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혈마(汗血馬)는 전설 속의 신비롭고 최상의 능력을 보유한 기이한 말을 가리킨다. 피와 같은 땀을 흘리며 바람처럼 빨리 달린다고 전해온다. 여러 왕공 귀족들은 그 말을 구하기 위하여 천금을 마다하지 않았으며 한(漢) 무제는 그 말을 구하기 위하여 원정을 감행하기도 하였다. 새벽 6시, 해가 서서히 뜨며 밝아올 때 북경의 연룡(燕龍) 경마장의 마방은 벌써 떠들썩해졌다. 일꾼들이 매일 첫 번째로 하는 일, 마방 정리가 시작되었다. 그중 조마사가 가장 분주하다. 그는 막 중국으로 수입된 말 3필을 책임져야하기 때문이다. 몇 개 월 후 그중 한 필을 경매시장에 내놔야한다. 현재 경매최저가격이 100만 인민폐에 달하고 최종 경매가격은 중국 말 경매사상 가장 비싼 가격에 낙찰될 것이라 보기 때문이다. 이 말의 원산지는 멀고먼 중앙아시아 국가 투르크메니스탄(Turkmenistan)으로 국제적으로 공인된 이름은 아칼 테케(Akhal Teke)다. 중국인은 그 말에 전기적인 색채가 농후한 명칭, 한혈보마(汗血寶馬)라 붙였다. 현재 전 세계에 3000여 필밖에 없고 그중 2000여 필은 투르크메니스탄에 있다. 그 나라의 국보다. 그렇다면 한혈
『손자병법(孫子兵法)』에 천 년 동안 논쟁을 벌이고 있는 문제 두 가지가 숨겨져 있다는 것을 아시는가? 문물 발굴에 따라 계속해서 의문을 던지면서 역사의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첫째, 『손자병법』은 82편인가 아니면 13편인가? 둘째, 『손자병법』은 손무(孫武)의 작품인가 아닌가? 손자(孫子)의 이름은 무(武)다. 손무자(孫武子)라고 불리기도 한다. 중국 고대 군사전문가요 병가(兵家)의 창시자다. 제(齊)나라 낙안(樂安, 현 산동 박흥〔朴興〕 북쪽, 일설에는 혜민〔惠民〕이라고도 한다) 사람이다. 생졸연대는 알려져 있지 않다. 대략 기원전 6세기 말에서 5세기 초에 활동했다고 전한다. 손무는 원래 제나라 전(田) 씨의 후예다. 전란을 피해 떠돌아다니다가 오(吳)나라에 이르러 오왕에게 중용된다. 오나라를 개혁해 강국으로 만들었다. 오나라는 손무의 도움으로 서쪽으로 강국 초(楚)나라를 치고 남쪽으로 월(越)을 정복했으며 북으로는 제(齊)와 진(晉)을 위협할 정도로 강한 제후국이 되었다. 그때가 오나라의 전성기였다. 손자 일생에 있어 후세에 남긴 최대의 공헌은 그의 군사관련 저작 『손자병법』이다. 중국에 현존하는 최초, 최고의 병법 걸작이다. 여태껏 ‘병경
사람들은 진시황이 6국을 멸하고 통일제국을 만들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중앙집권을 강화하기 위해 여러 가지 조치들을 실행했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중, ‘분서갱유(焚書坑儒)’는 가장 잘 알려진 사실이요 잔혹한 역사임도 알고 있다. 그런데 ‘분서갱유’는 아직까지도 풀리지 않은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도대체 진시황은 왜 갱유를 자행했는가? 그리고 갱유한 수는 몇 명일까? 기원전 213년, 진시황은 함양궁(咸陽宮)에서 유생(儒生)을 위하여 대대적으로 주연을 베풀었다. 연회석상에서 많은 유생들이 모여 분봉제分(封制)를 실시하여야 하느냐 마느냐에 대해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 왕관(王綰), 박사 순우월(淳于越) 등은 분봉제를 실시해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반면 승상 이사(李斯) 등은 군현제(郡縣制) 실시를 주장하면서 순우월 등이 “지금을 스승으로 삼지 않고 옛것을 배운다”, “옛것을 얘기하면서 지금을 해친다”고 공격하였다. 최종적으로 진시황은 이사의 견해를 지지하고 이사의 ‘분서’ 건의를 받아들였다. 그리하여 진기(秦紀, 진나라 사서), 의약
한비(韓非, BC 약280~233), ‘한비자(韓非子)’라 칭하기도 한다. 기원전에 출생한 한국(韓國) 화하족(華夏族) 중의 귀족으로 전국시대 말기 걸출한 사상가요 철학자이며 산문가이다. 이러한 역사적 인물이 어떻게 역사적 현안이 됐을까? 도대체 한비자는 어떻게 죽었을까? 한비, “형명(刑名) 법술(法術)학을 좋아하였다.” 나중에 한비자라 칭한다. 이사(李斯)와 동문으로 순자(荀子)의 제자다. 당시 한국은 국력이 약하여 이웃나라가 업신여겼다. 한비는 여러 차례 한왕(韓王)에게 부강의 계책을 진언했으나 받아들이지 못했다. 『고분(孤憤)』, 『오두(五蠹)』 등 체계적인 문장을 썼는데 나중에 『한비자(韓非子)』에 수록하였다. 진왕(秦王) 영정(嬴政)이 한비의 문장을 읽고 높이 평가해 주위 사람들에게 “과인이 이 사람을 만나 같이 노닌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겠다”고 하였다. 만남이 너무 늦었음을 한탄하는 말이리라. 그러나 한비가 진나라로 간 후 진왕이 말한 대로 되지 않았다. 오히려 옥에 갇히고 얼마 없어 죽임을 당한다. 그가 어떤 이유로 죽임을 당하였는지 서한 이후 각기 다른
동중서(董仲舒, 기원전 179~104), 서한 광천(廣川, 하북 경현〔景縣〕 광천진 대동고장촌〔大董故莊村〕)사람으로 사상가, 정치가, 교육가, 유심주의철학가, 금문경학자이다. 한 경제(景帝) 때 박사가 돼 『공양춘추(公羊春秋)』를 강술하였다. 한 무제(武帝) 원광(元光) 원년(기원전 134), 무제가 조서를 내려 치국방략을 널리 구하자 동중서는 유명한 「거현량대책(擧賢良大策)」에서 계통적으로 “천인감응(天人感應)”, “대일통(大一统)” 학설을 주창하면서 유학을 중국의 정통사상으로 만들어 이천 년 동안 영향을 끼쳤다. 그 학설은 유가 종법사상을 중심으로 음양오행설이 섞여있다. 신권(神權), 군권(君權), 부권(父權), 부권(夫權)을 함께 엮어 제제신학(帝制神學) 체계를 이루었다. 중국 학생들은 역사 교과서를 통해 동중서(董仲舒)가 백가를 파출하고 유학만을 숭상하는 “파출백가(罷黜百家), 독존유술(獨尊儒術)”했다고 배운다. 당시 한무제(漢武帝)가 유술(儒術)과 형명(刑名) 법술(法術)을 결합시켜 통치수단으로 삼았다고, 그리고 후대에 끼친 영향이 지대하다고. 그런데 “파출백가,
노자(老子)는 도교의 시조다. 그의 사상은 중국 이천 년 동안 영향을 끼쳤고 지금까지도 끄떡없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유교학파의 지성선사(至聖先師) 공부자(孔夫子)도 그에게 가르침을 구했다고 전해온다. 그렇다면 노자는 출중한 능력의 소유자였음이 분명하다. 사실, 중국 역사에서 노자는 많은 역사적 미스터리를 남겼다. 특히 그가 출관(出關)했다는데, 그 사실을 캐보자. 역사 기록을 보면 노자는 만년에 청우(靑牛)를 타고 천하를 유람했다고 한다. 도교학설을 강설하면서 철리를 논했고 서역(西域)을 개화시켰다고 한다. 먼저 청우란 무엇인지를 알아보자. 원명은 ‘판각청우(板角靑牛)’다.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둥근 뿔이 아니라 판과 같이 생긴 뿔을 가진 청색 소다. 과연 그럴까? 청우란 상고(上古)의 상서로운 동물 ‘시(兕)’다. 이름과 모양이 ‘우(牛)’일뿐 소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兕’는 소처럼 생겼고 검푸르며 판각(일설에는 이마에 난 독각이라 하기도 한다)이라 하였다. 천하가 태평성대일 때 세상에 나온다고 한다. 태상노군(太上老君)
관중(管仲, 약 기원전 723~645), 희(姬) 성, 관(管) 씨, 이름은 이오(夷吾), 자는 중(仲), 시호는 경(敬), 춘추시기 법가의 대표인물, 영상(潁上, 현 안휘 영상)사람으로 주(周) 목왕(穆王)의 후예다. 중국 고대 저명한 법학가, 철학가, 정치가, 군사전문가이다. '법가의 선구자', '성인지사', '화하문명의 보호자', '화하 제일 재상'이라 칭송받는다. 사기(私妓)는 춘추전국시기에 출현하였다. 『사기(史記)·화식열전(貨殖列傳)』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보인다. “중산(中山)은 땅은 척박한데 인구가 많다. 또 사구(沙丘)에는 음탕하였던 주왕(紂王)의 유풍이 아직 남아 있어, 인민의 습속은 성격이 조급하고 투기로 이익을 취하여 먹고 산다. 남자들은 함께 모여 놀면서 비분강개 노래를 부른다. 평소에는 서로 치고받고 빼앗고 빼앗기며 놀고, 쉴 때는 무덤을 파헤치고 위조품을 만들며, 잘 생긴 남자들은 배우가 되기도 한다. 여자들은 거문고 같은 악기를 뜯고 신발을 끌면서 다니며, 부귀한 자에게 꼬리를 쳐 후궁으로 들어가니 제후국에 두루 퍼졌다.” “조(
화예부인의 죽음에 대해 두 번째 설은 주로 채동번(蔡東藩)의 『송사연의宋史演義』에 보인다. 조광윤이 화예부인에 빠져 몇 년을 헤어나지 못하다가 화예부인의 미색이 쇠하자 조광윤은 딴 마음이 생겼다. 미인 송(宋) 씨에게 애정이 옮겨갔다. “그때 송 씨는 17세였고 태조 나이는 이미 42세였다. 옛말이 하나도 틀리지 않는다. ‘치심여자부심한(痴心女子負心漢)’〔여자는 사랑에 푹 빠져 헤어나지 못하고 남자는 무정하다 ; 남자는 사랑에 빠져도 쉽게 벗어나고 여자는 일단 사랑에 빠지면 끝내 헤어나지 못한다〕라고 하지 않던가. 화예부인은 원래 황후가 되는 희망을 품고 있었다. 송 씨 여인에게 그 자리를 빼앗긴 것까지는 참을 수 있었다. 태조의 사랑도 송 씨에게로 넘어가니 총애까지도 사라져버렸다. 커다란 집이 고요 속에 빠져들었으니 어느 누가 적막함을 풀어줄 수 있었겠는가? 고국의 멸망을 애통해했고 새로운 왕조에서는 총애를 잃었으니. 애통함이 병이 돼 지는 낙엽처럼 흐르는 물에 뛰어들어 구슬 같은 아름다운 향기를 흘러 보냈구나.” 채동번의 이야기는 침소봉대한 점이 있기는 하다. 역사 자료를 고증해보면 받아들일 수 있는 부분이 많기
송 태조 건덕(乾德) 2년 11월, 조광윤은 충무절도사 왕전빈(王全斌)에게 6만 병사를 이끌고 촉으로 진격하라 명했다. 동시에 공장(工匠)들에게 명해 변량(汴梁)에 촉의 군주 맹창이 살 주택을 지으라고 하였다. 그리고 장병들에게 유조를 내린다. “행군하여 이르는 곳에서 민가를 불사르거나 백성을 쫓아내거나 분묘를 파내거나 뽕나무를 벌목해서는 결코 안 된다. 성과 마을을 함락한 후에 포로를 남살하거나 재물을 빼앗아서는 안 된다.” 그때 변량에 큰 눈이 내렸다. 송태조는 강무당(講武堂)에서 검은 단비 옷을 입고 일을 보다 갑자기 좌우에게 말했다. “내가 이렇게 입고도 춥다고 느끼는데 서정을 나간 장병들이 생각나는구려. 눈서리를 뒤집어 쓸 텐데 어찌 이보다 못하다 하겠소?” 즉시 의복을 벗어 태감에게 주면서 촉 지역으로 달려가 왕전빈 장군에게 전달케 하고 전군에게 두루 상을 내리지 못하여 유감이라 전하라고 하였다. 그러자 송나라 군대는 용기를 내어 진군하였다. 성도를 지키고 있는 촉나라 병사는 전투도 제대로 해보지 못하고 무너졌다. 맹창은 화예부인에게 “우리 부자는 따뜻한 옷과 풍족한 양식으로 병사들
맹창은 향락이란 무엇인지를 잘 알고 있는 인물이었다. 송 태조가 후촉을 멸한 후 시위들은 송 태조의 뜻에 따라 물건들을 수습했는데 그들은 맹창의 소변기까지도 거두어 갔다. 소변기라면 더러운 것일 터인데 시위들은 어째서 그것을 가지고 가서 태조에게 바쳤을까? 맹창의 소변기가 남달랐기 때문이다. 칠보로 단장해 정미하기 그지없었다. 시위들이 보고는 무척 기이하게 여겼지만 감히 속일 수 없어 가지고 가서 태조에게 보였던 것이다. 태조가 맹창의 소변기를 보고는 그런 장식을 했다는 데에 감탄을 금하지 못하여 “소변기를 칠보단장했다면 무엇으로 음식을 저장하였던 것인가? 사치가 이 정도인데 어찌 망하지 않겠는가!” 탄식하며 시위들에게 가지고 나가 부숴버리라고 하였다. 맹창은 또 어떤 것이 탐닉인지를 잘 알았던 인물이다. 그는 촉 지역의 미녀들을 광범위하게 징집해 후궁으로 충당하였다. 비빈 이외에 다시 12등급을 두었다. 그중 가장 총애를 받은 인물이 ‘화예부인’ 비(費) 귀비다. 맹창은 매일 궁녀들 틈에 싸여 살았다. 연회가 끝날 때 쯤 여가가 생길 때마다 화예부인과 함께 후궁의 미녀들을 어전으로 불
중국 오대십국(五代十國)시기 화예부인(花蕊夫人)이라 부르는 여성이 몇 있었다. 용모가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시부(詩賦)에도 능하여 다재다능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들에 관한 사적은 오대에서 양송(兩宋)에 이르는 여러 사적에 두루 보인다. 그들이 처한 시대가 서로 같고 모두 화예부인이라 불렀기 때문에 그들의 신분과 사적은 지금까지도 많은 의혹에 싸여 있다. 오대십국 사이에 화예부인이라 불린 여성은 3명이다. 첫 번째, 전촉(前蜀) 군주 왕건(王建)의 숙비(淑妃) 서(徐) 씨(약883~926), 성도(成都)사람이고 궁중에서 화예부인이라 불렀다. 언니도 왕건의 비였기에 ‘소서비(小徐妃)’라 부르기도 한다. 자매가 모두 총애를 받았다. 언니의 아들 왕연(王衍, 세칭 후주〔後主〕)이 황위에 오른 후 익성황태비(翊聖皇太妃)에 봉해졌다. 화예부인과 그 언니는 총신들과 교재하고 뇌물을 받고 정치에 간여하면서 후주를 놀이에 빠져 실정하게 만들었다. 나중에 왕연과 함께 후당(後唐)의 장종(莊宗)에게 피살된다. 두 번째, 후촉(後蜀) 군주 맹창(孟昶)의 비였다. 성은 서(徐, 일설에는 비〔费〕 씨라고 하기도 한다) 씨로 혜비(慧妃)
20여 년 전 홍콩과 대륙 합작품인 무협영화 ‘목면가사(木棉袈裟)’가 개봉되자 대륙에서 일대 선풍을 일으켰다. 한바탕 흥행이 끝나자 사람들은 역사상 진짜 목면가사라는 보물이 있는지 의문을 품게 되었다. 영화처럼 불문제자 사이에 목면가사를 쟁탈하려고 목숨을 걸고 추살한 사실이 있는 것일까? 있다면 목면가사는 최후에 누구의 손에 들어갔는가? 불문과 세속이 똑 같다는 말인가? 창상의 풍우 속에서 감춰졌던 신비의 면사는 벗겨져 세상에 알려지게 됐지만, 영화는 역사가 아니다. 역사 속 어떤 영상을 뽑아내 엮어낸 것일 따름이다. 목면가사는 그저 달마조사(達摩祖師)만 전해져 내려온 보물일 수는 없다. 557년, 남조(南朝) 양무제(梁武帝) 시기 천축(天竺) 선종(禪宗) 제28대 보제달마(菩提達摩)가 인도양을 통하여 말라카해협을 넘어 중국에 건너가 선종(禪宗)을 전파하였다. 보제달마는 당시 가사를 가지고 갔다. 이것이 대대로 선종 전법의 신물(信物)이 되었다. 후세에 불가의 제자들이 성물(聖物)로 여기는 ‘목면가사’다. 사전적 의미로 다시 뒤적여보자. ‘목면가사’는 원래 석가모니의 ‘금루가사(金縷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