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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동의 현장-남기고 싶은 이야기(2)] 신구범 전 제주도지사

1967년 8월17일 사무관급으로 제주도청에 첫 출근을 하고 나서 며칠 뒤.

 

내가 받은 첫 지시는 밤잠을 설치도록 만들었다. 한 여름에 “월동대책 세우시오?”란 말에 난 아득했다. 솔직히 며칠간 제대로 잠을 못 잤다. “도대체 무얼 어떻게 하란 소린가?” 잠자리에서도, 사무실에 앉아서도 도무지 궁리가 나오지 않았다. 이리 저리 물어가면서 하나하나 대책이란 걸 만들어 보고했다. 하지만 결과는 뻔했다.

 

이군보(나중 제주도지사 역임) 실장님의 눈빛은 차가웠고, 이곳 저곳을 뜯어 고치는데 꼼꼼함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렇게 그분은 나를 꼼꼼하게 가르쳤다. 아직도 난 그 분의 성실과 진지, 미래를 보는 혜안에 감탄을 금치 못한다.

 

최근에 그 분을 뵌 적이 있다. “그때 저를 그렇게 가르쳐 주신 것에 대해 지금도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말을 전해드렸다. 그 분은 그저 지긋이 웃기만 했다.

 

나는 그렇게 제주에서 공직생활을 시작해 6년여의 세월을 보냈다. 그 기간 중 지역계획과장, 기획관을 역임했다. 지역계획과장 시절엔 청와대로 파견, 제주를 더 자세히 들여다 볼 수 있었다. 정소영 경제수석 밑에서 제주관광종합개발계획의 밑그림을 그렸던 경험은 제주의 원대한 비전을 설계해 보고 싶었던 내 운명의 시작이었는지도 모른다.

 

 

제주에서의 공직생활은 차후 더 얘기할 기회가 올 것으로 본다.

 

그보단 관선 지사로 제주에 부임하던 시절의 얘기를 먼저 꺼내려 한다. 그 때 가졌던 생각을 먼저 말씀 드리다 보면 내 인생사와 이면에 숨겨진 얘기들이 자연스레 드러날 것이기 때문이다.

 

난 1974년 3월 정부부처인 농림부로 옮겨 갔다. 다행히 능력을 인정 받아 축산국장, 농업구조조정책국장을 거쳐 기획관리실장까지 올라섰다. 그러던 중 1993년 2월 최인기 내무부 차관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좀 보자’는 것이었다. YS가 당선돼 문민정부가 출범하기 직전이었고, 전국 시·도지사를 교체할 예정인데 내가 부담이라는 것이었다. 관례상 1급 공무원이 가야 하는데 난 그때 2급 공무원 신분이었다.

 

그는 “일단 현 우근민 지사를 유임시키고, 1급으로 승진시키겠다. 후일을 보자”고 말했다. 나중에 할 얘기지만 YS가 당시 날 눈 여겨 보았던 것이다. 그저 ‘감사하다’고 말하고 시일이 흘렀다. 정부 각료 개편 시기가 오면 심심찮게 내가 차관으로 승진한다는 설도 흘러 나왔다. 당시 현역 국회의원이던 현경대 의원이 아내(김시자 여사)에게 심심찮게 “차관 승진이 유력시된다. 준비하시라”는 말씀을 전해오기도 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갔다.

 

그리고 난 1993년 12월 28일 김영삼 대통령으로부터 제주도지사로 임명됐다.

 

당일 오전 10시 청와대. ‘신한국창조’와 서슬 퍼런 사정(司正)의 바람이 불 때 YS가 제주도지사 임명장을 줬다. 임명장 수여식장에서 나를 비롯해 신임 시·도지사들에게 “변화와 개혁을 위한 대통령의 분신이 되라”고 당부했다. 곧바로 임지에 내려가도록 명 받았다. “바로 내려 가시오.” 딱 한마디였다.

 

친정격인 농림부에 들러 간단히 인사하고 바로 아내와 함께 제주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아내는 상기된 얼굴이었지만 하늘에서 바라보는 구름은 내 마음과도 같았다. “저 구름 너머 보물섬이 있다. 아니 보물섬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의무감이 용솟음쳤다. 그러다 보니 제주에 가서 우리 도민들에게 무슨 말씀을 드려야 하나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실 부임하기 전날 내 발령소식을 들은 당시 송무훈 내무국장(후일 서귀포시장)이 서울로 찾아왔고, 그가 건네준 29대 제주도지사 취임사가 비행기 안에서 떠올랐다. 새로 부임하는 도지사의 시책과 도정방향까지 미리 취임사에 담아 온 공무원들의 충정이 매우 고마웠다.

 

 

그러나 전날 밤 그 취임사는 그저 참고만 했다. 밤새 새 취임사를 직접 썼다. 제주도민과 공무원들에게 내가 해야 할 책무에 관한 이야기를 스스로 정성을 들여 말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죄송스런 마음이지만 그 때의 생각을 전하기 위해 당시 취임사를 이 자리에 옮긴다.

 

 

 

50만 도민 여러분! 그리고 공직자 여러분!

 

우리는 지금 변화와 개혁이라는 역사적 소명과 국제화, 개방화라는 새로운 도전을 감당해 내야 할 중차대한 시점에 서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쌀보다도 더 소중한 우리의 젖줄인 감귤이 ‘시장개방’이라는 도전에 직면해 있습니다. 지난 30여 년 간 혼신의 힘으로 개발한 제주관광은 이제 어려운 상대들과 국내외 관광시장에서 과거보다 더욱 치열한 경쟁을 해야 합니다. 그것도 경쟁의 준비가 채 안된 상태에서 말입니다.
지난 1970년대 이래 우리 제주 온 천지를 휩쓴 소위 개발열풍이 만들어낸 지역경제의 거품이 아직도 남아 있습니다. 그 거품 속에서 버려져간 우리 조상 전래의 부지런하고 소박하고 그리고 정직한 ‘조냥정신’을 이제 되찾아야 할 때가 또한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새로운 도전과 해야 할 일들에 대한 우리의 과제는 지금까지 해오던 방식과 행태로는 풀리지가 않습니다. 새로운 변화와 개혁을 통해서 이루어내야 할 우리들의 과제들이기 때문입니다.
지난 밤 저는 내 고향 제주를 위하여 여러분들과 더불어 “무슨 일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하고 밤잠을 설쳐가며 생각했습니다.

 

많은 일들이 우리 앞에 있습니다.

 

감귤산업과 관광산업을 중심으로 산업의 경쟁력을 향상시키고 상품의 질을 개선하는 한편 수출을 통한 시장확대와 수출부가가치 제고 등으로 도민들의 안정적인 소득원을 확보하고 개발하는 일, 지역 간 균형개발로 도민의 편익을 도모하고 다양한 농외소득원을 창출하는 한편 문화공간을 확대해 나가는 일, 그리고 규제위주의 행정제도를 개선하고 행정조직의 정비·보강과 공직자 교육의 내실화를 통해서 도민에 대한 행정서비스의 질을 향상시켜나가는 일 등이 그것입니다.
한마디로 우리에게는 우리의 2대 지주산업인 감귤과 관광을 비롯해서 여러 가지 사업에 몸담고 있는 50만 도민을 위해서 해야 할 일들이 있습니다.
우리 50만 도민이 각자 생업을 통해서 소득과 생활수준을 높이며 쾌적한 문화환경 속에서 살아가도록 하는 게 우리가 해야 할 일들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러한 일들을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생산성을 높이는 일, 그리고 능률을 높이는 일에 우리 공직자들은 몸을 던져 노력하고 고뇌해야 합니다. 감귤과수원의 자동방제시설을 개발한 우리 농촌지도사가 그 좋은 예가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도민들이 불필요한 규제 때문에 불편해 하면 그 규제는 풀어야 합니다. 획일적인 지원기준이 현실에 맞지 않으면 맞도록 융통성 있게 우리가 조정을 해 주어야 합니다. 무익한 집단이기주의에 대해서는 논리와 당당함을 가지고 맞서야 합니다. 그러나 이해가 충돌할 때에는 적절한 조정기능을 발휘할 수 있어야 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우리의 변화된 생각과 개혁된 자세만이 이러한 일들을 위한 우리 직무의 질, 그리고 도민을 향한 봉사의 정도를 높이게 될 것입니다.

 

도민 여러분!

 

화산회토인 박토를 일구며 쌀농사가 없어도 육지의 농가소득에 뒤지지 않는 소득을 올리고, 아름다운 관광자원을 잘 보전하면서 관광산업을 일으켜 온 여러분들을 저는 참으로 존경하며 자랑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저는 만나는 사람에게 마다 제주가 발전하는 가장 주된 이유는 새로운 상황에 도전하는 제주인의 뛰어난 전환능력(轉換能力, the capacity to transfer)이라고 이야기해 줍니다.
개발의 과정에서 우리 안에 누적된 잘못된 가치관, 우루과이라운드로 대표되는 개방화, 국제화라는 도전이 이러한 우리의 전환능력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지금이 바로 이러한 우리의 저력이 발휘되어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생각을 바꾸고 조직을 합하고, 공동으로 힘을 모아 시장에 대응하는 일들이 앞으로 감귤산업을 발전시키고 개방에 오히려 적극적으로 대응하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도민 여러분! 그리고 공직자 여러분!

 

1974년 이곳 제주도청을 떠난 이래 20년 만에 고향으로 되돌아와 봉직하게 된 저는 새롭게 듣고, 보고 그리고 여러분들의 가르침으로 그 동안의 공백을 메워가면서 도정을 추진하고자 합니다.
저는 도지사로서 모든 공직자 여러분들과 더불어서 성실하고 정직하게 맡은 바 소임을 다 할 것을 다짐 드립니다.
도민 여러분, 그리고 공직자 여러분의 많은 이해와 사랑을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취임사를 통해 난 도민과 공직자에게 변화하는 시대에 중단 없는 제주의 역사발전을 이루자고 제안했다. 합리성과 경쟁을 바탕으로 구조조정과 개혁, 그리고 의식의 변화를 호소했다. 미래를 위해 오늘까지 우리가 가졌던 기득권과 고정관념을 벗어나 우리 제주인 전래의 전환능력을 발휘하자고 부탁했다. 공직자들에게는 변화와 개혁으로 개방이라는 도전에 대응하자고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3편으로 이어집니다>
 

 

신구범 전 제주도지사

=1942년생. 오현고를 나와 육군사관학교 4년을 중퇴, 1967년 5회 행정고시에 합격해 공직자로 입문했다. 제주도 기획관, 주이탈리아 한국대사관 농무관, FAO(국제식량농업기구) 한국교체수석대표, 농림수산부 축산국장, 농업구조조정정책국장, 기획관리실장을 거쳐 YS정부 시절인 1993년 12월 제29대 제주도지사로 취임했다.

 

이어 첫 민선 지방선거인 95년 6·27선거에선 무소속으로 출마, 당선돼 31대 지사를 역임했다. 그러나 98년, 2002년 두 번의 제주지사 선거에선 연거푸 낙선의 고배를 마셨다. 그후 축협중앙회장을 거쳐 친환경 농업회사법인인 (주)삼무와 전시판매장인 삼무힐랜드를 운영했지만 지사 재직시절 뇌물수수사건에 휘말려 2년여간 수감도중 삼무힐랜드는 문을 닫았다.

 

제주삼다수와 관광복권, 제주국제컨벤션센터, 제주세계섬문화축제 등이 그의 지사재직시절 작품이다. 현재 제주생태도시연구소 이사장직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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