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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동의 현장-남기고 싶은 이야기] 신구범 전 제주도지사(32)

지금도 돌이켜 보면 무엇엔가 홀린 듯 하기도 하다. 잠결에 진땀을 흘릴 때도 있다. 하지만 난 절박했다. 그건 분명 내 의지였다. 갈 수 있는 모든 길이 막힌 상황에서 내가 선택한 ‘최후의 출구’였다. 숙명처럼 다가온 일이다. “안일한 불의의 길보다 험난한 정의의 길을 걸어야 한다”는 신조는 나에게 분연히 맞서라고 요구했다. 조국 대한민국의 부름과 은혜로 살았던 나로선 그저 한 시대의 정권에 의해 도륙날 지도 모를 나라의 운명을 조금이라도 비틀어야 했다. 국회 사상 초유의 일이라고 불려진 ‘국회 할복사건’-. 이제 그 시절에 얽힌 내 사연을 정리한다.

 

 

1999년 8월 임시국회 개원에 대비해 농림부와 손잡은 농협중앙회와 이에 맞서는 축협중앙회 간의 싸움은 더욱 치열해져갔다. 정치권은 물론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인적, 물적 자원과 인맥 등을 총동원해 임시국회 개원에 대비했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비열했던 것은 농림부가 소위 64개 농민단체로 구성된 ‘협동조합 개혁 범농업인 시민연대(협개연)’을 만들어 농·축협 중앙회 통합을 위한 전위도구로 써먹었다는 사실이다. 이 협개연의 대표는 60억원 이상의 부실경영을 했던 전 경남낙협의 조합장이었고, 참여한 단체가운데는 농협중앙회, 한국농업경영인연합회도 있었지만 대학교 부설 대학원 경영자 과정의 원우회들도 다수 포함돼 있었다. 관제조직이나 다름 없었다.

 

한편 정부의 잘못된 협동조합 개혁에 반대하는 한국사회발전실천심의협의회(대표 김병태), 참여민주사회 시민연대(대표 김중배 전 MBC 사장), 민주화를 위한 전국교수협의회(대표 손호철 교수), 민주노총(위원장 이갑용·단병호), 전국농민회총연맹(의장 정광훈) 등이 ‘한국협동조합 개혁 국민연대’를 구성해 올바른 협동조합 개혁방안으로 농정활동을 하는 중앙회와 농·축협별 독립법인 연합회 체제, 그리고 신(信)·경(經) 분리를 주장하고 나섰다. 그러나 이 국민연대는 축협과는 별개의 활동을 했다. 내가 축협중앙회장에 취임한 직후인 1999년 7월13일 축협중앙회는 국회에 연합회안과 신·경분리를 내용으로 하는 입법청원을 했지만 국민연대는 별도로 마련한 입법안 청원을 유보해버렸다.

 

국회 농림해양수산위원회에서는 사안의 중대성에 비추어 사태가 심상치 않은 방향으로 진전되자 공청회에 이어 농·축협 중앙회장의 통합법안에 대한 입장을 청취하고 질의하는 기회까지 마련했다. 그러나 상임위원회가 중재안을 마련하는 데는 실패했다. 법안심의 소위원장은 한나라당의 김기춘 의원이었지만 실질적으로 법안 검토는 과거 재야시절 농촌·협동조합 운동가였던 민주당의 이길재 의원과 한나라당 이우재 의원에게 위임돼 있었다. 그렇기에 나는 이들과 몇차례 만나 실무적으로 단순한 기득권 차원이 아니라 차제에 내가 농림부 농정국장, 기획관리실장 시절 꿈꿨던, 농민이 협동조합의 실질적인 주인이 되는 소위 협동조합 기본원칙으로 농협과 축협이 되돌아가야 한다는 축협의 입장을 반영시키고자 노력했다.

 

두 의원은 ‘축협연합회’ 안은 받아들일 수 없지만 대신 준독립법인 수준으로 보장하는 장치를 하는 한편 신·경 분리는 시한을 정한 연구과제로 통합법안 부칙에 신설하겠다고 수정안을 제시했다. 하지만 나는 이를 거부했다. 상황이 그랬다. 이길재 의원은 다음해 총선에서 공천이 불확실한 상태였고, 이우재 의원은 “한나라당 당론과 관계없이 이번 기회에 졸속이라 할 지라도 점진적 보완을 전제로 해치워야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연히 그들과의 협상에도 한계가 있을 수 밖에없다고 판단했다. 그 시절 어느 재야 협동조합 운동가가 내게 해준 말이 있다. “신 회장! 협동조합을 안다고 하는 두 의원이 오히려 걸림돌이 될 지도 모릅니다.”

 

나는 국회 농림해양수산위 개의가 연기되자 8월9일 김현욱 자민련 사무총장을 만났다. 그에게서 이번 회기에 통합법안 처리가 유보되도록 자민련이 확실한 입장을 당론으로 정했다는 확답을 받았다. 자민련이 반대하면 통합법안 처리는 물 건너가는 것이다. 바로 그날 오후 국회 한나라당 이부영 원내총무로부터 이번 회기에는 농·축협 통합법안을 처리하지 않기로 한 방침을 통보받았다. “신 회장! 총무회담에서 합의된 사안이니 정기국회 대책을 잘 세우세요.”

 

그에게 크게 감사하다고 말하고 그의 방을 나왔다. 축협중앙회장에 취임한 지 한 달만에 ‘법안처리 유보’라는 성과를 이뤄낸 것이다. 밤낮없이 뛰었던 축협가족들에게 진심으로 감사했다. 그러나 결과는 “밤새 안녕하십니까?”였다. 결론은 단 하룻만에 뒤집혔다.

 

이번 국회 임시회 회기 중 김대중 대통령이 법안을 명기해 입법처리를 지시한 통합방송법 등 소위 ‘국민의 정부’가 추진하는 11개 개혁법안을 방송인들의 가두시위와 한나라당의 비협조로 단 한건도 처리할 수 없게 되자 ‘농·축협 통합법’이 돌연 대통령 보고용으로 등장한 것이다. DJ가 지목한 11개 법안엔 들어있지도 않은 것이다. 국민회의 박상천 총무가 자민련과 한나라당에 농·축협 통합법안을 통과시켜 주면 한나라당에 대해서는 당시 김태정 검찰총장의 비리에 연루된 옷 로비 특검제를 수용하고, 자민련에겐 김종필 총리 불신임 결의안 처리가 무산되도록 협력하겠다는 제안을 한 것이다. 양당의 이긍규 총무와 이부영 총무가 이를 전격 수용, 농·축협 통합법안은 대통령 보고용 ‘속죄양’이 돼 버리고 말았다.

 

단 하룻만의 반전을 재반전으로 이끌어보고자 발이 짓무르고 입술이 부르트도록 돌아 다녀봤다. 하지만 허사였다.

 

축협중앙회장으로 취임하면서 다짐을 했다. 일이 마무리될 때까지 아내를 제주도에 남겨둔 채 혼자 기거하기로 하고 하숙방을 물색했다. 하지만 마땅한 곳을 찾지 못하다 올림픽공원 입구 맞은편 임마누엘 교회 곁에 있는 여관방에서 기거했다. 그리고 매일 그 교회에서 열리는 새벽예배에 참석했다. ‘무지한 정부의 무모한 개혁과의 싸움’에 맞서며 하나님의 도움을 고대했던 것이다. 나는 그 시절 DJ 정부가 개혁을 주창할 때마다 80년대 초 광주5·18 당시 “군인은 싸우면 이겨야 한다”는 어느 진압군 지휘관의 말을 고통스럽게 떠올렸다. 그들과 맞서던 이들이 꼭 그렇듯 상대편을 ‘절대악’(惡)으로 규정하는 게 과연 개혁인가를 곱씹어보지 않을 수 없었다. 개혁의 대상을 절대악으로 규정하면 처단을 위해 어떤 수단과 방법도 다 동원하는 것이다. 법의 이름만 있으면 되는 것이지 실질적 법치주의나 절차적 민주주의는 일고의 가치도 없어지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사술(詐術)이 판을 치게 된다. 농·축협 중앙회 강제통합도 그렇듯 국민의 정부가 추진하는 개혁체제 안에서 저질러지는 개혁과오의 불행한 산물이 됐던 것이다.

 

축협중앙회를 없애는 개혁성과를 올리고 싶었던 당시 정권은 감사원의 감사를 동원했다. 하지만 축협감사 결과는 총 62건의 지적사항 중 검찰 수사의뢰는 단 1건에 불과했고 그것마저 1심에서 선고유예 판결이 내려졌다. 대부분이 주의·통보 처분이었는데도 농림부 장관의 의도된 국무회의 발언, 대통령의 질책, 언론의 과장보도 유도 등으로 마치 축협중앙회가 대표적인 비리·부실의 온상인 것처럼 여론몰이를 했다. 축협의 통합반대를 마치 임직원만 구조조정에 반대하는 조직이기주의인 것처럼 매도하면서 국민을 속였다.

 

“하나님! 어제는 너무나 감사한 날이었는데 오늘의 반전이 주는 뜻은 무엇입니까?”
고통 속에서 묵상하는 가운데 축협중앙회장 취임 당시 ‘만약 내가 통합반대에 실패하면 어떻게 할 것인가“를 고민할 때 ’할복한다면?···‘이라고 막연하게 생각했던 일이 순간적으로 떠올랐다.

 

평소에 많은 조언을 해오는 어느 정보기관의 간부가 만나자고 연락이 왔다. 그는 국회 농림해양수산위 자민련 소속 의원 중 농·축협통합법안 처리에 반대하는 의원들을 교체하고 표결할 예정이므로 한나라당 의원 중심으로 마지막 대책을 세워야 할 것이라고 귀띔해 줬다. “만일 신 회장이 저지하는데 실패하면 저들은 신 회장을 잔인하게 조치할 것입니다. 나는 저들을 잘 압니다”고 했다.

 

8월12일 국회 농림해양수산위에서 농·축협 통합법안 처리를 시도할 운명의 날이 밝았다. 나는 한나라당의 이부영 총무와 자민련의 김현욱 사무총장을 차례로 만나 보았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은 변해 있었다. 기가 막혔다. 원칙과 정의가 아니라 정파의 이익을 위해 ‘딜’로 잘못된 개혁을 용인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로 인해 무너지는 한 조직을 보며 DJ 정부의 모든 개혁을 실패로 몰아가는 싹을 틔우고 있었던 것이다.

 

국회 농림해양수산위 회의실 맞은 편 계단 입구에 앉아 하루 종일 기도하며 하나님께 매달렸다. 그 뒤로 민주당 박상천 원내총무와 자민련 이긍규 원내총무가 수시로 회의실에 들락거렸다. 기도하는 중에 내 마음 속에 “너에게 기회를 주는데 이 기회를 피하지 말라”는 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알겠습니다. 하겠습니다.”

 

 

 

 

국회 밖으로 나가 문구점에서 칼날이 10cm 쯤 되는 공업용 칼을 구입했다. 당초 사무용 칼을 구입하려 했지만 실패해선 안된다는 생각으로 공업용으로 바꾼 것이다. 그리고 국회로 다시 들어와 아내에게 두 차례 전화를 했다.

 

“식사는 했어? 일이 뜻대로 되지 않더라도 당신 놀라지 않았으면 해.”
아내와 함께 살아온 날들, 그리고 나를 전능자처럼 믿고 함께 살아온 아내가 나 없이 살아가야 할 날들을 생각하며 나는 마음 속으로 울면서 아내에게 용서를 구했다. 아이들에게도 미안함이 컸다. 뒷날인 13일은 미국에 공부하러 먼저 가 있는 둘째 아들(신용규·외무고시에 합격한 뒤 미국 와튼스쿨 수학)을 따라 며느리와 손자가 미국으로 출국할 예정이었다. 아이들이 출국하는 걸 배웅하러 아내는 12일 오후 서울로 올라올 예정이었다. “오지 말라”고 말하곤 눈물을 감췄다. "사랑하는 달링! 참으로 미안하구나. 용서하거라."

 

저녁 9시 조금 지나 속개된 국회 농림해양수산위원회에서 농협중앙회장 곁에 앉아있던 나는 김기춘 법안심사소위원장의 심사보고가 끝나자마자 그가 제 자리로 돌아가기 전에 자리에서 일어나 회의실 한 가운데로 걸어나갔다. 여·야 의원들에게 ‘감사하다’고 정중히 인사를 건넸다. 그리고 양복 단추를 풀고는 왼쪽 옆구리에 칼을 힘껏 꽂아 오른쪽을 향해 그었다. “하나님! 저를 받으시옵소서.”

 

김성훈 농림부 장관과 14명의 국회의원들이 보는 앞에서 나는 피를 뿜으며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나는 국회의사당 인근 성모병원 수술실로 실려 가면서도 울면서 “축협이 불쌍해”라고 했다고 한다. 봉합수술은 2시간에 걸쳐 이뤄졌다. 수술상태는 소장과 장간막이 손상돼 출혈이 많아 4병 정도의 혈액이 투여되는 등 위험한 고비가 수차례 있었다고 들었다. 그 때 언론보도를 보니 수술을 집도했던 여의도 성모병원 김응국 외과과장은 당일 밤 12시쯤 기자회견에서 “25년 동안 처음 보는 깊은 상처다. 배꼽 10cm 윗 부분이 좌우로 39.5cm, 10cm 깊이로 찢어지고 소장의 절반정도가 밖으로 노출되고 손상된 점으로 미뤄 강한 자살의지를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그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김영진 위원장과 농수산위 위원들은 그날 밤 농·축협 통합법안을 통과시켰다.

 

과격했다는 점을 인정한다. 소명의식에 사로잡힌 나머지 ‘도가 지나쳤다’는 지적에 대해서도 공감한다. 하지만 그 시절 난 출구가 없었다. 아니. 그것이 유일한 출구였다. 축협중앙회장이란 사람이 비겁하게 그저 굴복하고 한탄만 할 생각은 없었다. 일이 실패했다는 걸 핑계로 짐 싸서 제주로 가버린다는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누구도 말하지 읺는다고 해서 나 역시 숨죽일 생각은 없었다. DJ정부의 위세에 눌려 언론과 종교세력을 포함한 소위 민주세력들의 침묵과 방관, 정치권의 정략적 야합, 그리고 국민들의 오해 속에서 이 나라의 무고한 백성인 축산·축협인들이 무자비한 공권력에 짓밟히는 상황을 그대로 용인할 용기가 내게는 없었다. 성경에 "친구를 위해 목숨을 버리면 이에 더 큰 사랑이 없느니라"는 구절이 있듯이 나는 난파선의 선장처럼 축협의 수장으로서 그들의 분노와 패배를 함께 나누어야 하는 게 도리라고 판단했다. 진실을 알리기라도 해야 했다.

 

올바른 협동조합 개혁과 축산업과 축협의 자존을 위해 함께 투쟁하며 많은 어려움과 불이익을 당해야 했던 축협가족 모두에게 이 지면을 빌려 감사와 위로를 드린다. 그들의 자발적 투쟁이 없었다면 나는 지금 이글을 쓸 수 없었을 것이다. 이범섭 부회장과 황정환 부회장은 정부의 고발로 그 후 나와 함께 축협법 위반죄로 재판을 받았다. 할복사건 이후 축협은 그해 9월22일 헌법재판소에 통합법이 결사의 자유와 재산권을 침해했다는 이유로 헌법소원을 제기했다. 헌법재판소는 그해 10월13일 ‘이유가 있다’고 판단, 심의에 들어갔다.

 

 

그 시절 난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권력이 우리를 봉쇄하고 언론이 우리를 아랑곳하지 않았다. 국민여론은 축협을 나쁜 조직으로 알고 있고, 정치권은 배신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어떤 방법이 있었겠는가”라고 반문했다. “정부 내 기구도 아니고 정부 투자기관도 아닙니다. 순수한 민간단체인데다 정부의 출자는 단 한 푼도 없습니다. 축협을 개혁하던지 축협을 다른 곳에 통합을 하던지 그런 것은 조합원들이 자율적으로 결정할 문제인데 축산농민들이 푼돈 아껴가며 투자하고 피땀 흘려 가꿔온 사업과 재산을 하루 아침에 송두리째 갖고 가겠다는 게 말이 됩니까? 29만명 조합원의 반대에도 상관 없이 그러겠다는 게 사회주의가 아닌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가능한 일입니까?”

 

‘할복사건’으로 뒤늦게 관심을 가진 언론에게 처절히 토해낸 내 호소였다. <33편으로 이어집니다>
 

 

☞신구범 전 제주도지사

 

=1942년생. 오현고를 나와 육군사관학교 4년을 중퇴, 1967년 5회 행정고시에 합격해 공직자로 입문했다. 제주도 기획관, 주이탈리아 한국대사관 농무관, FAO(국제식량농업기구) 한국교체수석대표, 농림수산부 축산국장, 농업구조조정정책국장, 기획관리실장을 거쳐 YS정부 시절인 1993년 12월 제29대 제주도지사로 취임했다.

 

이어 첫 민선 지방선거인 95년 6·27선거에선 무소속으로 출마, 당선돼 31대 지사를 역임했다. 그러나 98년, 2002년 두 번의 제주지사 선거에선 연거푸 낙선의 고배를 마셨다. 그후 축협중앙회장을 거쳐 친환경 농업회사법인인 (주)삼무와 전시판매장인 삼무힐랜드를 운영했지만 지사 재직시절 뇌물수수사건에 휘말려 2년여 수감된 뒤 풀려났다. 삼무힐랜드는 수감기간 중 문을 닫았다.

 

제주삼다수와 관광복권, 제주국제컨벤션센터, 제주교역, 제주세계섬문화축제 등이 그의 지사 재직시절 작품이다. 현재 제주생태도시연구소 이사장직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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