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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럭삼춘 볼락누이-민요로 보는 제주사회와 경제(10)] 자장가, 웡이자랑

 

제주사람들은 머리가 좋다. 어릴 적 구덕에서 자랐기 때문이다. 이는 애향심 발로로 근거가 약해 보인다. 그래도 ‘두상은 좋다’라면 얼추 끼워 맞출 수 있다. 아이 키울 때 두상 예뻐지라고 돌려가며 눕히곤 한다. 구덕 흔들면 아직 굳지 않은 아기 머리가 자연스레 둥글게 된다.

 

구덕에 아기 눕혀 흔들면 아기들이 자게 되는 이유는 뭘까. 미국까지 구덕 공수해 가서 딸 둘 키운 동생 생각처럼, 어지럽고 멀미나 억지로 자는 건 아닌지. 온실 속 화초가 아닌 야생화처럼 아이를 키워야 한다. 제주말로 ‘몽그리멍’ 키워야 한다. 흙도 ‘좁아' 먹어 가면서. 그래서 구덕에 눕혀 익스트림 생존력을 높였나 보다.

 

구덕에 눕혀 흔든다고 애기들이 다 자는 건 아니다. 일부 ‘시무쟁이’ 궂은 애들은 구덕 ‘흥글’ 때만 잠시 자는 척 하다 멈추면 바로 눈 뜬다. 구덕 흔드는 속도나 리듬이 일정치 않기 때문이다. 간혹 누워 발로 흔들다가 구덕이 엎어지는 참사(?)가 발생하기도 한다.

 

구덕은 원래 수요자의 입장, 즉 아기의 라이프 스타일(수면시간)과 욕구를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공급자의 일방적 다그침에 의해 잠을 강요당하는 공간이다. 그런데도 자는 아기는 참 무던하다. 제주사람들이 경험하는 ‘사회화 과정’의 하나라고 하면 억지이려나.

 

처음엔 추켜 주고 구슬리며 분위기 좋게 시작한다.

 

 

 

환상(還上)=환곡(還穀), 환자(還子)= 조선시대 양정(糧政)의 하나, 흉년 또는 춘궁기에 곡식을 빈민에게 대여하고 추수기에 갚게 하는 구호제도. 본맹뒤=무속 설화 ‘초공 본풀이’에서 무속신 삼형제 중 맏이 이름, ‘초공’이라고도 함. 삼멩뒤=무속신 삼형제 중 막내이름, ‘삼공’이라고도 함. 진(陣)=왜구를 막기 위해 쌓아올렸던 성(城)이 있는 군사 요새

 

이처럼 좋게 말할 때 잠들었으면 온 고을이 편안 했을 텐데. 아기가 안자면 슬슬 부화 나는 건 인지상정이다. 이때부터 자장가 사이사이 하소연 겸 협조 부탁 겸 위협이 들어간다. 아무 상관없는 타자를 끌어들여 험한 분위기 조성부터 한다. 누구에겐지 모르지만 만일 우리 아기를 안 재워주면(상대가 그럴 의무나 책임이 있는지 확인 안 된 상태에서) 신설란으로 만든 질긴 밧줄로 모가지를 걸려다가, 물통에 집어넣어 이리 저리 끌고 다니다, 궁극은 바다에 유기하겠다는 살생 협박 경고를 흘린다. 느닷없이, 아기가 자고 안 자고에 한 생명이 걸려 있는 형국이다.

 

 

* 잘락(자락) 갑자기 힘주어 미는 모양

 

자장가 사이사이 이러 저런 사정을 하거나 공동 육아 책임이 있는 ‘아방’을 불러 오라 소리치거나, 가끔 누구에겐가 욕도 한다. 할 일 많은데 난이도 낮은 이 단계에서 태클 걸리면 어쩌라는 건지. 가득이나 할 일 많아 “죽젠해도 죽을 저를(여유) 읏신디(없는데)”, 아기마저 잠 안자니 얼마나 야속했을까.

 

눈치도 보인다. 며느리인 아기 엄마는 구덕 흔들 여유조차 없다. “나도 눈을 곰으키여 늬도 혼저 눈을 곰앙 혼저 혼저 지랑호게.” 아기 제울 요량으로 같이 눈을 감은 피곤한 며느리는 아기보다 먼저 존다. 그런 며느리가 얄미운 시어머니, “자인, 구덕 받아 앚앙 좀만 잠저. 애긴 안자고” 불호령이 떨어진다. 얼마 전 오일장에 가 보니, 모터 달아 자동으로 흔들어 주는 쇠 구덕이 있었다. 좀 일찍 나왔으면 그런 고부갈등은 없었을 텐데.

 

 

예나 지금이나 여성들 일이 아주 많다(그렇다고 남자는 놀고먹었다는 의미는 결코 아니다). 방애, 절구, 물질, 검질 매기, 망건․탕건․갓 등을 짜는 갓공예, 물 길어오기, 세탁, 재봉, 육아, 취사 등. 그뿐인가 경조사 돌보기, 부조, 친족교제, 금전출납, 조상제사 등도 겸했다. 게다가 남녀공동으로 제초, 수확, 비료운반, 가사경영 등이 있다. 남자들은 주로 기경(起耕), 진압(鎭壓), 부역, 토역, 건축, 어로작업 등 힘쓰는 일을 주로 했다.

 

농사짓던 시절, 밭에서 일하고 돌아온 남자는 그때부터 휴식 겸 재충전 시간이다. 하지만 여자는 그때부터 하루 동안 쌓인 집안일 시작이다. 지금으로 보면, 맞벌이 부부가 각자 직장에서 일하고 퇴근해서 남편은 소파에 누워 TV보거나 이른 잠을 자지만, 아내는 낮 동안 밀린 집안일을 재개한다.

 

다음날 출근 전까지 밤 새워 가며 속 편한 아이들 공부도 봐줘야 한다. 차라리 직장에 나가는 게 쉬는 거다. ‘불턱’이 좀녀들의 유일한 해방구였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지닌다. 누구에게나 도망치는 하루, 탈출구가 필요하다.

 

어르고 겁주기만 한 건 아니다. 재산상속으로 회유도 한다. 전답(田畓), 가마솥, 유기재물, 방애귓(절굿공이), 살레(찬장), 물황(물독) 등. 나중 뒷감당을 어찌했는지 모르지만, 책임질 수 없을 정도로 아낌없이 모두 준다 했다. 구덕을 ‘흥근’ 엄마나 할머니가 행사할 수 있는 재산권은 친정으로부터 물려받은 금득전(衿得田)이나 금득답(畓)이다. 금득은 이두(吏讀)어다. 제주에서는 ‘깃득’이라고 읽었다. 부부사이도 재산문제 관련해서는 구별하여 소유권을 행사했다.

 

 

* 옥자나무= 비자마무위 대구(對句)로 지은 말, 벨진밧=‘별이 떨어진 밭’이란 뜻으로 넓고 기름진 밭

 

17세기 중반까지 제주에서 재산상속은 아들, 딸 구별 없이 균등하게 분배되었다. 이후 점차 장자우대, 남녀차별의 차등분배로 바뀌었다. 주자가례(朱子家禮) 보급과 장려로 조상 제사 받들기 위한 봉사조(奉祀條)가 강조된다. 물론 지역과 가문에 따라 다르다. 18세기 제주지역 분재문서 보면, 소조로 전체 5%를 우선 배당하고 장자 30%, 차자 29%, 장녀 14%, 차녀 13%, 상손(上孫)에게 9%를 별급했다.

 

분재기(分財記)는 재주(財主) 생전에 조업(祖業), 즉 조상으로부터 전래된 재산과 재주 당대에 새로 취득한 재산을 분급(分給)하는 문기(文記)이다. 재산은 ‘평균분금’, 똑같이 몫을 나눈다고 했지만 실제 차등을 보인다. 재주 뜻에 따라 분배비율에 차이가 있다. 분배된 재산으로는 전답 외 소나 말, 가마솥, 가사(家舍), 장자(鏘子), 쟁기 등 연장 갖춘 농우(農牛), 자우(雌牛), 자마(雌馬) 등이다. 분재문서에 분할되고 있는 토지소재지와 면적, 재배작물종류, 취득경위 등도 소상히 밝히고 있다.

 

화회(和會)문은 부모사후에 자식들이 합의하여 재산분할하고 선대 제조와 함께 각자 몫을 기재한 분재문서이다. 부모생전에 분재지정이 없던 경우 사후, 자식들 합의에 의해 유산을 서로 분재하고 그 증거문서를 작성하였다. 화회는 화목하게 만나 상의한다는 의미다. 화회에 의한 분재는 장자 의견을 존중한다. 분재 시기는 해당 재산을 남긴 어버이 3년 상 마친 뒤. 복중(服中)에 재산을 나누어 갖는 경우는 있을 수 없었다.

 

제조(祭條)는 조상에 대한 제사(祭祀)와 선묘 소분(掃墳)이다. 후대로 갈수록 제조를 둘러싸고 자손 간 분쟁이 많았다. 제조로 재산 일부를 먼저 떼어놓고 있다. 제조는 봉사조(奉祀條), 승중조(承重條)로 불렀다. 제주에서는 소분조(掃墳條)라 했다. 제월밧(祭位田)은 조상제사를 지낼 몫으로 대대로 대불림하여 경작하는 밭을 말한다. 제사 경비를 마련하기 위해 자산을 생전에 따로 마련해 뒀다는 의미다. 이는 관례상 장자(간혹 장손) 몫이다. 경국대전(經國大典)예전(禮典)봉사(奉祀)조에 상속되는 몫의 20%로 규정되어 있으나 후대로 갈수록 이를 상회했다. 후기로 가면 자녀에게 분급되는 재산보다 소제조로 배정되는 몫이 더 많아졌다. 재주 생전에 미리 별급된 토지는 따로 거론하지 않았다.

 

서자(庶子)도 재산일부를 분할 받았지만 화회는 참석하지 못했다. 경국대전에 의하면 만일 적장자(嫡長子) 아들이 없으면 중자(衆子), 중자(衆子) 아들이 없으면 서자가 제사 모셨다. 방친(傍親) 가운데 뒤이을 자손이 없으면 선조사당(祠堂)에 합쳐 제사 지낸다. 17세기 초반 장자봉사(奉祀)와 아울러 출가한 딸들이 돌아가며 친정부모 제사를 모시는 관습이 있었다. 그러나 17세기 후반 적장자 우위상속제가 확립되면서 딸들은 친정부모 제사를 받들지 못하게 되여 아들만 돌아가며 봉행했다. 그러다 18세기 적장자 봉사제에 따라 적장자 제외한 중자들은 부모제사를 모시지 못했다. 이처럼 장자만 제사 모시려니 제월이 필요한 건 당연지사였다.

 

‘흥부와 놀부’처럼 논농사지역은 부(富)의 분산을 막고 장자에게 집중시켜야 가문의 위세를 지속할 수 있었다. 하지만 토지생산성이 낮은 제주는 토지 집중보다 분산이 생존과 종족 확대에 더 유리하다. 이런 원칙도 18세기 이후 유풍(儒風)으로 많이 변했다. 요즘은 집안마다 다르다. 남군과 북군이 다르고 성안과 이주민 풍습이 다르다. 하지만 분재 불만으로 인한 형제간 불목(不睦)은 예나 지금이나 잦다. 물론 물려받을 게 있는 집안 경우다.

 

<참고문헌>

 

고창석(1997), “17․8세기 제주지방 분재문기의 연구(Ⅰ)”,「탐라문화」18, pp. 215~244.
고창석(2002),「제주도 고문서 연구」, 도서출판 세림.
김영돈(2002), 「제주도 민요연구」, 민속원.
좌혜경 외(2015), 「제주민요사전」, 제주발전연구원.
제주연구원〉제주학아카이브〉유형별정보〉구술(음성)〉민요
http://www.jst.re.kr/digitalArchive.do?cid=210402
http://www.jst.re.kr/digitalArchiveDetail.do?cid=210402&mid=RC00008640&menuName=구술(음성)>민요

 

☞진관훈은? = 서귀포 출생, 동국대 경제학 박사(1999), 공주대 사회복지학 박사(2011), 제주특별자치도 경제특보 역임, 현 제주테크노파크 수석연구원, 제주대학교 출강. 저서로는 『근대제주의 경제변동』(2004), 『국제자유도시의 경제학』(2004), 『사회적 자본과 복지거버넌스』 (2013), 『오달진 근대제주』(2019)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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