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책략은 오래지 않아 동진(東晉, 317~420) 때 온교(溫嶠)가 빌려 쓴다. 술을 빌어 일을 야기하면서 이간질했다는 것이 다를 뿐이다. 동진시기에 대장 왕돈(王敦)은 역모를 준비하고 있으면서 온교를 단양(丹陽) 영윤(令尹)으로 임명해 특별히 그를 위하여 송별연을 베풀었다. 온교는 자신이 떠나고 나면 왕돈의 군사 전봉(錢鳳)이 왕돈의 면전에서 자신을 헐뜯는 말을 할까 염려돼 송별연을 막을 방법을 찾았다. 송별회 때 전봉이 아직 술을 마시기 전에 온교는 술에 취한 척 전봉의 뺨을 때렸다. 전봉의 두건이 땅에 떨어질 정도로 후려치고는 호되고 꾸지랬다. “너 전봉, 네가 뭔데? 나 온교가 술을 권했는데도 감히 네가 마시지도 않아!” 전봉은 대단히 화가 났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왕돈은 온교가 취했다고 생각해 전봉에게 위로하며 화해시켰다. 다음날 전봉이 왕돈에게 말했다. “온교는 조정과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함부로 믿을 수 있는 인물이 아닙니다. 그를 조심하셔야 합니다.” 왕돈이 말했다. “온교가 어제 너무 취해서 그대에게 무례를 범한 것이오. 그런대도 그대는 그것 때문에 헐뜯는 말을 하는 것이오
도요새와 민물조개가 서로 싸우면 어부가 이익을 얻게 된다. 실제로 어떤 대가도 없이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가벼이 어부지리를 얻는 경우가 있다. 이런 좋은 기회라면 누구도 놓치려 하지 않을 것이다. 어부지리를 얻는 경우는 대체로 두 가지 상황이 있다. 첫째는, 변화를 조용히 지켜보는 경우다. 도요새나 어부처럼 제3자가 되어 조용히 지켜보는 것이다. 먼 산에서 호랑이끼리 싸우는 것을 지켜보는 경우와 같다. 연극을 보듯이 감상한다는 관점을 가지고 상대가 내부에서 분멸을 일으키고 자기편끼리 서로 죽이는 것을 지켜보면 된다. 양패구상(兩敗俱傷)으로 끝날 때까지 기다리면 된다. 연극이 끝나기를 기다리는 것과 마찬가지다. 순수견양(順手牽羊)이다. 손에 잡히는 대로 양을 끌고 가면 된다. 둘이 쓰러지면 아무 힘도 들이지 않고 들고서 소리 높여 노래 부르며 돌아가면 된다. 둘째는, 주동적으로 출격하는 것이다. 상대방 내부에 잠입해 갈등을 일으켜 둘이 싸우게 만든다. 아니면 갈등을 조장해 각개 격파하면서 이익을 얻으면 된다. 어부지리는 매혹적인 일이다. 대가를 치루지 않거나 적은 대가로 큰 이익을 얻는다면 어찌 기쁘지 않겠는가? 진(秦)나라 소양왕(昭襄王, BC325~BC25
중국 고대 역사에서 환관(宦官)이 권력을 독점한 사례는 많고도 많다. 왕조마다 그에 따른 교훈을 얻을 수 있을 정도다. 한(漢)나라 원제(元帝, BC74~BC33)는 환관 석현(石顯)을 총애하였다. 석현은 중서령이 돼 조정의 크고 작은 일을 자신이 재결하였다. 석현은 사람됨이 올바르지 못했다. 주변 사람들이 자신을 헐뜯는 말을 황제가 듣게 될까봐 걱정이었다. 그래서 황제에게 끝없는 충성심을 표시하였고 온갖 방법을 동원해 신임을 얻으려 노력하였다. 어느 날, 석현은 궁궐에 파견돼 일을 보게 되었다. 그는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자신에 대한 태도를 실험할 수 있는 좋은 기회로 생각했다. 황제에게 상소를 올려 일을 처리하는 데에 너무 늦어 미앙궁(未央宮) 궁문이 닫히면 들어올 수 없을까 염려되니 황상께서 문지기에게 조서를 내려 걸쇠를 채우지 말도록 하조해달라고 청했다. 황제는 곧바로 각 궁문을 지키는 문지기에게 같은 내용의 조서를 내렸다. 석현은 고의로 시간을 지연시키며 각 궁문에 문지기들을 머무르게 만든 후 한밤중에서야 돌아왔다. 문지기들은 밤늦도록 기다렸다가 그에게 문을 열어주었다. 아니나 다를까 나중에 석현이 황제에게 거짓 구실을 대어 자기 마음대로 궁문을 여
‘당근과 채찍’의 원리는 자명하다. 인자할 때는 인자하고 엄할 때에는 엄해야 하고 내칠 때는 내치고 당길 때는 당겨야 한다는 말이다. 중국역사에 전형적인 사례가 있다. 주원장(朱元璋, 1328~1398)은 역사에서 ‘야심과 의심이 많은 군주(雄猜之主)’로 유명하다. 야심이 컸으며 의심도 많았다는 말이다. 그가 황제에 오른 후 중국 천하를 다스릴 때 겸허하고 현인을 받아들이며 현자를 임용하는 기풍은 뒷전으로 밀려두고 아침저녁으로 자신의 절대 권력과 가천하(家天下)를 유지하는 데에 골몰하였다. 주원장은 각종 비열한 수단을 사용해 자신에게 동조하지 않는 자는 배척하고 공신을 주살하였다. 이선장(李善長, 1314~1390)은 주원장을 따라 전쟁터를 전전하였다. 지모가 뛰어나고 판단이 정확한 인물로 유명하다. 개국 초기에 법률제도, 종묘 예의를 제정해 주원장과는 물과 물고기 같은 사이었다. 주원장은 이선장을 한나라의 소하(蕭何)와 비교하면서 그를 “공신의 수장”이라고 불렀다. 개국 후 최초로 승상 자리에 앉도록 하였다. 주원장이 성공해 천자의 자리에 앉자 이선장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지기 시작하였다. 이선
1963년, 부친의 유산 문제로 증헌재(曾憲梓)는 멀리 태국에 있는 형 증헌개(曾憲槪)가 여러 번 재촉하자 태국으로 건너갔다. 증헌재의 숙부 증도발(曾桃發)은 그 소식을 듣고는 증헌재가 그의 형과 힘을 합쳐 자신과 대적하려고 태국으로 온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장면이 연출된다. 새벽 일찍, 얼굴 가득 웃음을 머금은 객가(客家) 손윗사람 세 명이 증헌개의 작은 점포에 찾아와 고집스레 증헌재를 “차라도 한 잔 하고 식사라도 하자고” 청했다. 증헌재는 정중하게 그들을 따라 증도발의 회사에 갔다. 모든 사람이 자리를 잡자 숙부들이 친근하고 온화하였던 처음 모습을 바꾸어 증헌재를 질책하기 시작하였다. “네 꼴 좀 봐라! 무슨 모양이 그러냐. 경우도 없이. 태국에 오고 나서 여태까지 숙부나 숙모를 찾아와 인사도 하지 않고. 네가 뭔데? 무례하기가 짝이 없구나. 사실 증헌재는 태국에 도착한 당일 아랫사람의 도리를 다하려고 숙부와 숙모를 찾아가 인사를 드렸었다. 숙부들이 면전에서 훈계하는 것은 그야말로 증헌재를 얼떨떨하게 만들었다. 숙부들이 아무 말도 못하는 증헌재의 모습을 보고 정말로 대역무도했다고 생각해 사정을 봐주지 않고
전국시대 야사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전해온다. 당시 북방에는 두 종류의 말이 특히 유명하였다. 하나는 몽골마로 힘이 대단히 세, 천여 근을 질 수 있었다. 다른 하나는 대완(大宛)마로 날듯 내달려 하루에 천리를 달렸다. 한단(邯鄲)에 몽골말과 대완마를 각 한 필씩 기르는 상인이 한 명 있었다. 몽골마로 화물을 운송하고 대완마로 편지 등을 전달하였다. 두 말을 한 마구간에서 기르니 한 구유에서 사료를 먹을 때마다 서로 물고 차고 하였다. 매번 서로 지지 않고 양패구상으로 끝나는 통에 늘 수의사를 초빙해 치료하여야했다. 그것 때문에 주인이 골머리를 앓았다. 때마침 백락(伯樂)이 한단에 도착하자 상인은 그 문제를 풀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부탁하였다. 백락이 마구간에 가서 가만히 보고 있다가 살며시 웃으면서 두 글자를 써줬다. ‘분조(分槽)’였다. 구유를 나누면 된다는 간단한 말이었다. 상인은 그의 말대로 구유를 따로 나누어 먹이니 다툼이 없었다. 이때부터 아무 문제없이 두 말을 길렀고 사업에 제대로 활용하게 되면서 나날이 장사가 잘됐다. 후계자의 문제는 오랫동안 중국기업을 괴롭히는 문제였다. 특히 후계 대상자가
옛사람이 말했다. 자신이 가장 옳다고 하는 사람은 믿지 말고, 어질다 어질지 않다 시비하는 사람은 경계하라. 무슨 말인가? 우리가 주의하지 않을 때 어느 때 어디서든지 소인이 나타나 문제를 일으키면서 우리에게 엄중한 손해를 입힌다는 말이다. 전국시대에 중산(中山, BC414~BC296)이라는 작은 나라가 있었다. 국군(國君)은 많은 사인(士人)을 받아들였다. 어느 날, 중산국의 국군이 도성에서 국내의 명사와 인재, 현사를 위하여 연회를 베풀었다. 연회의 주된 요리는 양고기 죽이었다. 창졸지간에 준비하여서 그랬는지 양고기 죽이 충분하지 못하여 죽을 먹지 못하는 사람이 생겼다. 당시에 국군도 몰랐고 여타 사람도 개의치 않았다. 단지 사마자기(司馬子期)라는 사람만 양고기 죽을 먹지 못하여 마음속에 원한을 품었다. 그는 생각하였다. “오늘 여기에 온 사람은 모두 명사다. 나 사마자기도 아무 짝에 쓸모없는 사람도 아니고 범재도 아니잖은가. 모든 사람이 다 양고기 죽을 분배 받았는데 오직 나만 받지 못했다. 나를 너무 무시하는 것이 아닌가? 이렇게 많은 사람 앞에서 다른 사람은 다 맛있는 음식을 먹는데 오로지 나만 죽을 먹지 못한다니. 더욱이 어떤 사람은 한
통찰력이 출중하다고 해서 좋은 결과를 가져오는 것은 아니다. 통찰력이 뛰어난 사람은 작은 것을 관찰하는 데에 능하여 치밀한 것에는 깊은 경지에 이르지만 어떤 때에는 큰 문제를 소홀히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호리지차(毫釐之差)를 아주 분명하게 잴 수 있는 사람은 천하 형세를 이해하는 데에 소홀할 수 있다. 작은 일 한 가지를 놓치지 않으려는 사람은 큰일에는 늘 혼란스러워 한다. 항우(項羽)가 젊었을 때, 글공부도 중도에 그만두고 검술 배우는 것도 중간에서 흐지부지 그만두었다. 그러자 숙부 항량(項梁)이 화를 내자 항우가 말했다. “글공부는 자기 이름을 쓸 정도면 되는 것입니다. 검을 배우는 것도 한 사람과 우열을 가리는 데에 필요한 것일 뿐으로 검을 배우는 것보다 만인과 겨룰 수 있는 무술을 배워야합니다.” 항량이 그 말을 듣고 크게 기뻐하며 그에게 병법을 가르쳤다. 여러 가지 면을 전체적으로 관리하려는 사람은 반드시 전체적인 것을 알고 대세를 읽어야한다. 자질구레한 사소한 일을 버릴 줄 알아야한다. 이 법칙은 대단히 중요하다. 동한(東漢) 명신 진번(陳蕃)이 말했다. “대장부는 마땅히 천하를 일소해야지, 어찌 집안의 자질구레한
사람이 어떻게 발전해 나가는지를 알 수 있을까? 성격 특징과 언행을 보면 알 수 있다. 성격과 언행이 사람됨의 표현이다. 이른바 천성이란 운명이라고나 할까. 사람됨의 규칙이라 할 수 있다. 한고조(漢高祖)가 병이 들어 위급할 때 여후(呂后)가 곁에서 누가 승상이 되면 좋겠느냐고 묻자 답했다. “조참(曹參)이 좋소.” 조참 이후에는 누가 좋겠느냐고 묻자 유방이 답했다. “왕릉(王陵)이 좋소. 그런데 왕릉은 사람됨이 충실하고 무던하니 진평(陳平)이 그를 도울 수 있소. 진평은 지모가 뛰어나기는 하지만 혼자서는 큰일을 맡을 수 없소. 주발(周勃)은 너그럽고 후하며 진중하나 문화 수양이 부족하오. 그러나 유 씨 천하를 안정시킬 수 있는 사람은 주발이오. 그에게 태위(太威)를 맡겨 병권을 장악하도록 하시오.” 나중에 주발은 유방의 말대로 권력을 장악해 농단하던 여(呂) 씨 가족을 일거에 뿌리째 뽑아버리고 한나라 왕실을 구했다. 이것을 보면 유방은 사람 됨됨이를 꿰뚫어 보는 눈이 있어 사람의 능력을 잘 알았다고 할 수 있다. 사람마다 각각 다른 가치 취향이 있다. 언행을 보면 다소 편중되는 점을 발견할 수 있다. 권력이나 계책
다른 이야기도 전한다. 길안주(吉安州)에 혼사가 있어 잔치 준비를 하고 있었다. 사람이 많은 틈을 타 도적이 동방에 잠입해 기회를 보고 도둑질하려고 침대 아래에 숨었다. 생각지도 못하게 3일 밤낮을 잔치하니 밝은 불빛 아래 손을 쓰기는커녕 움직이지도 못하여 도적은 배고픔을 참지 못할 지경에 이르렀다. 어쩔 수 없는 지경에 이르자 스스로 침대 밑에서 나와 붙잡혔다. 관부로 이송돼 심문을 받았다. 그런데 그 도적이 자신은 의사라고 하는 게 아닌가? “나는 의사요. 도적이 아니오. 신부가 병증이 있어 나에게 신부를 뒤따라 다니면서 병을 고치라고 하였소.” 그러면서 신부의 집안일이나 신부와 관련된 숨겨진 이야기들을 상세하게 술술 풀어놓는 것이었다. 사실 그의 진술은 모두 침대 밑에 숨어있을 때 엿들은 이야기였다. 관령은 결단을 내리지 못하여 신부에게 대질신문하도록 하였다. 그런데 침대에서 나눈 개인적인 말을 신부가 어찌 쉽게 입에 담을 수 있겠는가. 신부는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나이 든 관리가 현령에게 말했다. “신부가 처음 시집왔으니 대질신문하면 신부의 부끄러운 일이 밖으로 새나갈 것입니다. 저 자가 만약 의사가 아니라 도
백거이(白居易)의 『천가도(天可度)』라는 시를 한 번 보자. 하늘은 헤아릴 수 있고 땅도 잴 수 있지만 오로지 사람 마음은 방비할 수 없구나. 단지 적성이 피처럼 붉다는 것을 알지만 거짓말이 쌍황처럼 교묘할 지 누가 알겠는가. 코를 막으라 하거들랑 막지 마시게 부부가 삼성과 상성처럼 멀리 떨어지게 될지니. 벌을 떼라 하거들랑 떼지 마시게 부자가 승냥이와 이리처럼 될지니. 바다 밑의 물고기나 하늘가의 새는, 높으면 쏠 수 있고 깊으면 낚을 수 있지만, 오로지 사람의 마음이 대비될 때에는 지척지간이라도 헤아릴 수 없나니. 그대는 보지 못하였는가, 이의부의 무리가 희색이 만연하게 웃지만 웃음 속에 칼을 숨겨 사람을 죽이는 것을. 음양과 신비로운 변화는 모두 예측할 수 있지만 인간의 웃음과 성냄은 알길 없어라. 현재 세상에는 재산을 따지거나 교활한 무리가 강을 건너는 붕어마냥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얼굴에는 성실한 웃음을 띠고 불덩어리처럼 열정적이지만 뒤에서는 칼을 움켜잡고 허점을 찌르려 노리고 있다. 이때 지혜로운 눈이 없다면 성공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타인은 식칼과 도마가 되고 자신은 어육이 되어서 착취당하고 유린당하는 신세가 되어버린다. 한무제(漢
제(齊)환공(桓公, ?~BC643)은 아침 조회 때 위(衛)나라를 공략할 계책을 관중(管仲)과 상의하였다. 퇴청해 궁으로 돌아가자 위나라에서 바친 비(妃)가 그를 보고는 곁으로 다가와 절을 몇 번 하고 제환공에게 위나라가 무슨 잘못을 했냐고 조용히 물었다. 제환공은 놀랍고도 이상해 왜 그런 질문을 하느냐고 물었다. 비가 답했다. “제가 대왕께서 궁으로 돌아오시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왕께서는 발을 높이 쳐들고 보무당당하게 큰 걸음으로 들어오셨습니다. 얼굴에는 횡포한 기색이 역역했습니다. 그것은 어떤 나라를 공격하려고 하는 조짐입니다. 대왕께서는 또 다른 사람에게는 아무런 표시도 하지 않으셨는데 저를 보자마자 얼굴색이 갑자기 변했습니다. 분명히 위나라를 치려고 하는 까닭에 그렇게 되신 것입니다.” 이튿날 아침 조회 때 제환공은 관중을 보자 읍(揖)하고 그에게 들어오라고 하였다. 관중이 물었다. “대왕께서는 위나라를 공격하려는 생각을 버리셨습니까?” 제환공은 깊은 상념에 빠져들었다. 요 며칠 자신에게 무슨 마가 끼었는가? 어찌 보는 사람마다 자신이 무슨 생각하고 있는지를 안다는 말인가? 관중에게 물었다. “그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