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환경에 따라 정세도 달라진다. 사람의 행동도 그것에 따라 달라져야한다. 판이하게 달라져야 할 경우도 있다. 그렇다고 때에 따라 장소에 따라 미혹되라는 말은 결코 아니다. 특정한 환경에 따라 자신의 언동을 택하라는 말이다. 개인의 품성을 판정할 수 있기에 그렇다. 인상여(藺相如)는 일찍이 환관의 우두머리 무현(繆賢) 문하의 식객으로 있었다. 무현이 한번은 사고가 생겨 인상여를 찾아가 상의하였다. 사건의 전후는 이렇다. 어느 날, 멀리에서 손님이 무현의 저택으로 찾아왔다. 옥벽(玉璧)을 팔기 위해서였다. 완전무결하고 아름다운 빛을 발하는 옥벽을 보고는 무현이 500금을 주고 매입하였다. 나중에 옥장(玉匠)을 불러 옥을 감정했는데 옥장이 보고 놀랐다. 화씨지벽(和氏之璧)이었다. 무현은 대단히 기뻐 급히 옥을 숨겼다. 그런데 이미 그 일은 혜문왕(惠文王, BC356~BC311)에게 보고되었다. 왕이 무현에게 내놓으라고 독촉했으나 무현이 너무나도 화씨지벽을 좋아해 곧바로 왕에게 바치지 않았다. 왕은 대노해 사냥을 나간 틈을 타 무현의 가택을 수색하고 화씨지벽을 가지고 가 버렸다. 무현은 화가 돌아올까 너무 두려워 연(燕)나라로 도망갈 준비를 하였다. 인상여가 물
중국의 옛사람들은 ‘동(動)’과 ‘정(靜)’의 변증관계를 이해하고 있었다. “정으로 동을 제압(以靜制動)”하는 수단으로 모순을 해결하는 데에 능했다. ‘정(靜)’은 꼼짝하지 않는다는 뜻이 결코 아니다. 고요함이다. 잠잠함이다. 평정이다. ‘정(靜)’할 때도 시간은 흐른다. 형세도 변한다. 기회도 시시각각 다가온다. 차량의 흐름에 따라 운행하면서 사물을 보는 것과 같다. 멈춘 것 같으면서도 흐른다. 사물은 정지해 있으나 그것을 보는 차량 속의 시각은 각각 다르다. 당(唐, 618~907)나라 헌종(憲宗, 778~820) 때 배도(裴度)는 중서령의 직위에 있었다. 어느 날, 수하가 허둥지둥 달려와 인장(印章)이 보이지 않는다고 보고하였다. 관리가 된 자가 인장을 잃어버린다는 것은 실로 이만저만한 일이 아니라 경시할 수 없었다. 그런데 배도는 보고를 듣고도 당황하거나 허둥대지도 않고 고개만 끄덕이며 알았다고 하면서 좌우에 경고하며 말했다. “인신(印信)은 내가 다른 사람에게 맡겨 보관하라고 했으니 호들갑을 떨지 마라.” 좌우에 있던 사람
일상생활에서 쾌도난마란 무슨 뜻으로 사용될까? 다른 사람이 생각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신속하게 일을 처리하는 것을 말한다. 돌발적으로 일어나서 미처 손 쓸 사이 없는 상태에서 전광석화같이 예상을 뛰어넘는 방법으로 상대방을 타격해 일패도지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 책략의 관건은 상규(관습) 속박에서 벗어나 남이 생각이 미치지 않는 틈을 타 정예의 능력을 집중해 기세, 기량에서 정확하게 승리를 얻는 것이다. ‘출기불의(出其不意)’가 중요하다. 남북조시대 북위(北魏, 386~534)의 고양(高洋)은 어릴 적부터 자질이 총명했지만 겉으로는 드러내지 않았다. 타인들은 그의 진면목을 알지 못했지만 승상인 부친 고환(高歡)은 아들이 남다름을 느껴 자주 말했다. “이 녀석은 견문이나 생각, 지모가 나를 뛰어넘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자기 아들 6명 중에 누가 제일 뛰어난 기량을 가지고 있는지 궁금하였다. 능력을 시험해 보기로 한 고환은 잔뜩 얽히고설킨 삼실을 아들들에게 하나씩 주고는 풀어보라고 하였다. 모두 얽혀 있는 삼실을 한 가닥씩 풀어내느라 진땀을 빼고 있는데 둘째 아들 고양(高洋)은 칼을 뽑아 단번에 실타래를 잘라버렸다. 그러
『손자병법(孫子兵法)』「군사(軍事)」는 말한다. “가까운 곳에서 먼 길을 오는 적을 기다리고, 편안하게 쉬면서 피로해진 적을 기다리며, 배불리 먹고 나서 적이 배고프기를 기다리라. 이것이 힘을 다스리는 방법이다.” 무슨 말인가? 편안하고 여유롭게 쉬면서 정예부대를 양성해 피로해진 적에게 기회를 틈타 승리를 얻으라는 말이다. 어사(御史)가 어떤 현(縣)에 파견돼 공무를 수행하다 그 현의 현령을 화나게 만들었다. 현령은 암암리에 총애하는 첩에게 어사를 시봉하게 하였다. 어사는 그 첩과 다정하게 지내게 되었다. 첩은 기회를 틈타 몰래 어사의 작은 상자에서 인장을 훔쳤다. 오래지 않아 어사가 인장을 찾았는데 상자가 비어있는 게 아닌가. 마음속으로 현령이 한 짓이라고 생각은 했지만 함부로 발설할 수 없어 아프다는 핑계를 대고 정사를 처리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게 계속 지연시킬 수만은 없었다. 급한 마음에 방법을 찾던 중 현에 지모가 출중한 교관이 있다는 말을 들었다. 그 교관이 병문안 온 때에 교관을 침대로 불러 교관에서 자기의 사정을 얘기한 후 해결책을 물었다. 교관이 다 듣고 나서 어사에게 이러이러하라고 말했다. 그날 밤, 어사는 주방에 불
음악이나 가곡이 조화를 이루는가, 미묘한가를 판별할 수 있는 사람도 있고 ; 서법이나 조각이 아름답고 뛰어난가를 감별할 수 있는 사람도 있으며 ; 말하는 것 그대로 문장이 되거나 달변인 사람이 있기도 하고 ; 소설이나 시를 마음속으로 깨닫고 이해하는 사람도 있으며 ; 사격이나 운전, 서법, 술수 모두에 정통한 사람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정치하는 사람에게는 그저 보잘 것 없는 재주에 불과할 수도 있다. 한 사회의 능력 있는 지도자가 되려는 사람에게는 무엇이 필요할까? 이끄는 능력이 있으니 위에서 말한 분야에 공력을 기울이면 출류발췌하리라. 눈빛은 이루(離婁)와 같이 예리하고 청력은 사광(師曠)과 같이 예민하며 화살을 쏘면 후예(后羿)처럼 정확하고 서법은 왕희지(王羲之)(★)처럼 뛰어날 것이다. 그렇지만 한 분야에 재능이 있다고밖에. 큰일을 도모하고 성사시키는 데에는 크게 쓰일 데가 없지 않은가. 공자도 일찍이 생계에 짓눌려 여러 가지 일을 했어야했다. 그렇기에 다재다능하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공자도 얘기했잖은가, 그런 경력 때문에 너무나 많은 힘을 낭비해 정치적 발전에는 장애가 됐다고. [후예사일조상(后
지모가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타인이 작은 일에 주의를 기울일 때 큰 것에서 착안한다. 다른 사람이 가까운 것을 보려할 때 먼 곳을 본다. 타인이 바빠서 일을 망칠 때 감정을 얼굴에 나타내지 않고 자연스럽게 일을 바로잡는다. 다른 사람이 속수무책일 때 힘들이지 않고 여유 있게 일을 처리한다. 식은 죽 먹기처럼 솜씨 있게 일을 처리한다. 어떤 낌새도 없이 작은 부분까지 사고한다. 행동은 타인이 생각지도 못한 부분까지 고려한다. 그렇게 어떤 어려움도 여반장으로 처리한다. 아무리 많은 문제도 일소에 부친다. 중국역사에서 작은 일에 몰두해 큰일을 그르친 인물이 수두룩하다. 가장 일찍 보이는 인물이 춘추시기 노(魯)나라 장공(莊公)(★)이다. 그는 노래도 잘하고 춤도 잘 췄다. “연주가 틀리면 주랑이 돌아본다”는 경지를 넘어섰지만 국가를 다스리는 데에는 엉망진창이었다. 백성이 안심하고 생활할 수가 없었다. 사람들은 『폐구(蔽笱)』를 써서 그를 풍자하였다. 남북조(南北朝, 420~589)시대에 양(梁) 원제(元帝) 소역(蕭繹)(★★)은 어릴 적에는 총명하며 준수하고 쾌활하였다. 하늘이 낳은 인재랄까. 다섯 살 때 『곡례(曲禮)』를
“임기응변(臨機應變)” 지혜는 민첩(敏捷)함도 포함한다. 옛사람들은 순간적으로 임기응변하는 지혜를 ‘첩지(捷智)’라 하였다. 춘추시기에 제(齊) 양공(襄公)에게는 아들 두 명이 있었다. 규(糾)와 소백(小白)이다. 관중(管仲)은 규를 따랐고 친구 포숙아(鮑叔牙)는 소백을 따랐다. 공자 규는 노(魯)나라로 몸을 피했다. 공자 소백은 거나라(莒國, 지금의 산동성 쥐(莒)현에 있었던 주대(周代)의 나라 이름)로 도피하였다. 오래지 않아 제나라에 반란이 일어나 제 양공은 반란군에게 죽임을 당하자 제나라는 일시에 국군(國君)이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공자 두 명은 그 소식을 듣자마자 밤낮을 가리지 않고 제나라로 진군하였다. 귀국 후 왕위를 계승하여야 했기 때문이다. 공자 소백은 포숙아 등을 거느리고, 공자 규는 관중 등을 거느리고 귀국하다가 제나라 변경지역의 좁은 지역에서 만났다. 양보할 여지가 없었다. ▲ 관중 [사진=한국인문고전연구소 중국인물사전] 관중은 말은 탄 채로 소백에게 문후하는 척하다가 활을 뽑아들고 소백을 쏘았다. 적중은 했지만 소백은 죽지 않았
“한 걸음 물러나 있다가 나중에 행동을 취하여 상대를 제압한다.” “움직임을 극도로 자제해 조용히 준비하면서 소란스럽게 움직이는 상대를 차분히 제압한다.” 상(商, 약BC1600~약BC104)나라 주왕(紂王, 약BC1105~BC1046?)은 역사적으로 잔혹하고 포악하기로 유명하다. 황음무도한 용군(庸君)으로 명성이 자자하다. 제멋대로 종실 대신을 살해하였고 가혹한 형벌로 사람을 죽였다. 백성을 잔혹하게 살해하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았다. 대신들이 여러 차례 강력하게 간언했으나 주왕은 후회해 뉘우치지도 않고 오히려 부끄럽고 분한 나머지 화를 내면서 그런 대신은 국도 조가(朝歌)에서 쫓아내었다. 주(周)나라 무왕(武王, ?~BC1043)이 사람을 상나라에 보내 상황을 파악하고 국정을 살피게 하였다. 오래지 않아 상황을 알리는 편지가 도착하였다. “상 왕조는 지금 간인이 정권을 잡고 있어 여러 대신이 불화반목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무왕은 상 왕조를 정벌할 시기가 아직 도래하지 않았다고 생각하였다. 나중에 무왕은 또 보고를 받았다. “상 왕조의 백성은 마음속으로 분노하고 있으면서도 감히 내
기회가 왔다하여도 시간은 그리 길지 않다. 대단히 촉박하다. 지혜로운 사람은 어떻게 할까? 기회가 없으면 기회를 만든다. 기회가 생기면 기회를 놓치지 않는다. 기회가 오면 곧바로 기회를 빌린다. 곳곳에서 수원(水源)을 얻는다. 일이 모두 순조롭게 이루어 낸다. 적은 노력으로 많은 효과를 거둔다. 사반공배(事半功倍)다! 우둔한 사람은 어떻게 할까? 정반대이다. 기회가 코앞에 있는데도 보지 못한다. 잡지 못한다. 두 눈 멀쩡히 뜨고 좋은 기회를 헛되이 보내버린다. 오히려 무리하게 일하다가 벽에 부딪치고 만다. 진(晉) 문공(文公, BC697~BC628)은 즉위하자마자 온힘을 다하여 민중을 훈련시켰다. 이듬해에 문공은 그들을 쓰려 하자 자범(子犯)(★)이 말했다. “진나라는 여러 해 동안 전란에 휩싸여 있었습니다. 백성은 여전히 무엇이 의(義)인지 모르고 여태껏 평안히 살면서 즐겁게 일해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자 문공은 외교활동을 강화하고 주(周) 양왕(襄王)(★★)을 호송해 귀국시킨 후 복위시켰다 ; 자기 나라로 돌아온 후 적극적으로 백성을 위하여 이익을 도모해 백성은 점차 생산에 관심을 가지게 되고 생계에 만족하게 되었다. 오래지 않아
타인을 경복시킬 수 있는 지모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 사람이 한 번 보면 대단히 수준이 높고 솜씨가 뛰어나야한다. 고대 변사(辯士)의 유세처럼 끊임없이 흘러넘쳐야 한다 ; 둘째, 표면적으로는 무미건조하고 평담하지만 지극히 현묘한 이치를 포함하고 있으면서도 타인에게 쉽게 간파당하지 않아야한다. 제갈량(諸葛亮)이 놓은 석두진(石頭陣)(★)처럼 사람마다 다르게 이해하게 만들어야 한다. 결정적인 순간에 이르면 안개에 가려진 산과 강이 드러내듯이 분명하게 드러내 보여야한다. ‘현산로수(顯山露水)’(★★)다. 결정적인 순간에 자신을 드러내 사람을 확연대오하게 만들어 감탄을 자아내게 만들어야 한다. 전국시대(戰國時代, BC475~BC221)에 범려(范蠡, BC536~BC448)는 월(越)나라 왕을 도와 오(吳)나라를 멸망시킨 후 월나라를 떠나 제(齊)나라에서 치이자피(鴟夷子皮)(★★★)라 이름으로 바꾸고 제나라 대신 전성자(田成子) 문하로 들어간다. 나중에 전성자가 제나라를 떠나 연(燕)나라로 도망갈 때 범려는 부신(符信)을 지고 전성자를 따라갔다. 망성(望城)에 도착하자 범려가 말했다. “주인께서는 물 마른
말에 문채가 없으면 오래도록 전하지 못한다고 굳게 믿는 사람이 있다 ; 침묵은 금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이 두 가지 말은 언뜻 보면 모순된 것처럼 보이지만 따져보면 언(言, 말)과 행(行, 행동)의 정도 문제를 포함하고 있다. 일찍이 위(魏) 명제(明帝, 226~239 재위) 시기에 어떤 사람이 초군(楚郡) 태수 원안(袁安, ?~92)에게 물었다. “이미 돌아가신 내무대신 양부(楊阜, 172~244)는 충언하였고 직간했는데 태수께서는 어찌 그를 충신이라고 칭찬하지 않는가요?” 원안이 대답하였다. “양부와 같은 그런 대신은 그저 ‘직사(直士)’라고 부를 수는 있지만 충신이라고 부르지는 못하오. 왜 그가 ‘직사’에 불과하다고 이야기하는지 아시오? 신하가 된 자로써 군주의 행위에 불합리하거나 규율이 없는 부분을 발견하였다 하더라도 해서는 안 되는 게 있소. 여러 사람들 앞에서 군주의 잘못을 지적해 군왕의 과오를 천하에 전파하면서 반대로 자신은 강직한 선비라는 명성을 얻는 것은 올바른 태도가 아니오. 이미 고인이 된 사공(司空) 진군(陳群, ?~237)은 학문이나 인품 모두 훌륭하오.
“냉정을 유지하고 기회가 오면 즉시 행동에 옮기자.” “상황에 따라 대처하여야한다.” 전국시기 ‘농가(農家)’학설의 대표인물 허행(許行 : BC372~BC289)은 자식기력(自食其力)을 제창하였다. 자식기력이란 현대어로는 남에게 의지하지 않고 자기 힘으로 생활해 가는 것을 말하지만 허행의 뜻은 모든 것을 스스로 생산하고 만들어 써야한다는 말이다. 만부득이 할 때에만 교역하여야 한다는 말이다. 근본적으로 사회분업을 부정하였다. 허행은 제자 수십 명과 함께 무명옷을 입고 짚신을 삼고 자리를 만들면서 삶을 유지하였다. 유가사상을 신봉하는 진상(陳相)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허행을 만난 후 유가사상을 버리고 새로이 ‘농가’학파를 신봉하게 되었다. 어느 날 진상이 맹자(孟子)를 만나게 되자 전력을 다하여 농가사상을 설파하였다. “나는 허행 선생님의 관점이 도리에 맞는다고 생각합니다. 무릇 현명한 군주는 모두 백성과 더불어 농사를 지어야 합니다. 자신이 직접 밥을 지어 먹어야 합니다. 국정도 겸임해 처리하여야 합니다. 자급자족 할 수 없다면 어찌 현명한 군주라 할 수 있겠습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