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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정태의 [퓨전제주무림(武林)(4)] 희룡공은 누구인가

 

무림 1964년 용의 해. 개천에서 용이 태어나길 기대했던 바람이 담겨 있었을까. 깡촌으로 불리던 서귀포 중문에서 태어난 그는 희룡(喜龍)이란 이름을 얻는다. 기쁠 희자에 용 룡자. 으뜸(우두머리) 원이라는 성까지 조합하면 ‘우두머리 용이 태어나 기쁘다’라고 해석되기도 한다.

 

5살 때 첫 한글수련을 했다. 농약방을 하던 아버지 덕분이었다. 처음 배운 글이 농약병에 적힌 ‘파라치온’. 독하디 독한 살충제다. 무림 1957년, 포항무림서 왕따를 당한 초등무림교사가 막걸리에 파라치온을 섞어 동료교사들을 독살한 사건으로 유명세를 떨치기도 했다. 일명 ‘파라치온 막걸리사건’.

 

중학무림시절엔 과학무공실서 익힌 비급으로 폭탄을 제조했다. 깜빡 잊고 폭탄을 쓰레기와 함께 태우다 폭발하는 사건으로 온 몸에 상처를 입기도 했다. 희룡공은 아는 이들을 목욕탕에 만나면 온 몸에 새겨진 상처를 의미심장한 눈길로 바라보는 게 부담스럽다고 토로했다.

 

그는 386세대 시대의 아픔을 온 몸으로 겪은 상처가 아니었다고 그의 비급서 ‘나는 서브쓰리를 꿈꾼다’에서 털어놓았다.

 

중학무림 3학년까지 전깃불도 없이 수련했다. 집으로 찾아온 빚쟁이 무사의 식칼초식에 오들오들 떠는 어머니를 보며 무림의 비정함을 배웠다.

 

고등무림시절엔 장학금을 털어 모기 잡는 에프킬라로 불을 뿜는 용을 만들어 백호기 축구경연 응원전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그 덕분에 여고수련인 인기투표에서 1등을 했다고 희룡공은 회고한다.

 

희룡공은 일찌감치 언론무림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아왔다. 수석무공을 창안했던 덕분이다. 학력고사비무, 서울법대비무, 사법고시 비무까지 그의 수석무공 앞에 대적하는 자는 추풍낙엽이었다.

 

 

그를 눈여겨 본 이가 있었으니. 무림 1999년 한나라방 방주였던 회창노사였다. 노쇠한 한나라방에 ‘젊은피 수혈’이 필요하다는 명분이었다. 그는 보답이라도 하듯 중원 양천갑 맹주자리를 꿰찬다. 이후 ‘남원정(경필-희룡-병국) 트리오’로 불리며 한나라방 소장 개혁파 운동을 이끌기도 했다.

 

무림 2007년에 열린 한나라방 대권주자비무. 한나라방 소장파 대표로 나선 그는 명박산성공, 근혜공주에 밀려 무림인생 첫 패배의 맛을 봤다. 비무성적표는 3등. 그래도 4등인 홍콜라공은 눌렀다. 졌지만 이긴 비무였다는 당시 평가였다. 2선 맹주에 불과한 그였기 때문이었다. 그의 나이 만 43세였다. 2008년엔 ‘양천이 키운 양천의 힘’ 초식으로 3선 중진 무림인 반열에 등극한다.

 

희룡공은 다음해인 무림 2009년엔 서울시장비무에 도전한다. 결과는 본선 진출 좌절. 무림대학 동기인 우윳빛깔경원공과의 여론조사비무에서 졌다.

 

무림 2011년 7월. 한나라방주 비무는 그의 승부수였다. 살아있는 권력인 친명박산성공계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았다. 해볼만 하다고 생각했던 탓일까. 희룡공은 언론무림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한나라방 강세지역인 서울양천갑에 공천을 받아 내리 3선을 했습니다. 한나라방 위기 상황을 맞아 저부터 버리겠습니다.”

 

총선비무 불출마 배수진이었다. 그게 그의 발목을 잡을 줄이야. 비무대회에서 홍콜라공이 승리했고, 그는 4등을 했다. 그는 다음해인 무림 2012년엔 영국무림으로 떠난다.

 

무림 2014년, 중원무림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게 흘러간다. ‘중진 차출론’. 친명박산성 계파였던 그가 제주무림비무 후보로 차출된다. 근혜공주의 미움을 받았다더라. 친명박산성계에서도 왕따를 당했다더라. 이런저런 소문이 무성했다. 제주무림의 아들이라며 출마를 선언한 희룡공. 그의 말을 꿰맞춰 풀어내면 ‘양천이 키운 제주의 아들’이 제주무림에 등판한 셈이었다.

 

이후 제주무림맹주 비무에서만 내리 2선을 따낸 희룡공. 이런 꿈을 꿀 지도 모른다. 그가 펴낸 비급서. ‘나는 서브쓰리를 꿈꾼다’가 아니다. 마라톤수련보다 심장을 더 뛰게 한다. 거침없이 중원무림을 휘젓고 다니는 꿈이다. 어쩌면 중원무림 1%에 불과한 태생적 한계도 단숨에 떨쳐 버릴 수 있다.

 

바닥까지 추락한 보수무림의 처지도 그의 심장을 두근거리게 할 수 있다. 갑작스레 등장한 '황'은 2%가 부족하다는 평가 때문. 혜성처럼 나타나 단숨에 보수무림을 쥐락펴락했던 회창노사도 연거푸 패배하며 쓸쓸히 무림역사의 뒤안길로 퇴장했던 터였다. 중원무림은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다.

 

황은 중도보수에게 비호감 그 자체. 차기 비무대회서 판이 요동칠지 모른다. 확장성 있는 보수중도후보에게 기적처럼 기회가 생긴다는 시나리오다.

 

보수중도 지존좌 후보로 회자됐던 남원정의 ‘남’. 새장가를 간 후 돌연 무림은퇴를 선언했다. 그는 블록체인무공과 헬스케어무공을 수련중이라고 언론무림 인터뷰에서 밝히기도 했다. 제주에선 희룡공 덕분에 익숙한 무공. 기력이 쇠해진 ‘정’은 예전의 정이 아니다. 그럼 ‘원’인 희룡공만 남은 셈이다.

 

봄바람이 불던 오월의 어느 날. 유튜브 수련을 마친 희룡공이 기분 좋은 봄햇살 아래서 졸고 있었다.

 

일장춘몽이던가.

 

꿈 속 깊은 곳에서 소동파(蘇東坡)의 시 ‘여반곽이생교심춘(與潘郭二生出郊尋春) 한 구절이 들려왔다.

 

“모든 일이 봄날의 꿈처럼 사라진다(事如春夢了無痕).”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강정태는? = 제주 출생. 제주대학교 사회학과를 나왔다. 저서로는 제주대 산업경제학과 대학원 재학시절, 김태보 지도교수와 함께 쓴 '제주경제의 도전과 과제(김태보 외 4인 공저)'가 있다. 제주투데이, 아주경제 등에서 기자생활을 하다 귀농, 조아농장(서귀포시 남원읍 수망리)에서 닭을 키우며 유정란을 생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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