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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동의 현장-남기고 싶은 이야기(3)] 신구범 전 제주도지사

1993년 제주도지사가 돼 고향에 돌아온 건 사실 나에겐 꿈이었다. 어찌 보면 나같은 놈이 그리 될 수 있었다는 것 자체가 신기할 정도이기도 하다. 육군사관학교를 중퇴한 학력이지만 사실 난 고등학교도 제대로 다닌 처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 고향(조천읍 신촌리) 내 집은 찢어지게 가난했다. 다른 집은 밭이라도 있고, 무언가 풀칠이라도 할 거리가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우리 집은 밭떼기 하나 없었고, 솔직히 겨우겨우 연명하다시피 생활하는 처지였다. 아버님 일거리 따라 움직이다보니 초등학교를 6곳이나 다녔고, 그래도 다시 고향에 정착해 어찌어찌 조천중학교까진 졸업했다. 쑥스럽지만 중학시절 ‘공부 1등’ 자리는 놓쳐보지 않았다. 그러나 집안에 돈이 없다보니 고교 진학 얘기는 입에서 꺼내기도 어려운 형편이었다.

 

중학교를 마치고 그렇게 1년을 놀았다. 그렇게 아무런 꿈도 없이 세월을 보내는 내 처지가 그렇게 원망스러워 본 적이 없다. 친구들이 멋진 교복을 입고 다니는 모습을 보면 기가 죽을 수 밖에 없었다. 솔직히 눈물 나도록 공부를 하고 싶었다. “제발 학교 좀 보내달라”고 그렇게 떼를 썼지만 아버님에게선 차가운 답만 돌아왔다. 하지만 나는 당시 사학의 명문이자 내 주변 우수한 친구들이 다니던 오현고에 노크를 했다. 물론 집안 모르게 슬며시 가서 시험을 친 것이다.

 

합격통지서가 집으로 날아들었다. 그것도 특대생으로 합격했다. 특대생은 지금의 장학생이다. 입학금과 1학기 등록금을 면제받은 것이다. 그때 제주시내가 아닌 시골출신 중에서 특대생으로 합격한 건 나와 후일 제주대 총장을 지낸 부만근씨 둘 뿐이다. 이제 부모도 더 이상 날 말릴 수 없었다. 그렇게 수업료를 면제받고 학교를 다니던 나는 2학년 1학기 특대생 시험에서 보기 좋게 떨어졌다. 이제 집에서 학비를 만들어 내야했다. 부모는 완강했다. ‘돈이 없다’는 것이다. 더 이상 방법이 없었다. 결국 나는 가출을 했다. 그것도 "무언가 기회가 있을 지도 모른다. 그래 그곳에서 기회를 만들어내자"는 마음으로 서울로 갔다.

 

 

찾아간 곳은 서울의 용산. 서울에서 스스로 돈을 벌면서 고학이라도 할 생각이었다. 물어물어 제주분들이 많이 산다길래 무턱대고 그곳으로 갔다. 어찌어찌 돈을 좀 벌면 학비는 충분히 보탤 것이란 생각이었다. 그 당시 용산엔 교통부 시설국이 있었다. 그 담벼락에 ‘하꼬방’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말이 하꼬방이지 리어카 위에 허술하게 사람이 누울 수 있도록 합판쪼가리를 이어 붙여 만든 일종의 이동식 판자집이다. 바퀴가 달려 있어 단속이라도 뜨면 그냥 딴 곳으로 옮기면 그만인 집이다. 난 그곳에 거처를 마련했다. 물론 ‘오야붕’격인 하꼬방의 주인은 따로 있었다. 내가 그 곳에 거처할 수 있는 조건은 ‘앵벌이’를 하는 것이다.

 

그 때가 아마 1960년인 것으로 기억한다. 그때 군인들은 따로 워커모양의 군화를 지급받지 못했다. 농구화모양의 신발만 신을 뿐이었다. 그래서 대부분의 군인들은 휴가를 나오면 ‘사제’로 워커모양의 군화를 사 신는 게 소원이던 시절이다. 내 역할은 용산역 앞에서 휴가를 끝내고 돌아오는 그런 군인들을 호객, 하꼬방 주인인 우리의 ‘왕초’에게 데려가는 것이었다. 지금으로 치면 ‘삐끼’역할이다. 물론 그들에게 파는 군화 역시 제대로 된 제품도 아니다. 미군부대에서 버려진 군화를 주워모아 신발끈을 바꾸고 밑창만 갈아 붙인 신발이다. 겉을 그럴싸 하게 보이게 해야 했기에 양초를 바르고 다시 구두약을 덧발라 언뜻 보면 새 군화로 보인다. 하루에 3명 이상 그런 군인들을 데리고 와야 세끼 밥을 얻어먹을 수 있었다.

 

돈이 궁하다보니 그 일대에서 10원짜리 껌을 100원에 팔기도 했다. 물론 내 뒤엔 체격 좋은 몇몇이 눈을 부라리며 엄호하고 있고, 으슥한 골목길이 내 영업장소였다. 벌이가 잘 돼 어떨 땐 용산의 성남극장에 가 조조할인 영화 2편을 보는 행복감에 젖기도 했다. 불량배들이나 하는 짓이었다.

 

시간이 흐르자 아무래도 속이 내키지 않았다. 나쁜 구렁으로 빠져 들어가고 있다는 생각에 잠결에도 땀이 흘렀다. 그곳을 나와 신문배달로 벌이를 바꾸려고 했다. 한 걸음에 신문보급소를 찾아가 배달원 문의를 했다. 그랬더니 이번엔 보증인을 내세우란다. 막막했다. 하지만 불현듯 길거리에서 만나 뵌 고향선배가 떠올랐다. 당시 농림부 주사로 근무하던 분이었기에 든든한 ‘빽’이라고 생각해 찾아가 부탁을 했다. 하지만 그 선배는 야멸차게 거절했다. ‘공부하고 싶어 학비를 벌려고 한다’는 말을 꺼내며 사정했지만 허사였다. 너무도 서운했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용산에서 서울역까지 뛰어다니면서 신문팔이를 했다. 보급소 정식 배달원은 할 수 없었기에 가판 신문을 사서 길거리에서 파는 일을 한 것이다. 행인들에게 길거리에서 신문을 판 거다. 헌데 그것도 ‘나와바리’(구역)가 있었다. 하루는 동종업계(?) 일행 몇몇이 나를 으슥한 골목으로 끌고갔다. 흠씬 두들겨 맞았다. 눈물만 흘렀다. 공부하고 싶어, 학비를 버는 게 이리도 힘들다는 게 너무나 마음이 아팠다. 코피를 쏟으며 그 골목에서 엉엉 울었다. 매 맞은게 아파서 운 게 아니라 내 처지가 너무도 억울해 한 없이 울었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우연히 용산역 앞에서 제주도의 한 선배를 만났다. 내 처지를 듣더니 그 선배는 괜찮은 회사에 취직을 시켜준다고 했다. 한국스레트라는 회사로 당시 이름 깨나 유명한 회사다. 그 선배는 자기가 공장장도 잘 아니 ‘걱정할 것 없다’고 나를 다독거렸다. 너무도 고마웠고, 제대로 된 일자리가 생긴다는 마음에 하루 종일 그 선배를 쫓아다니며 가진 돈을 다 썼다. ‘삐끼’노릇하며 번 돈들이다. 물론 기쁜 마음으로 하루 이틀 그 선배 뒤를 따라다니며 각종 잡일과 수발을 들었다. 그리고 다음날 오전 8시 그 선배가 말한 데로 보무도 당당하게 그 공장을 찾아갔다. 그러나 돌아온 답은 ‘미친 놈’이었다. 발길로 걷어차이면서 공장 밖으로 쫓겨났다.

 

주머니에 쥔 돈을 모두 날렸다. 막막했다. 용산역 근처 ‘하꼬방’에 걸터앉아 멍하니 하늘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구세주가 나타났다. 조천중학교 때 은사이시던 황인욱 선생님이다. 황 선생님은 당시 다니던 학교를 휴직하고 다시 서울에서 경희대에 편입, 대학에 재학중인 신분이었다. 그 분이 말했다. “너 이게 무슨 꼴이냐? 1등 하던 신구범이가 여기서 무얼 하고 있나?” 무섭게 그 분은 눈을 부라리셨다. 그리곤 내 손을 잡고 내가 진 빚들을 모두 갚아주셨다. 난 그 용산역 일대 식당 몇 곳에 외상밥값을 깔아둔 빚쟁이였다. 선생님은 그걸 다 갚아주셨다. 그리곤 내 손에 또 돈을 쥐어주셨다. “고향으로 내려가라. 여긴 네가 있을 곳이 아니다.”

 

내 눈엔 이미 흥건히 눈물이 고였고, 어느덧 뺨으로 두줄기 눈물이 흘러버렸다.

 

다시 고향으로 돌아온 나는 부모님의 도움으로 겨우 오현고에 다닐 수 있게 됐다. 내 초·중학교 동창들은 오현고 8회, 고교입학동기는 오현고 9회. 이어 졸업동기는 다시 오현고 10회다. 3년을 아우른 친구들을 두게 된 내 사연이다. <4편으로 이어집니다>

 

신구범 전 제주도지사

=1942년생. 오현고를 나와 육군사관학교 4년을 중퇴, 1967년 5회 행정고시에 합격해 공직자로 입문했다. 제주도 기획관, 주이탈리아 한국대사관 농무관, FAO(국제식량농업기구) 한국교체수석대표, 농림수산부 축산국장, 농업구조조정정책국장, 기획관리실장을 거쳐 YS정부 시절인 1993년 12월 제29대 제주도지사로 취임했다.

 

이어 첫 민선 지방선거인 95년 6·27선거에선 무소속으로 출마, 당선돼 31대 지사를 역임했다. 그러나 98년, 2002년 두 번의 제주지사 선거에선 연거푸 낙선의 고배를 마셨다. 그후 축협중앙회장을 거쳐 친환경 농업회사법인인 (주)삼무와 전시판매장인 삼무힐랜드를 운영했지만 지사 재직시절 뇌물수수사건에 휘말려 2년여간 수감도중 삼무힐랜드는 문을 닫았다.

 

제주삼다수와 관광복권, 제주국제컨벤션센터, 제주세계섬문화축제 등이 그의 지사재직시절 작품이다. 현재 제주생태도시연구소 이사장직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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