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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회의 '영화로 읽는 한국사회' - 잉글리시 페이션트 (9)

알마시와 캐서린은 보통사람들에게서 찾기 어려운 서로의 매력에 취하고, 결국 불륜 관계에 빠져든다. 이를 알아차린 캐서린의 남편 클리프턴은 좌절하고 분노한다. 클리프턴은 2인용 프로펠러 비행기에 아내 캐서린을 태우고 알마시를 만나러 사막으로 향한다. 

 

 

알마시는 사막에서 영문도 모른 채 클리프턴의 비행기를 기다리고 있다. 그때 클리프턴은 가미카제식 자살비행을 감행한다. 알마시를 향해 돌진하는 클리프턴의 눈빛을 보면 아내와 간통한 알마시를 프로펠러로 죽이고 싶은 듯한 분노가 느껴진다. 단순히 알마시와 ‘너 죽고 나 죽고’가 아니라 아내 캐서린까지 다 같이 죽자고 한다.

알마시를 향한 클리프턴의 자살비행 모습은 왠지 낯설지 않다. 미디어에서 하루가 멀다 하고 접하는 ‘격분한 A씨가 B씨와 C씨를 죽이고 본인도 극단적 선택을 했다’는 딱하고 우울한 소식을 접했기 때문인 듯하다. 

관객들에게는 간통한 아내를 프로펠러 비행기에 태우고 아내와 간통한 남자를 향해 자살비행을 감행하는 클리프턴의 행위가 어떻게 받아들여졌을지 궁금하다. 공감과 지지도, 비난도 있을 듯하다. 

어쨌거나 클리프턴의 분노는 이해할 수 있지만, 그의 행위는 범죄행위다. 클리프턴이 죽지 않고 살아남았다면 경찰이 아마 ‘선생님 기분은 이해하겠는데, 그래도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됩니다’면서 수갑을 채울 수밖에 없는 일이다. 클리프턴이 기소됐다면 그의 죄목은 분명 ‘치정(癡情)죄’가 될 듯하다.

우리나라에는 없는 죄의 항목이지만 영미권에는 이런 형태의 일은 ‘열정 범죄(crime of passion)’로 분류된다. 한마디로 사랑의 열정 때문에 순간적으로 이성을 잃어 저지른 범죄들이다.

문제는 같은 살인이라도 ‘치정 살인’은 형량에서 경감 사유가 된다는 점이다. 이는 변호사들의 집중 공략 포인트이기도 하다. 영화 속 클리프턴의 국적이 영국이란 점도 흥미롭다. 영미법의 본고장인 영국은 ‘치정 범죄’에 가장 관대한 서구 국가다. 1700년대 영국에선 부정(不淨)을 저지른 아내의 정부(情夫)를 살해한 남편은 달랑 2년간 보호관찰 처분을 받았다고 한다. 
 

 

실제로 당시 영국의 법조문은 유부녀와의 간통을 ‘용납할 수 없는 사유 재산권 침해’로 규정하고 있다. ‘남편으로서 이보다 더 견딜 수 없는 것은 없다(a man cannot receive higher provocation)’는 명시적 문구도 있다. 용납할 수 없으니 당연히 죽일 만하다는 불문법이다. 

그런 전통이 이어져 내려온 탓인지 2009년 여자친구가 자신의 절친과 부정을 저지르는 현장을 목격하고 그 자리에서 2명을 칼로 찔러 죽인 한 남자에게 ‘치정 죄’를 적용해 ‘살인’이 아닌 ‘우발적ㆍ사고 살인’이란 가벼운 형을 선고한 나라가 영국이다. 

영국 귀족가문 출신인 듯한 클리프턴에게도 이런 영국적인 사고방식이 자리잡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자신의 ‘사유재산’인 캐서린을 침해한 알마시를 죽이는 것은 남편인 자신의 당연한 권리이지 죄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듯한 모습이다.

‘치정 살인’을 관대하게 해석하기 때문인지 여성의 안전과 생명을 분석한 미국 법무부 통계국(Bureau of Justice Statistics)의 통계는 충격적이다. 살해당한 모든 미국 여성 중 30%는 배우자, 20%는 전前 배우자에 의한 것이다. 10%만이 전혀 모르는 사람에 의해 살해됐다. 

이쯤 되면 여자들은 거의 ‘살인마와의 동침’을 하고 있는 셈이다. 어쩌면 ‘치정 범죄(crime of passion)’라는 참으로 이해심 많은 법 조항 때문에 발생한 비극적인 통계인지도 모르겠다.
 

 

우리나라에선 가정 내 여성이 얼마나 안전한 위치에 있을까. 총기 소지가 자유롭다면 우리네 통계도 미국 못지않을지 모른다. 데이트 폭력에서부터 시작해 헤어지자는 말에 격분해서 불 지르고, 죽이고, 부정(不淨)을 저질렀다고 죽이고, 자기를 무시했다고 죽이고, 여자 죽이고 자기도 죽고...식의 가장 가까운 남자 손에 죽어가는 여자들의 기사가 끊이지 않는다. 한국의 ‘클리프턴과 캐서린’들이다.

영화 속 클리프턴은 아내 캐서린에 비해 모든 면에서 부족한 ‘지질한 사내’로 묘사된다. 클리프턴은 그것을 ‘사랑’으로 포장하고 자신의 행위를 캐서린을 향한 ‘열정(passion)’ 때문이라고 항변하고 싶겠지만, 그것은 사랑도 아니고 열정도 아니고 ‘치정’도 아닌 그저 못난 수컷의 폭력적인 소유욕과 열등감일 뿐이다. [본사 제휴 The Scoop=김상회 정치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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