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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회의 '영화로 읽는 한국사회' - 다우트 (3)

알로이시우스 수녀원장은 플린 신부가 ‘남아 소아성애자’라고 의심한다. 확실한 증거는 없다. ‘비행(非行)’ 했다는 플린 신부의 자백도 없고, 증인과 증언도 없다. 정황 근거라고 해봤자 ‘플린 신부를 만나고 돌아온 흑인 학생 도날드의 입에서 술 냄새가 났다’는 게 전부다. 그 정도만으로 플린 신부를 ‘소아 성애자’로 단정하려면 판타지 소설이나 막장드라마 작가급의 상상력이 필요하다.

 

 

알로이시우스 수녀원장에게 수사권이 있다면 아마도 플린 신부 주변 수십 수백 군데를 ‘압수수색’해서 없는 증거를 만들어내기라도 할 텐데, 안타깝게도 그녀에겐 압수수색 권한이 없다. 어쩔 수 없이 알로이시우스 수녀는 증거도 없이 혼자 마음속으로 기소하고 유죄판결을 내린다. 그다음 플린 신부를 ‘사실상(de facto)’ 흉악범으로 대한다.

알로이시우스 수녀는 수녀원장실로 면담하러 온 플린 신부를 문밖에 나와 막아선다. 조금 있으면 제임스 수녀가 오기로 돼 있으니 그때까지는 들어갈 수 없다고 한다. 감옥을 탈출해 갑자기 수녀원에 찾아온 흉악범을 바라보는 시선이다. ‘실정법상(de jure)’ 적어도 현재까지 플린 신부는 범죄자가 아니지만, 알로이시우스 수녀에게 플린 신부는 ‘사실상 소아성애자’이다.

흉악하고 끔찍한 소아성애자 괴물과 단둘이 같은 방에서 무릎을 맞대고 이야기를 나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마치 피의자가 변호인 입회 없이는 경찰과 한마디도 할 수 없다는 식으로 원장실을 막아선 알로이시우스 수녀는 제임스 수녀를 기다린다. 제임스 수녀가 오고서야 ‘사실상의’ 소아성애자 플린 신부를 방으로 들인다. 단지 범죄 혐의가 있다는 사실만으로 야당 대표와는 거리를 두는 듯한 대통령을 닮았다. 대통령이 보기에 제1야당 대표는 플린 신부처럼 법적 범죄자는 아니지만 ‘사실상’ 범죄자인 모양이다. 

‘사실상’이라는 찝찝한 부사는 많은 혼란의 주범이 되곤 한다. ‘사실은 아니지만 사실과 비슷하다’는 의미도 되고 ‘사실과 비슷하기는 하지만 사실은 아니다’라는 말도 되는 참으로 문제적인 형용사다. 한자어 사이비(似而非)에 해당할 듯하다. 겉보기에는 비슷할 수 있어도 본질은 전혀 다른 것을 이른다. 공자는 사이비를 질색한 것으로 유명하다.

“나는 겉으로는 비슷하나 실제로는 아닌 것을 미워한다. 강아지풀을 미워하는 것은 그것이 곡식의 싹과 헷갈릴까 두려워함이고, 그럴듯한 말을 미워하는 것은 그것이 정의를 어지럽힐까 두려워함이고, 자주색을 미워하는 것은 그것이 붉은 색과 혼동될까 두려워함이다(맹자 진심하(盡心下)편).”

모든 것을 이해하고 포용하는 성현(聖賢)인 공자조차도 사이비를 향해선 여과없이 분노를 드러내는 것도 모자라 ‘미워한다’는 공자님답지 않은 표현까지 동원한다. 그럴 만도 하다. 가짜가 진짜 같아 보이면 세상이 망한다.

우리나라 안보실의 최고 책임자가 한미정상회담 결과를 브리핑하면서 미국과 맺은 ‘NCG(핵 협의 그룹ㆍNuclear Consultative Group)’라는 낯선 이름의 협정을 ‘사실상 핵 공유(de facto nuclear sharing)’라고 정의해 온 나라와 미국까지 혼란에 빠뜨렸다. 그분은 ‘핵 인지 감수성’이 유난히 뛰어나서 수만리 밖 미국에 있는 핵무기도 우리나라에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지 모르겠다.

아마도 우리나라 대통령실 안보 책임자의 ‘사실상 핵 공유’라는 설명이 ‘사이비 핵 공유’라고 판단했는지 백악관 안전보장회의(NSC) 국장이 ‘사이비’에 분노하는 공자님처럼 질색하고 ‘핵 협의’는 절대 ‘핵 공유’가 아니라고 펄쩍 뛴다. 한국의 ‘사실상 핵 공유’ 주장에 ‘법적으로 미국 핵 사용은 미국 대통령이 독점하는 것’이라고 당장 반박한다. 우리 대통령이 미국 대통령과 ‘친구 먹고’ 의회 연설에서 23번이나 기립박수를 받았다는데도 우리처럼 얼렁뚱땅 넘어가주지 않는다. 참으로 야박하지만, 부끄러움은 항상 국민 몫이다.
 

 

‘사실상’이라는 어법은 수학의 반올림과도 닮았다. 숫자를 얼렁뚱땅 몇번 반올림하다 보면 23도 100이 된다. 23은 25로 반올림하고, 25는 30으로 반올림하고, 30은 50으로, 50은 다시 100으로 반올림해도 무방하다. 그러다 보면 25는 사실상 100이 될 수도 있다. 그렇게 ‘반올림’ 몇번 하다 보면 대통령의 직무수행 지지율 25%도 과반으로 만들 수 있고, ‘사실상’ 전국민의 지지로 봐도 괜찮아진다.

‘핵 협의’ 앞에 사실상을 붙여 반올림 두어번 하면 ‘핵 협의’가 ‘핵 공유’가 되고, ‘핵 공유’는 ‘핵 보유’와 큰 차이가 없으니 우리나라는 ‘사실상’ 핵보유국이 되고, 세계 최대 핵무기 보유국의 핵을 우리가 공유한다면 우리나라가 곧 ‘사실상’ 세계 최대 핵보유국이라 해도 무방하다. 플린 신부가 흑인 학생을 단둘이 만났다는 사실을 ‘반올림’하다 보면 ‘사실상’ 흑인 학생과의 동성애가 되는 식이다.

나라의 경제와 안보에 사활적인 이익이 걸린 한미정상회담의 협상 안건들에 대해 어떤 치열하고 치밀한 사전작업을 거쳐 현장에서의 전투적인 담판이 있었는지는 몰라도, 기대했던 반도체와 자동차 관련 문제도 간 곳이 없고, ‘사실상 핵 공유’라는 민망한 주장밖에 남은 것이 없어 보인다.

중국의 외교를 총괄했던 저우언라이(周恩來) 총리는 외교에 임하는 그의 자세를 ‘외교란 다른 수단에 의한 전쟁의 연속’이라고 말한다. 그만큼 외교 협상은 사생결단식으로 임해야 한다는 의미인 듯하다. 
 

 

옛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었던 니키타 흐루쇼프(Nikita Khrushchev)는 1960년 유엔총회에서 미국을 대신해 소련의 팽창을 공격하는 필리핀 대표의 연설에 구두를 벗어 회의장 테이블을 두들기며 “미국 제국주의의 꼭두각시. 빌어먹을 멍청한 놈”이라고 소리치며 난장판을 만들어 전세계를 떨게 한 인물이다. 그야말로 한 치의 양보도 없는 전쟁 같은 외교다.

우리 대통령이 미국 의회에서 훌륭한 영어로 ‘자유와 민주주의’라는 너무나 지당한 말씀으로 미국 의원들이 23번이나 기립박수를 쳤다는데, 큰 감흥이 밀려오지 않는다. 미국 대통령이 한국 국회를 방문해서 할 법한 주제의 연설을 한국 대통령이 미국 의회에서 하는 것 같아 어리둥절하기도 하다.

차라리 우리 대통령이 의회 연설에서 한국 자동차와 반도체에 피해 주지 말라고 구두를 벗어 의회 연단을 두들기고 열변을 토하다 미국 의원들로부터 23번의 야유를 받았다면 과연 ‘우리의 대통령’이라고 자랑스러움을 느낄 것 같다. [본사 제휴 The Scoop=김상회 정치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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