먹기는 하지만 그래도 같은 집에서 살기 싫고 같은 길을 다니기 더 더욱 싫다’며 별도의 도로 개설을 건의(建議)하고 있다.

 

물이 웃엉(없어) ᄒᆞᆫ 물을 먹은 덜 씨왓(시앗)이사 ᄒᆞᆫ 질(한 길)을 가랴
질도 다시 빼는 수 시민(있으면) 씨왔 질은 ᄄᆞ로나(따로나) 빼게
질이 읏엉 ᄒᆞᆫ 질을 걷곡 물이 읏엉 ᄒᆞᆫ 물을 먹곡
살챗(안 찧은) 보릴(보리를) 거죽 차(채) 먹은덜 씨왓이사 ᄒᆞᆫ 집의 살랴

 

배낭(배나무) 장귀(장구) 소리 난 몸이 어디 가민 귀ᄒᆞ댕(귀하다) ᄒᆞ리
서월(서울) 놈이 서월 년 좋듯 앚인(앉은) 듸서(데서) 살아나 보게
물이 읏엉 ᄒᆞᆫ 물을 먹곡(먹고) 질이 읏엉 ᄒᆞᆫ 질을 걸은덜(걸은들)
속광(속과) 셈사(셈이야) 어디를 가코 씨왓님아 강살음(강샘, 질투) 말라
집에 보겅(보면) 벗으로 알라

 

제주도에 첩이 많은 요인은 여성지위의 예속성(隸屬性)에서 찾아서는 안 된다. 육지의 첩(일부다처)이 여성의 지위의 저하(低下)와 관계있다 하더라도 적어도 제주도에서는 그런 관계가 성립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제주도여성은 육지여성에 비하여 여러 점에서 훨씬 높은 지위를 차지하지만 첩의 비율(比率)은 육지보다 훨씬 많기 때문이다.

 

그들의 노동생활은 필연적으로 그들의 남녀관계 특히 여성의 사회적, 가정적 생활상 지위를 규정하지 않을 수 없다. 여기에는 적어도 일반적으로나 가정적으로나 남존여비(男尊女卑)의 철칙(鐵則)은 아직 수립(樹立)되지 않았다 그들은 이러한 철칙이 수립되는 물질적 조건을 가지지 안 했다. 여성은 남성과 함께 공동적 협력으로 일가(一家)의 생계를 영위(營爲)한다. 그럼으로 남편은 처가 남편에 대함과 같이 처의 의견을 존중히 하며 그것을 무시하지 않는다(동아일보 1937년 9월 2일 기사).

 

이혼한 많은 여자들이 경제적 빈곤, 핵가족의 전통, 전통적인 유교적 가치관의 약화 등의 여러 요인으로 재혼하게 되는데, 이들이 재혼으로 이르게 되지만 그들이 모두 재혼하는 길을 밟지 않는다. 가능하면 재혼을 원하지만 사회적 이동이 적은 지역사회에서 ‘여다남소’ 현상은 필연적으로 그 일부는 첩의 길을 밟게 된다. 제주도의 첩을 재혼의 일종으로 보는 이유이다.

 

경제적으로 빈곤한 이혼 여자에게 생활을 할 수 있는 토지만 주어지면 자기능력을 보유하고 있는 여자라면 재혼이든 첩이든 육지에서처럼 그다지 따지지 않게 된다. 제주도는 ‘여다남소(女多男小)’의 현실일지라도 많은 여자가 재혼을 하게 되고 이혼한 많은 여자가 재혼을 하게 된다. 이때 그 여다남소의 현실로 말미암아 모두가 이혼을 할 수 없고 그 일부는 첩이 된다. 다시 말하면 제주도의 첩 제도는 제주도 여자의 이혼과 재혼 그리고 ‘여다남소’라는 사회구조에 영향을 받았다고 보아진다(최재석, 1978).

 

것보리를 거죽차(껍질채) 먹은뎔(들) 시왓이사 혼(한)집의 살랴
물이 엇엉(없어) 궂인(나쁜) 물 먹은덜 시왕광 고든질(같은길)로 가랴
질(길)도 다시 새로나 빼믄 시왓질(길)은 또로나(따로) 빼라
전처소박 시첩혼 놈아 소나이광(과) 돌(달)진 밤새라 대천바당 돌진 밤새라

 

후처(後妻)로 들어온 ‘족은 어멍’ 역시 서러움이 많다. “임 없어 하도 서러워 갓 스물에 여든 난 임에게 드니 두 번 세 번 물 덜은 밥을 씹어 달라 엄살이더라. 호강하려 남의 첩 들었지만 어디 간간이 놀 수 있더냐.”

 

신 엇임(없음)도 하도나(많이) 설롼(서러워) 갓 쓰(스)물에 여든님 드난
두 번 싀번(세번) 물 덜은 밥을 씹어 도랜(달라) 앙업(엄살)이더라
호강호젠(하려) 놈(남)의 첩 드난 어디 간간(간간이) 놀아 졈시니
지네 어멍광 오름엣 돌은 둥글어 댕기당도(다니다가도) 살을매(살길) 난다.

 

“편지가 왔다. 시앗이 죽었다는 편지다. 맛있는 고기반찬에도 밥맛이 쓰다가 그 소식을 듣고 나니 소금에도 밥이 달다. 앞밭에 묻지 말고 뒷밭에도 묻지 말고 가시덤불에 묻어서 열매 열어도 먹지 말고 가져다 쓰지도 말라” 눈에 가시 같던 첩이 죽었다는 부고(訃告)에 그간 맛좋은 고기반찬도 맛이 없었는데 이젠 소금만으로도 밥맛이 절로 난다. 나트륨 과다

 

펜지(편지) 왔져 씨왓 죽은 펜지 왓져
궤기(고기)에도 밥이 씨단(쓰다가) 소곰(소금)에도 밥이 ᄃᆞᆯ다(달다)
앞 밧듸도 묻지 말곡 뒷 밧듸도 묻지 말곡 가시왕(가시덤불)에 묻어근에
가심욜음(열매) 욜거든에 먹도 말곡 씨도(쓰지도) 말라

 

이처럼 제주에서 ‘첩’을 ‘씨앗’으로 부르는 것으로 보아 ‘씨밭이’ 문화와 무관하지 않다고 보아진다. 씨앗은 ‘씨왓’과 같은 의미로 ‘왓’은 제주에서 밭(田)을 뜻한다. 따라서 씨앗은 ‘씨밭(씨전, 氏田)’인 셈이다(송성대, 1998).

 

<참고문헌>

 

김영돈(2002),『제주도 민요연구』, 민속원.
송성대(1998),『문화의 원류와 그 이해』, 도서출판 각.
좌혜경 외(2015),『제주민요사전』, 제주발전연구원.
최재석(1978), “제주도의 첩 제도”,『아세아여성연구』17, 숙명여자대학교 아세아여성문제연구소.

 

<관련사이트>

 

제주연구원〉제주학아카이브〉유형별정보〉구술(음성)〉민요
http://www.jst.re.kr/digitalArchive.do?cid=210402
http://www.jst.re.kr/digitalArchiveDetail.do?cid=210402&mid=RC00008621&menuName=구술(음성)>민요

 

☞진관훈은? = 서귀포 출생, 동국대 경제학 박사(1999), 공주대 사회복지학 박사(2011), 제주특별자치도 경제특보 역임, 현 제주테크노파크 수석연구원, 제주대학교 출강. 저서로는 『근대제주의 경제변동』(2004), 『국제자유도시의 경제학』(2004), 『사회적 자본과 복지거버넌스』 (2013), 『오달진 근대제주』(2019)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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