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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회의 '영화로 읽는 한국사회' - 다우트 (11)
지적 당하면 피장파장 대응 ... 논리에 기반한 승부도 없어
끝없는 하향평준화 무승부 ... 무한 반복하는 정치 갈등

플린 신부는 새로 부임한 교구의 수녀원장 알로이시우스 수녀가 ‘이유 없이’ 자신에게 무척이나 적대적이라는 것을 감지하고 수녀원장실로 찾아가 대화를 시도한다. 그리고 비로소 자신에게 ‘아동 성추행’이라는 무시무시한 혐의가 씌워졌다는 사실을 알아차린다. 

 

 

수녀원장실에서 플린 신부와 알로이시우스 수녀 사이에 격렬한 논쟁이 벌어진다. 그 논쟁을 지켜보는 관객들은 점점 고개를 갸우뚱거리게 된다. 논쟁은 격렬한데 논쟁이 왠지 논리적이지 않아서다. 

‘아동 성추행’ 혐의를 아무리 부인해도 알로이시우스 수녀의 의심을 지울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플린 신부가 뭔가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갑자기 태세를 전환해 공격모드로 나선다.

플린 신부 : “그래 좋다. 나도 가끔 죄를 지을 때가 있다. 그러는 당신은 정말 완전무결하고 한번도 잘못을 저지른 적이 없는가?”
알로이시우스 수녀 : “물론 나도 죄를 짓는다. 그때마다 나는 신 앞에 내 죄를 고백하고 회개한다.”
플린 신부 : “바로 그거다. 나도 죄를 지으면 신께 고백하고 회개한다. 그러면 된 게 아닌가?”
알로이시우스 수녀 : “아니다. 용서받을 수 있는 죄도 있고, 용서받을 수 없는 죄도 있다. 당신의 죄는 용서받을 수 없는 죄다.”

비논리적 논쟁의 사례집에 나올법한 논쟁이다. 알로이시우스 수녀의 거센 공격에 수세에 몰린 플린 신부는 ‘그러는 너는 얼마나 깨끗하냐?’는 비논리적인 역공을 펼친다. 고대 그리스 궤변론자(sophist)들이 즐겨 했던 ‘그러는 너는?(tu quoque?)’식의 반론이다. 

이 논법은 그리스 사회를 병들게 했던 궤변론자들의 ‘논쟁의 기술’을 개탄했던 아리스토텔레스가 「소피스트적 논박」이란 저술에서 특별히 경계했던 논쟁방식이기도 하다.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는 대신 자신을 공격하는 상대를 물고 늘어지는 방식이다. 서양뿐만이 아니라 동양에서도 궁지에 몰린 사람들이 들이미는 전가의 보도인 ‘피장파장’식 위기탈출 방식이다.

‘피장파장’의 어원은 맹자(孟子)가 말한 ‘피장부아장부(彼丈夫我丈夫)’의 줄임말이다. 상대방의 꼬투리를 잡아 ‘네가 장부이면 나도 장부이고, 내가 소인배면 너도 소인배’라고 물귀신처럼 물고 늘어지는 전략이다. 궁지에 몰린 사람들이 동원하는 ‘비기기 신공’이다.
 

 

이런 맥락에서 플린 신부가 동원하는 ‘그러는 너는?(tu quoque?)’식의 궤변과 이에 대처하는 알로이시우스 수녀의 ‘뻔뻔한 이중잣대(double standard)’란 궤변은 난장판 논쟁의 전형으로 볼 만하다. 

쇼펜하우어(Arthur Schopenhauer)는 우리에게 염세주의 철학자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가 세상에 염증을 느낀 건 궤변이 정상 논리를 덮어버리는 세상 때문이었던 모양이다.

쇼펜하우어는 ‘궤변 감별사’를 자처하고 집필한 「논쟁에서 이기는 38가지 방법」이라는 책에서 그리스 궤변론자들 이래 현대까지 판치는 38가지 ‘악마적인 궤변’ 논법을 정리했다. 궤변과 맞서 싸웠던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의 계보를 잇는 ‘궤변 퇴마사’다.

플린 신부와 알로이시우스 수녀의 논쟁에서 동원되는 ‘그러는 너는?’ ‘이중잣대’ ‘궤변에는 궤변으로 맞서기’ 모두 쇼펜하우어가 명기한 38가지 ‘궤변 감별법’에 포함돼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소피스트적 논박」이나 쇼펜하우어의 「논쟁에서 이기는 38가지 방법」을 뒤적이다 보면 우리 신문과 방송이 전해주는 우리 국회에서 벌어지는 ‘논쟁법’들이 거의 대부분 적시돼 있어서 놀랍기도 하고 입맛이 쓰기도 하고 불안하기도 하다. 

우리 정치 지도자들과 집단은 잘못을 지적당하면 결코 인정하거나 사과하지 않고 거의 본능적으로 ‘그러는 너는(tu quoque)?’부터 들이민다. 그다음 ‘나의 잘못은 용서받을 수 있지만, 너의 잘못은 용서받을 수 없다’는 ‘뻔뻔스러운 이중잣대’를 동원하고, 서로가 궤변으로 상대의 궤변을 받아치는 난장판을 만든다.
 

 

논리와는 별개로 ‘말재주’가 현란한 사람들이 각광을 받고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궤변론자들의 전성시대다. 그러다보니 논리와 사실에 기반한 승부가 나지 않고 끝없이 하향평준화한 무승부가 이어진다. 승부가 나지 않으니 갈등은 무한반복한다.

소피스트들이 득세했던 고대 그리스도 멀쩡하게 찬란한 고대문명을 꽃피웠으니 우리도 걱정할 게 없다고 생각한다면 오산일 듯하다. 소피스트들이 득세하면서부터 그리스 사회는 병들고 결국 페르시아 전쟁(BC 490년 무렵)에서 페르시아 대제국을 물리칠 정도로 강력했던 국가가 60여년 만에 펠로폰네소스 전쟁(BC 430년 무렵)에서 ‘거지 같은’ 스파르타에 패하고 몰락의 길로 접어든다.

그 이후 한동안 자취를 감췄던 소피스트들이 2세기 로마제국에서 다시 극성을 부린다. 그 결과는 모두 알다시피 330년 로마제국의 멸망으로 이어진다. 온통 소피스트들이 점령한 듯한 우리 국회를 보노라면 문득 우리나라 앞날이 무사할지 불안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본사 제휴 The Scoop=김상회 정치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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