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공 알마시는 아무런 수식어 없는 글쓰기를 고집하는 인물이다. 문장 속 형용사나 부사와 같은 수식어는 대개 주관적이고 감성적인 요소다. 감성을 극도로 배제하면 지극히 건조한 이성만 남는다. 마치 얼굴에서 육기(肉氣)를 모두 제거한 금욕주의적 조선 선비와 같은 얼굴이 된다.
영화 초반에 보이는 알마시가 내뱉는 말이나 그 표정은 인간의 온갖 ‘감성’을 송두리째 적출해버리고 그 자리를 온전히 이성으로 채운 모습이다. 저것이 과연 가능할까 믿어지지 않는데, 아니나 다를까 캐서린과 마주친 순간부터 이성은 사라지고 감성이 알마시를 점령한다.
우아한 연회장을 난장판으로 만들어버리고, 캐서린을 스토킹하고, 송년파티장에서 캐서린을 납치하듯 파티장 구석으로 끌고가 욕정을 채우기도 한다. 캐서린을 구하기 위해 독일군에게 군사비밀정보에 해당하는 사하라 사막의 지도를 팔아넘기고 비행기를 얻는 짓도 마다하지 않는다. 그렇게 비행기를 구해 캐서린이 기다리고 있는 사막의 동굴로 돌아가지만 캐서린은 이미 숨을 거둔 상태다.
동굴 속에서 캐서린의 시신을 안고 나오며 오열하고 방성대곡(放聲大哭)한다. 알마시는 캐서린의 시신을 비행기에 태우고 독일군 방공포대를 향해 자살비행을 한다. 스스로 ‘이성의 화신’을 자처하던 알마시의 이성은 간 데없고 감성이 폭죽처럼 터진다.
그랬던 알마시는 전신 화상을 입고 수도원에서 ‘해나’의 임종간호를 받으면서 다시 극히 절제된 이성적인 인간으로 돌아간다. 대단히 이성적으로 안락사를 선택한다. 도대체 알마시라는 인간이 이성적인 인간인지 감성적인 인간인지 종잡을 수 없다.
인간의 이성과 감성을 둘러싼 문제들은 참으로 오래된 논쟁이자 고민이다. 모든 인간은 이성과 감성 사이에서 방황하면서 그 균형점과 접점을 찾으려고 부단히 애쓰지만 생각처럼 쉽지 않은 모양이다.
그리스 철학도 이성과 감성을 둘러싸고 양분된다. 스토아 학파는 극단적으로 감성을 배제한 이성적인 상태인 ‘아파테이아(apatheia)’를 궁극적인 목표로 설정하기도 한다. 바람직한 삶을 위해서는 종잡을 수 없는 온갖 감정과 열정에 휘둘리지 말아야 한다는 게 그들의 기조다.
에피쿠로스 학파는 반대로 모든 부질없는 이성이라는 상념을 집어치우고 본성에 충실한 ‘아타락시아(ataraxia)’를 추구해야 한다고 한다. 이들에게 이성이란 그 실체도 불분명한 ‘도그마’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이성이란 해결할 수 없는 온갖 스트레스와 번민을 가져다 줄 뿐 인간을 행복하게 해주지 못한다고 한다. 에피쿠로스의 ‘아타락시아’ 세계관은 ‘근심을 털어놓고 다함께 차차차…잊자 잊자 미련을 버리자’는 설운도의 다함께 차차차 노랫말에 잘 정리돼 있다.
동양철학에서도 이성과 감성이 주요 화제이기는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우리의 뛰어난 조선 유학의 최고봉 퇴계는 그리스 철학의 ‘아파테이아’와 ‘아타락시아’를 저들처럼 ‘단순무식’하게 분리시켜 생각하지 않고 ‘기발이승론(氣發理乘論)’으로 정리한다.
살다보면 울컥하거나 버럭하거나 ‘성질’이 뻗칠 때가 없을 수 없는데, 그럴 때 그 감정이나 뻗치는 ‘성질’을 이성으로 다스려야 한다는 것이다. 사랑ㆍ분노ㆍ슬픔ㆍ기쁨ㆍ미움ㆍ두려움ㆍ욕망 등 일곱가지 감정(칠정七情)이 걷잡을 수 없이 일어날 때 ‘사단四端(인의예지仁義禮智)’이란 4가지 이성의 힘으로 통제하란 얘기다.
퇴계 선생의 철학에 따르면, 알마시는 ‘사랑’이라는 가장 원초적인 감성이 들고 일어날 때 그것을 인의예지라는 4가지 이성으로 통제하지 못하고 파국으로 치닫고 말았던 셈이다. ‘절절한 사랑’은 감정이지만 그것이 ‘옳지 못한 것’일 때 그것을 옳지 못한 것이라고 아는 것은 이성이다.
알마시에게 사랑하는 아내 캐서린을 빼앗긴 클리프턴 역시 ‘분노’의 감정을 이성으로 통제하지 못하고 ‘분노’라는 감정을 ‘날것’ 그대로 드러내고 만다. 결국 모두를 파국으로 몰아간다.
문득문득 대통령의 언행들에서 ‘사랑’과 ‘미움’이란 감정이 드러남을 느낀다. 물론 대통령도 사람인데 당연히 그럴 수 있다. 그런데 그 감정을 이성이 통제해주지 못하고 ‘날것’ 그대로 국민들에게 전달되는 것은 왠지 불안하다. 어찌 보면 ‘기발이승(氣發理乘)’이 아니라 ‘이발기승(理發氣乘)’이 돼 이성 위에 감정이 올라타고 있는 듯한 느낌도 든다.
전 정권과 정적, 비우호 세력을 미워하는 감정이 아무런 절제 없이 드러난다. 그야말로 분기탱천이다. 이성으로 통제되지 못하는 ‘날것’으로의 분노는 그야말로 하늘을 뚫어버린다. 그러면서 ‘내 새끼’를 품으려는 ‘사랑’은 절절하기 짝이 없다. ‘우리 애는 절대 안 물어요’식 사랑이다.
니체는 그의 저작 「비극의 탄생(The Birth of Tragedy)」에서 인간 세상의 모든 비극은 바로 인간들에게 혼재하는 감성과 이성이 접점을 찾지 못하고 조화를 이루지 못할 때 발생한다고 분석한다.
우리가 흔히 아는 소포클레스(Sophocles), 에우리피데스(Euripides), 아이스킬로스(Aeschylus)와 같은 그리스 3대 비극 작가들이 그려낸 모든 비극적 서사 역시 퇴계의 기발이승에 실패한 주인공들의 이야기들이다.
그뿐이겠는가. 햄릿이나 리어왕 등 셰익스피어의 비극적 서사들이나 지금 소개하고 있는 잉글리시 페이션트 모두 이성이 고삐를 쥐지 못한 욕망과 감성의 비극들이다. 우리의 지도자들이 더 이상 그리스의 비극이나 셰익스피어의 비극적 주인공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본사 제휴 The Scoop=김상회 정치학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