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 직원으로 취업하려고 면접을 보는 한 여성이 있다. 그는 고교 졸업이 전부이고 병원 근무 경력이나 의학 교육을 받은 적도 없던 터라 보기 좋게 탈락하고 만다. 안 되는 날은 뭘 해도 안 되는지 주차한 차에는 교통위반 딱지가 붙어있고, 설상가상으로 교통사고까지 당한다.
이 여인이 줄리아 로버츠가 연기한 ‘에린 브로코비치(Erin Brockovich, 2000)’ 영화의 주인공이다. 에린은 사고의 소송을 위해서 에드 메스리(알버트 피니)라는 변호사를 만나지만 재판에서 지고 만다.
어린아이들 셋을 데리고 사는 그는 직장을 구하기 위해 수십 군데를 알아보다가 자기의 소송을 맡았던 에드라는 변호사 사무실에 우격다짐 격으로 일자리를 달라고 하면서 들어간다.
에드는 마지못해 사무실에 자리를 만들어주고, 어느 날 에린이 서류 정리를 하다가 이상한 점을 발견하게 된다. 퍼시픽 가스 전력회사(PG&E)라는 회사에 부동산을 매각하는 서류 사이에 병원 기록이 들어있던 것.
‘백혈구 수치 이상, 염증이나 백혈병일 때 나타나는 현상임’이라는 소견이 적혀있는 기록을 보고 이상하다고 여겨서 병원 기록의 주인을 찾아 LA 외곽의 힌클리(Hinkley)라는 작은 마을을 찾아간다. 마을 사람들이 암을 비롯한 여러 질환에 시달리고 있다는 공통점을 발견하고, 주민들을 설득해서 에드 변호사로 하여금 변호를 맡게 한다. 이제부터 언제 끝날지도 모르고 질 확률이 높은 대기업과의 전쟁이 시작된다.
평범한 시민 에린이 밝혀낸 중금속 오염
에린의 유일한 자랑거리는 작은 지역의 미인 콘테스트인 ‘미스 위치타’ 출신이라는 것뿐이다. 왜 그 미모를 가지고 관련된 일을 하지 않느냐고 물으면 “수퍼마켓 행사에 다니다보니 세계 평화와 기아 퇴치를 위해 쓸 시간이 너무 적어지더라”라고 능청스레 얘기하는 에린.
하지만 변호사 사무실에서도 가슴이 드러나도록 파인 윗도리에 짧은 치마만 입고 다니는 에린을 다른 직원들은 못마땅해 한다. 그럼에도 그는 PG&E 회사와 관련 있는 중금속 크로뮴(크롬)에 대해 전문가를 찾아가고, 수도국 자료를 모으면서 연구를 하는 당찬 모습을 보여주는 여성으로 묘사된다.
줄리아 로버츠는 ‘귀여운 여인(Pretty Woman), 1990’으로 일약 대스타가 되었지만, 이후로는 기대와 달리 이렇다 할 영화를 내놓지 못했었다. 이 영화가 재미있었던 이유는 이혼 두 번에, 고졸 출신이고 아이 셋 달린 엄마이면서 어떤 일이든지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억척 여성 연기로 깊은 인상을 심어주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2시간이 넘는 상영 시간임에도 지루하지 않고 영화의 흐름을 따라갈 수밖에 없게 된다. 자칫 지루할 수 있는 영화를 성공으로 이끈 배경에는 줄리아 로버츠의 연기와 더불어 스티븐 소더버그라는 걸출한 감독의 힘이 큰 면도 있었다.
금속류 중에는 크로뮴(Cr), 비소(As), 카드뮴(Cd), 수은(Hg), 납(Pb)처럼 우리 몸에 유해하게 작용해서 질환을 일으키는 것들이 있다. 대부분 산업혁명 이후 공업화의 산물들이다. 영화에 등장하는 크로뮴은 우리 몸에서 대사 작용에 참여하거나 인슐린 활성화 등에 관여하므로 결핍이 되지 말아야 할 미량 원소다.
이렇게 유익한 크로뮴(3가)이 있는가 하면 영화에서처럼 공장에서 쓰이고 버려지는 크로뮴은 6가로서 피부 문제는 물론 호흡기나 간, 콩팥에 손상을 주거나 코 가운데벽(중격)에 구멍이 나게 하는 등의 부작용을 낳고, 여러 암을 유발하기도 한다.
에린 브로코비치 영화는 당시까지 미국의 법정 소송 역사에서 최고 보상액을 받아낸 1992년의 PG&E 회사와의 크로뮴 중금속 오염 문제를 다룬 실화다. 영화 초반부에 에린이 식당에 아이들을 데리고 가서 밥을 먹일 때 주문을 받던 종업원이 실제 에린 브로코비치이니 놓치지 말고 보면 재미있을 장면이다.
그들 뒤에 앉아서 잡지를 보는 듯한 어느 중년의 남자는 변호를 맡았던 에드 메스리이고, 둘은 카메오로 출연했다고 알려진다. 감독은 ‘섹스 거짓말 그리고 비디오테이프(Sex, Lies, and Videotape, 1989)’, ‘케빈에 대하여(We Need to Talk About Kevin, 2011)’, ‘컨테이젼(Contagion, 2011)’, ‘오션스’ 시리즈를 만든 스티븐 소더버그가 맡았다.
금속 관련 유명 사건들
1956년 일본 구마모토현 미나마타시에 있는 화학공장 인근의 한 소녀가 경련을 하면서 병원에 입원을 한다. 나중에 보니 주변에 사는 여러 사람들이 비슷한 증상을 가지고 있었다. 공장의 화학공정 작업에서 촉매로 사용하던 수은이 다른 화합물과 결합해서 오래도록 인근 바다로 흘려보내졌고, 어패류를 섭취한 주민들뿐만 아니라 동물들도 경련이나 신경학 증상을 겪게 됐다는 것을 역학 조사를 하면서 밝혀졌다. 이것이 유명한 ‘미나마타병’이다. 한국에서 직업병의 중요성을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된 1988년의 문송면 사망 사건도 수은 중독에 의해서였다.
일본에서 발견되어 전 세계에 알려진 중금속 중독이 하나 더 있다. ‘아파, 아파’라는 뜻을 가진 일본말인 ‘이타이이타이병’이다. 이것은 광업소에서 버려진 광물에 들어있던 카드뮴이 땅속에 흘러 들어가고, 그것이 흡수된 농작물을 먹은 사람들이 걸리게 된다. 시간이 지나면서 카드뮴 중독으로 뼈연화증이나 뼈의 기형 성장, 골절 등의 위험이 찾아오고, 여러 합병증으로 일찍 사망하기도 하는데 1950년대에서야 알려지게 되었다.
한국의 에린브로코비치
최근 한국에서 만들어진 ‘삼진그룹 영어 토익반(Samjin Company English Class, 2020)’은
1991년 ‘낙동강 두산전자 페놀유출오염사건’을 동기로 만들어졌다. 고아성, 이솜, 박혜수 배우들이 출연하였고, 그들은 여자상업고등학교 출신들이며 8년 차 입사 동기들이다.
충분한 업무 능력을 갖고 있지만 말단 여직원이기에 이들에게는 커피 타기, 서류 복사하기, 영수증 정리하기 등 잔심부름만 하게 된다. 이들은 대리 승진을 위해서 회사에서 제공하는 영어 토익반에 들어가 열심히 공부한다.
어느 날 출장을 갔다가 도랑에서 검은 폐수가 유출되어 물고기들이 폐사하는 것을 본 자영(고아성)은 동료들과 함께 고전분투하며 삼진그룹이라는 대기업의 비리를 폭로하게 되는 줄거리다. 영화는 다소 에린 브로코비치를 흉내낸 듯 하지만 나름 한국인의 정서를 깔고 유머를 보여주면서 재미있게 만들었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고병수는?
= 제주제일고를 나와 서울로 상경, 돈벌이를 하다 다시 대학진학의 꿈을 키우고 연세대 의대에 입학했다. 의대를 나와 세브란스병원에서 가정의학 전공의 과정을 마쳤다. 세브란스병원 연구강사를 거쳐 서울 구로동에서 개원, 7년여 진료실을 꾸리며 홀로 사는 노인들을 찾아 다니며 도왔다. 2008년 고향 제주에 안착, 지금껏 탑동365의원 진료실을 지키고 있다. 열린의사회 일원으로 캄보디아와 필리핀, 스리랑카 등 오지를 찾아 의료봉사도 한다. '온국민 주치의제도'와 '주치의제도 바로 알기' 책을 펴냈다. 한국일차보건의료학회(KAPHC) 회장, 한국장애인보건의료협회(KAHCPD) 부회장, 새로운사회를여는연구원 이사장 등을 맡아 보건의료 선진화 방안과 우리나라의 1차 의료 발전방안을 모색하는 보건정책 전문가다. 2020년 4.15 총선에 정의당 후보로 나와 제주갑 선거구에서 분루를 삼켰지만 총선 직후 곧바로 코로나19 감염이 창궐하던 대구행 의료자원봉사에 나서 숱한 이들에게 잔잔한 감동을 선사했다. 정의당 제주도당위원장을 역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