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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회의 '영화로 읽는 한국사회' - 다우트 (16)
合理적 이성과 合利적 이성 ... 교사 매장해 자식 지키는 건
도구적‧合利적 이성의 전형 ... 자신의 이익 조금 내려놓고
객관적 이성을 회복해야 .. 고통과 굴욕 벗어날 수 있어

흑인 남학생에게 플린 신부가 동성 성추행을 했다는 ‘의심’을 떨쳐버리지 못하는 알로이시우스 수녀는 마침내 흑인 남학생의 어머니인 밀러 부인을 학교로 부른다. 영문도 모른 채 학교에 찾아와 교장선생님이기도 한 알로이시우스 수녀로부터 ‘청천벽력’과도 같은 이야기를 들은 밀러 부인의 반응은 의외로 시큰둥하고 담담하다. 알로이시우스 수녀도 그녀의 시큰둥한 반응에 당황한다.

 

 

알로이시우스 수녀는 그 끔찍한 의혹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밀러 부인에게 ‘이 문제는 매우 심각한 문제이며, 부인께서도 저와 함께 반드시 밝혀야 하는 문제’라고 다그친다. 그런 알로이시우스 수녀에게 밀러 부인은 오히려 눈을 똑바로 뜨고 분노한다. 

밀러 부인이 분노한 이유도 밝혀진다. 그 학생이 본래 동성애 성향이 있다는 것이며, 이 문제를 남편이 알면 아마도 아이를 ‘때려죽일 것’이라고 으르렁대듯 수녀에게 퍼붓는다.

또한 아이와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흑인인 자기 아들이 요행히 얻은 백인학교 입학 기회를 살려 무사히 졸업하는 것이지, 신부와 그런 일이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전혀 중요한 일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한다. 그렇게 천지분간을 못한 채 아들 신세 망치려드는 알로이시우스 수녀를 질책한다.

‘정의 구현’의 사명감에 불타던 알로이시우스 수녀는 한순간 할 말을 잃고 좌절한다. 알로이시우스 수녀는 밀러 부인이 플린 신부의 ‘동성애 의혹’을 들으면 자신과 마찬가지로 ‘객관적’이고 ‘합리(合理)적 이성’으로 분노해 주리라 믿었지만 그렇지 않았다.

그 문제에 자기 아들이 관련돼 있는 한 밀러 부인에게 ‘합리(合理)적 이성’ 따윈 중요하지 않다. 그 자리를 자식을 위한 ‘주관적’이고 ‘합리(合利)적 이성’이 자리 잡을 뿐이다. 

현대자본주의사회 문명에 유감이 많은 독일 프랑크푸르트학파의 대표학자 중 하나인 철학자 막스 호르크하이머(Max Horkhe imer)는 「이성의 종말(Eclipse of Rea son):1947」이란 책에서 이미 1960년대 밀러 부인이 내리는 ‘합리(合利)적 판단’을 예언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이성의 종말」의 독일어 제목은 ‘도구적 이성 비판(Zur Kritic der instrumentellen Vernunft)’이다. 말 그대로 근대 이후 인간의 ‘이성’은 자기 자신의 이익을 지키고 극대화하기 위한 ‘도구’로서의 이성으로 전락했다고 개탄한다.

플라톤 이래 인간들이 믿고 추구해왔던 객관적이고 초월적인 목표인 진眞(truth), 선善(goodness), 미美(beauty)를 향한 ‘합리적 이성’이 어둠 속으로 사라져버렸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슬퍼한다.

신부가 자신이 가르치는 남학생을 성적으로 착취했다면 그 사실에 분노하고 바로잡으려는 것이 ‘합리(合理)적 이성’이다. 신부가 남학생을 자신의 성적 쾌락의 목적으로 착취한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진ㆍ선ㆍ미’와 부합되지 않는다.

그런데도 자기 자식의 장래를 위해 눈감고 넘어가자는 것은 자신과 자기 자식만을 위한 ‘합리(合利)적 이성’이며 호르크하이머가 개탄한 ‘도구적 이성(instrumental reason)’의 발현이다.

호르크하이머는 현대사회의 모든 모순과 부패, 지옥과 같은 고통이 모두 이런 ‘합리(合利)적ㆍ도구적’ 이성이 ‘객관적ㆍ합리(合理)적’ 이성을 몰아내고 전면에 자리 잡으면서 시작했다고 분석한다.

영화를 보는 관객들이 과연 밀러 부인의 ‘도구적 이성’의 발현을 호르크하이머처럼 비판할 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 어떤 부모는 자식이 학교에서 친구들을 괴롭히는 게 잘못이라는 걸 알지만 자식의 장래를 위해 그 죄를 덮어주기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한다.

또 어떤 부모는 자기 자식이 교사에게 아무리 행패를 부려도 오히려 교사를 학교에서 추방하고 사회적으로 매장해서라도 자식을 지킨다. 이 모두 ‘합리(合利)적ㆍ도구적’ 이성의 결과물인 듯하다. 

연일 날씨가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끓는다. 인간들이 좀 편하게 살자고 무지막지하게 이산화탄소를 뿜어대서 ‘온실효과’가 생겼다고 하더니 아마 그래서 그런 모양이다. 지구를 지키기 위해서는 이산화탄소 배출을 줄여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모두 조금은 불편함을 감수해야 한다는 게 ‘합리(合理)적 이성’이다. 
 

 

그렇지만 그런 불편함이 모든 개인에게나 각 나라 정부들이 열심히 계산하는 ‘국가 이익’에는 부합하지 않는다. ‘합리(合理)적 이성’이 결국 ‘합리合利적 이성’에 밀려나면서 온실 효과는 수그러드는 대신 점점 커지고 있는 모양이다. 그런 측면에서 세계 청소년 잼버리 대회마저 아수라장 난장판이 돼버린 모양이다.

요즘 온 나라를 고통스럽게 하는 교권추락 문제나, 인류의 생존 자체에 위기의식을 느끼게 하는 찜통더위를 겪으면서 문득 호르크하이머가 그의 저서 서문에 ‘이 글은 정복과 지배에 저항하며 고통과 굴욕의 지옥을 겪고 있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전달하는 것’이라고 써놓은 글이 마음에 와닿는다.

모두 자신의 이익을 조금이라도 내려놓고 ‘객관적’ 이성을 회복하지 않는 한 이 모든 고통과 굴욕에서 벗어날 길이 없어 보이니 답답하다. [본사 제휴 The Scoop=김상회 정치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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