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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동의 현장-남기고 싶은 이야기(6)] 신구범 전 제주도지사

세상 이치를 도통 알 수 없을 때가 있다. 그렇게 어떤 자리에 오르고자 할 땐 그리 어렵더니 느닷없이 농림수산부 안에서 초고속 승진을 거듭하는 인물이 됐다. 전두환 정권 시절 난 마치 물을 만난 듯 주요보직을 꿰차기 시작했다. 농림수산부 총무과장이 되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난 농업공무원교육원 교수부장이 됐다. 1983년 내 나이 만 41세에 불과하던 때다. ‘똥차’ 취급 받으며 거의 쓰레기 하치장으로 밀려나는 격이었던 내가 농림부 내에서 최연소로 국장 자리에 오른 것이다. 이걸 당시 권력의 실세였던 보안사의 두 친구 덕으로 봐야 할 진 모르겠지만 어쨌든 난 최선을 다했다. 늦은 밤 술 한잔을 걸치고 한풀이나 하던 과거의 내가 아니었다. 주어진 기회를 살려 최선을 다해, 보란 듯이 능력을 입증해 보여야 했다. ‘제주 촌놈’에게 이제 기회가 온 만큼 난 승부수를 던져야 했다.

 

그 때쯤 기억나는 에피소드가 있다. 경기도 과천시에 정부 제2청사가 들어서던 1983년 무렵이다. 농림부는 과천행이었다. 서울시내에서 출퇴근하는 건 무리였고, 공무원들의 이주를 권장해 과천시내에 아파트 한 채를 특별분양 받았다. 초등학생인 막내, 중학생인 둘째, 고교생인 첫째 등 세 아들녀석의 전학문제가 있었지만 이사를 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아이 진학할 곳을 알아보니 정작 큰 아이가 갈 학교는 한일여고 하나 뿐이었다. 원래 남녀공학으로 한일고였는데 이게 여학교로 돌연 개편됐고, 3학년만 남녀공학으로 운용 중이었다. 고3인 큰 아이는 그 이유로 여고 졸업생이 됐다. 더욱이 농업공무원교육원 교수부장이 되고 나서 얼마 안 돼 이번엔 또 주 이탈리아대사관 농무관으로 발령이 났다. 당시 대상자 중 미국 연수를 다녀온 사람이 나 뿐이었던 지라 거역할 수도 없었다. 난감했지만 아내와 둘째, 셋째만 데리고 이탈리아로 떠났다. 대입진학을 앞둔 큰 아이를 데리고 갈 순 없었기 때문이다. 그 시절 큰 아이는 그렇게 홀로 지냈다. 아무런 뒷바라지 없이 홀로 대입 시험을 보러 갔다. 아버지로서 아직도 마음속에 남은 미안함이다.

 

이탈리아 얘기가 나온 김에 기억 하나를 더 떠올려 본다. 농무관 시절 이탈리아를 찾아 온 현경대 의원 얘기다. 88년으로 기억한다. 그는 연배가 나보다 위였지만 제주북초등학교 동창이기도 하다. 그가 돌연 로마로 찾아왔다. 상념에 잠긴 얼굴이었다. 얘기를 들어보니 총선에 출마했다가 어이없이 패배했다는 것이다. 한 방송사의 선거보도 준비과정에서 ‘황당한’ 중계사고가 벌어져 오히려 조작시비에 휘말려 일을 그르쳤다는 것이다. 대사에게 여쭙고 1주일간의 특별휴가를 받았다. 둘이서 베네치아와 로마 곳곳을 돌아 다녔다. 힘겨워 하는 그 친구의 마음이 풀리기를 고대했다. 최근에도 비슷한 일로 그가 낙선한 것으로 보여 마음이 씁쓸하다. 다른 건 잘 모르겠지만 5선 관록의 그의 역량이 언젠가 제주에서 제대로 활용될 수 있는 날이 오리라 믿는다.

 

 

어찌 됐건 내 영어실력은 그렇게 미국 유학과 이탈리아 농무관 시절을 거치며 늘었다. 농림부에서 ‘신원특이자’로 찍혀(?) 오도가도 못하다 70년대 중반 찾아간 미국 유학길에서 영어에 눈을 떴고, 5년여 기간 동안 이탈리아 한국대사관에서 농무관으로 있다보니 자연스레 영어엔 자신감이 좀 붙기 시작했다. 그러다 89년 귀국행 비행기를 탔다. 농업공무원교육원 원장 자리가 주어지더니 이번에도 얼마 지나지 않아 축산국장 자리로 옮겨 갔다. 귀국 전 유엔 산하 식량농업기구(FAO)의 한국측 교체수석대표 활동을 한 전력이 축산국장으로 옮기게 된 배경 같았다. 축산국장이 되고 나서 내가 해야 할 일이 사실상 예정돼 있었기 때문이다. 알아듣지도 못할 제주도 사투리나 입에 담으며 버벅거리던 내가 어느 틈에 ‘영어를 능수능란하게 구사하는 농림부 내 고위 공무원’이란 타이틀을 얻어가던 시점이다.

 

1989년 말 난 농림수산부 축산국장이자 한-미 쇠고기협상 한국측 수석대표를 맡았다. 사연은 이렇다. 전두환 대통령에 이어 육사 11기 동기인 노태우 대통령 시절 농림부 장관으로 같은 육사 11기인 김식 장관이 왔다. 육군 소장으로 예편, 국회에서 농수산위원장을 지낸 국회의원 출신이다. 후일 서울시장, 총리를 역임한 조순 전 총리가 경제기획원 장관을 하던 시절이었다. 그 때의 쇠고기 협상을 진행하던 때 한-미 간에는 이 문제를 제외하고 특별한 현안이 없었다. 한-미간 쇠고기 협상만 잘 마무리하면 노태우 정권으로선 ‘만세’를 부를 만한 상황이었다.

 

 

조금 더 상황을 자세히 말하면 이랬다. 우리 정부는 황인성 농림부 장관(후일 YS정부 초대 총리, 금호아시아나그룹 회장 역임) 시절인 1984, 85년 쇠고기 수입을 중단했다. 그런데 이를 놓고 미국이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T) 위반이라는 꼬투리를 달아 우리나라를 제소한 것이다. 결국 GATT는 한국과 미국이 협상을 통해 쇠고기 수입개방 일정표를 제시하라는 평결을 내렸다. 당시 안기부 등은 한-미간 쇠고기 협상에서 GATT의 평결대로 미국의 입장을 들어주자는 쪽이었다.

하지만 내 생각은 달랐다. 최근의 현실에서도 이렇게 문제가 크게 벌어질 판인데 그 당시 시장개방을 요구하는 미국의 입장을 들어줬다간 우리 농민들이 모두 거덜 날 판이었다. 김식 장관에게 보고했다. “절대로 미국의 입장을 우리가 수용해선 안 된다, 막아야 한다”고 간언했다. 그러자 김 장관은 나에게 이렇게 답했다. “당신이 책임지시오.” 영어를 능통하게 구사한다는 얘기가 김 장관 귀에도 들어갔던 터라 그는 내심 나를 기대하는 눈치였다.

 

통상적으로 외국과 협상 테이블을 만들 때 우리 측 수석대표는 외교부의 몫이다. 국익을 실현하는 대외 총괄창구 역을 하는 게 외교부라서 그렇지만 솔직히 그때 외교부는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국익 보단 권력자의 눈치를 보는 편이었다. 안기부는 권력자의 의중을 파악, 외교부가 그런 방향으로 일을 처리하도록 일종의 가이드라인을 내밀던 시대다. 그때 외교부 차관보는 홍순영(후일 외교통상부 장관 역임)씨였고, 여러 자리에서 나와 돈독한 관계를 유지해 온 분이셨다. 그 분을 찾아가 우겼다. “이번 한-미 쇠고기 협상의 한국 측 수석대표는 우리 농림부가 맡겠다. 도와주시라”고 말했다. 당돌한 요구였다. “우리 장관께서 어떤 일이 있어도 이번 한-미 쇠고기 협상에서 농림부의 입장을 관철시키라고 한다. 나보고 책임지라고 한다. 나도 죽겠다”고 통사정했다.

 

 

그리고 이 문제를 놓고 조순 경제기획원 장관과 외무부 장관, 농림부 장관이 최종 조율을 위한 테이블에 앉았다. 대통령과 육사 동기인 농림부 장관이 예상보다도 더 셌다. 김 장관은 “우리가 양보해주겠다”고 하면서 “신구범 국장과 선준영 국장이 공동으로 수석대표를 맡으면 되겠다”고 제안을 한 것이다. 서울법대 출신의 선준영 국장(후일 주UN대표부 대사, 외교통상부 차관 역임)은 당시 외교부 통상국장이었기에 한국측 수석대표를 맡는 건 기정사실이나 다름 없는 것이었다. 그런데 농림부에서 황당한 제안을 한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됐다. 그 정도만이 아니었다. 어찌된 일인지 막상 미국과의 협상테이블에 선 국장은 앉지도 않았다.

 

결국 난 한-미 쇠고기 협상의 한국측 단독수석대표로 협상에 임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이 기대했던 것 만큼 영어실력을 뽐내지 않았다. 협상에 임하기 전 여러 채널을 통해 확인한 결과 미국 측 대표단이 지치도록 유도하는 게 최선이라는 전술을 준비했기 때문이다. 며칠 동안 그들과 만나면 무조건 들었다. 어떨 땐 일부러 못 들은 체 하기도 했다. “Excuse me.", "I beg your pardon." 고작 이런 식의 영어만 늘어 놓으며 시간을 질질 끌었다. 그쪽에서 먼저 손을 들었다. 양국 대표단이 미국과 한국을 오가는 수차례의 협상 끝에 우린 한국의 입장을 관철시켰다. 하지만 미국은 그렇지 못했다. 쇠고기 시장의 문을 다소나마 한국이 열도록 할 생각이었는데 마이동풍(馬耳東風)이었고, 우이독경(牛耳讀經)만 한 셈이 됐다. 한국 측의 미국산 쇠고기 수입개방은 여전히 이른 시점인 것으로 결론이 났다. 우린 수입개방 일정표를 제시하는 대신 국영무역 형태의 쇠고기 수입쿼터로 협상을 마무리 지었다.

 

한-미 쇠고기 협상의 결과를 전해 들은 축산농가와 축산업 관계자들의 축하와 격려, 환호가 쏟아졌다. 난 졸지에 축산분야 종사자들에게 '스타'급 대우를 받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국익을 실현했다는 자부심이 컸다. 그러나 이듬해인 1990년 봄 나에겐 새로운 운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농림부 관료로서 최대의 시련이자 고비를 만나게 된 것이다. <7편으로 이어집니다>
 

 

신구범 전 제주도지사

=1942년생. 오현고를 나와 육군사관학교 4년을 중퇴, 1967년 5회 행정고시에 합격해 공직자로 입문했다. 제주도 기획관, 주이탈리아 한국대사관 농무관, FAO(국제식량농업기구) 한국교체수석대표, 농림수산부 축산국장, 농업구조조정정책국장, 기획관리실장을 거쳐 YS정부 시절인 1993년 12월 제29대 제주도지사로 취임했다.

 

이어 첫 민선 지방선거인 95년 6·27선거에선 무소속으로 출마, 당선돼 31대 지사를 역임했다. 그러나 98년, 2002년 두 번의 제주지사 선거에선 연거푸 낙선의 고배를 마셨다. 그후 축협중앙회장을 거쳐 친환경 농업회사법인인 (주)삼무와 전시판매장인 삼무힐랜드를 운영했지만 지사 재직시절 뇌물수수사건에 휘말려 2년여 수감된 뒤 풀려났다. 삼무힐랜드는 수감기간 중 문을 닫았다.

 

제주삼다수와 관광복권, 제주국제컨벤션센터, 제주세계섬문화축제 등이 그의 지사 재직시절 작품이다. 현재 제주생태도시연구소 이사장직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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