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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수첩] '신사의 팀' 제주에서 처음 벌어진 '버막' … 팬들이 '침묵' 걷어찬 날

 

이달 6일 서귀포 제주월드컵경기장.

 

어린이날 홈경기를 맞아 많은 가족 단위 팬들이 경기장을 찾았다. 그러나 제주SK FC는 강원FC에 0-3으로 완패하며 경기장엔 싸늘한 공기가 내려앉았다.

 

경기 종료와 동시에 일부 서포터즈들이 선수단 통로와 버스 앞을 가로막았다. 단순한 패배에 대한 반응이 아니었다. 무기력한 경기력, 그에 대한 해명도, 표정도 없이 경기장을 떠나는 팀의 태도에 팬들의 쌓인 감정이 터졌다.

 

 

K리그에서 '버막(버스 막기)'은 낯설지 않다. 성적 부진이나 프런트에 대한 불만이 고조될 때 전국 각지의 경기장 주차장에서 종종 벌어지는 풍경이다.

 

2023년 수원삼성이 강등이 확정된 뒤 팬들은 2시간 넘게 선수단 버스를 막고 단장에게 사퇴를 요구했다. 하지만 이번 제주 사태는 방식과 반응, 그리고 이후 전개까지 모두 달랐다.

 

논란의 중심에는 박동진 선수가 있었다. 팬들과 마주한 그는 언성을 높였고, 일부 팬은 그가 욕설을 내뱉었다고 주장했다. 당시 현장을 촬영한 영상에서는 박 선수가 팬과 언쟁을 벌이는 장면과 이를 말리는 구단 관계자의 모습이 담겼다. 여기까지는 다소 거친 상황일 수 있다. 그러나 이후 전개는 K리그에서도 전례를 찾기 어렵다.

 

 

박 선수는 특정 팬에게 다이렉트 메시지를 보내 "봤나? 내가 욕하는 거", "하지도 않은 걸로 생사람 잡지 말라"는 반응을 보였다.

 

이후 그는 "욕설을 하지는 않았지만 팬들이 오해했다면 그 부분은 인정한다. 하지만 버스를 막는 행동은 자제해달라"고 밝혔다.

 

직접 팬에게 메시지를 보내 해명과 항의를 동시에 한 것이다. 또 자신을 '13년차 제주 팬'이라 밝힌 다른 도민 팬에게는 '어이쿠', 'ㅋ' 등의 반응과 이모티콘을 섞어 보냈다. 해당 내용이 공개되면서 분노는 더욱 거세졌다.

 

SNS로 팬에게 '따지는 듯한' 메신저 대응은 한국 축구에서도 유례를 찾기 어렵다. 일부 선수들이 댓글을 통해 의견을 밝히는 일은 있어도 논란 직후 직접 찾아가 메시지를 보내는 경우는 거의 없다.

 

'세대가 달라 표현 방식이 바뀌었다'는 옹호도 있을 수 있지만 프로선수로서의 균형감각이 무너졌다는 비판은 피하기 어렵다.

 

제주SK는 2019년 강등 당시에도 팬들의 침묵 속에서 리빌딩을 시작했다. 그때도 실망은 컸지만 팬들은 등을 돌리지 않았다. 그러나 이번엔 달랐다. 팬들의 분노는 단순히 3연패, 리그 최하위권이라는 성적 때문이 아니다.

 

핵심은 신뢰다. 팬들의 뿌리 깊은 불만은 구단 운영의 방향성, 소통 방식, 그리고 점점 상업화되어가는 팀의 정체성에 있다. 주축 선수들이 이적을 반복하는 동안 구단은 명확한 설명을 내놓지 않았고, 성적보다 '굿즈 마케팅'과 영상 콘텐츠에 집중하는 모습이 반복됐다. 서포터즈들 사이에서는 '우리는 응원했지, 소비하지 않았다'는 자조가 퍼져나갔다.

 

 

경기 당일 제주월드컵경기장에는 '김학범 나가라', '팬은 언제까지 참아야 하나'는 현수막이 내걸렸고, 감독 소개가 울릴 때마다 야유가 쏟아졌다. 팬들의 인내는 그날로 끝이 났다.

 

현장에 있던 한 서포터는 "이건 단순한 경기 패배가 아니었다. 팬은 무시당했고, 선수는 팬과 언쟁을 벌였으며 구단은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팬으로서 더는 믿을 수 없는 팀이 되어가고 있다"고 말했다.

 

구단 프런트는 "경찰 출동은 우리 요청이 아닌 현장에 배치된 경찰이 자발적으로 대응한 것"이라는 해명을 내놨고, 박 선수의 SNS 대응에 대해서도 "공인의 원칙은 있으나 별도 제재 기준은 없다"고만 했다.

 

팬들의 체감과는 거리가 먼 설명이었다.

 

 

경기 다음 날, 제주SK FC 공식 서포터즈의 단체 채팅방에는 다양한 의견이 쏟아졌다.

 

한 팬은 지더라도 납득 가능한 경기를 원한다고 했다. 전술 변화와 선수 기용의 설득력, 그리고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는 태도가 중요하다고 말했다.

 

또 다른 팬은 어제처럼 무응답으로 일관하거나 경찰을 부르는 방식이 아니라 팬들과 직접 마주보고 소통하는 구단이 되어주길 바란다고 적었다.

 

특정 선수만 반복적으로 기용하고, 포지션을 무시하는 운용은 선수에게도 팬에게도 상처라는 지적도 나왔다. 백업 자원과 유망주에게 공정한 기회를 주고, 선수들이 존중받을 수 있어야 한다는 목소리였다.

 

이 발언들은 단지 패배에 대한 불만이 아니다. 구단이 가진 철학의 방향, 팬과의 관계, 선수단 운용의 공정성에 대한 문제 제기였다.

 

제주는 오랫동안 '신사의 팀'으로 불려왔다. 거친 야유 대신 박수와 기다림으로 응원하던 문화는 제주만의 자산이었다. 그런 팬들이 '버막'이라는 실력 행사를 한 것은 단순한 감정의 표출이 아니다. 더 이상 믿을 수 없다는 절박함의 표현이고, 단절된 관계에 대한 경고다.

 

이제 제주SK가 해야 할 일은 변명이 아니다. 사과문도 아니다. 팬들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고, 그 목소리에 귀 기울이며 진심으로 응답하는 것이다.

 

제주SK FC 13년 차 팬 양모씨(21·여)는 이렇게 말했다.

 

"팬은 단순한 소비자가 아닙니다. 팀의 일부이고, 존재 이유예요. 침묵이 미덕이던 시대는 끝났습니다. 지금 필요한 건 딱 하나, 진심과 행동입니다."

 

팬은 등을 돌릴 수 있다. 그리고 한 번 돌아선 마음은 쉽게 돌아오지 않는다. 이제 선택은 구단의 몫이다. [제이누리=김영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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