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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회의 '영화로 읽는 한국사회' - 블릿 트레인 (11)

영화 속 ‘레몬’은 그 직업상 분명 빌런이어야 하는데 왠지 빌런스럽지 않은 독특한 해결사다. 영화 속에서 잠깐씩 보여주는 그의 킬러 경력은 화려하기 짝이 없다. 남아프리카 공화국, 볼리비아, 홍콩 등에서 미션 임파서블을 수행한다. 그런데 레몬의 내면은 흥미로운 부분이 많다. 
 

 

‘킬러’ 레몬이 지금까지 몇명이나 죽였을지 가늠하기조차 쉽지 않다. 그러나 ‘직업’은 불문에 부치고 ‘인간 레몬’만을 떼놓고 보면 썩 괜찮은 인물이다. 문득 응원하고 싶어진다.

 

화면 속에 잠깐 스쳐가는 그의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면 그다지 교육을 많이 받지는 않은 듯하다. 어쩌면 유치원이 최종학력일 수도 있겠다. 그래서인지 레몬의 바이블은 다양한 기차를 의인화한 「토마스와 친구들(Thomas & Friends)」이란 영국 어린이 교육용 그림책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미국에서는 유치원 원아들 필수교재에 해당한다. 레몬 스스로 자신은 세상의 모든 것을 ‘토마스’에게서 배웠으며 ‘토마스’의 가르침은 한번도 틀린 적이 없었다고 확신한다.

레몬은 야쿠자 보스인 아버지의 위력을 믿고 버르장머리 없이 구는 ‘하얀 사신’의 아들을 보고 「토마스와 친구들」 스티커 북을 꺼내어 ‘퍼시’ 스티커를 그의 이마에 붙여준다. ‘퍼시’는 자체동력 없는 꼬마 기차이며 항상 까부는 캐릭터다. 

만만치 않은 ‘고수 킬러’가 자신들을 노리고 있다는 것을 직감하고는 “열차에 디젤이 타고 있는 것 같다. 디젤을 찾아야 한다”며 심각해진다. ‘디젤’은 「토마스와 친구들」에 등장하는 말썽꾸러기 기차다. 또한 가끔 티격태격하지만 영혼의 단짝이던 ‘탠저린’의 죽음을 확인하고 “너는 정말 고든이었다”고 오열한다.

‘고든’은 「토마스와 친구들」에서 남들의 궂은일을 도맡아 처리해주는 어른스러운 기차다. 단순하지만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주변 인물을 정확하게 품평한 셈이다. 너무 많은 정보는 오히려 직관적인 판단을 흐리게 한다.

또한 레몬은 모범시민이기도 하다. ‘정숙 칸’에서 ‘무당벌레’와 실랑이를 벌이는 중 어느 노파가 소음에 눈살을 찌푸린다. 레몬은 상냥하게 웃어 보이며 미안함을 표시하고 소음을 최대한 자제하며 결투를 이어간다. 

그는 공중도덕을 지킬 줄도 안다. 유키치를 협박하던 ‘왕자’가 레몬에게 자신이 유키치에게 납치당했다고 거짓눈물로 호소하자 레몬은 약자와 여자를 보호해야 한다는 신념으로 유키치를 응징하고 왕자를 구해준다. 그릇된 판단이었지만 의도 자체는 훌륭하다.
 

 

영화의 클라이맥스에서 레몬과 ‘무당벌레(브래드 피트)’는 하얀 사신의 패거리들과 일당백의 혈투를 벌인다. 그 과정에서 무당벌레가 레몬의 목숨을 구해준다. 무당벌레는 레몬의 쌍둥이 형제 탠저린을 죽인 철천지원수다. 

그럼에도 레몬은 무당벌레를 향해 총구를 겨눈 야쿠자를 안고 논개처럼 탄환열차 밖 절벽으로 뛰어내려 무당벌레에게 보은한다. 그리고 마지막에 무당벌레를 향해 총구를 겨눈 왕자를 트럭으로 들이받아 다시 한번 무당벌레를 구한다. 자기 형제를 죽인 원수지만 은혜는 철저히 갚는다. 참으로 존경스러운 모습이다.

어쩌면 우리가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 그렇게 많은 교육이 필요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레몬이 보여주는 미덕들은 모두 유치원에서 가르치는 것들이고, 유아원 교재 「토마스와 친구들」에 나오는 것들이다. 우리는 유치원에서 이미 공중도덕을 지키고, 약자를 보호하고, 은혜를 갚으라고 배운다. 

어느 유아원이나 유치원에서도 원수를 갚으라고는 하지 않는다. 오히려 학력이 높아질수록 공중도덕을 안 지키고, 약자를 짓밟고, 원수만 갚으려들지 은혜는 갚지 않는다. 아마 그래서 오스트리아 철학자 이반 일리치(Ivan Illich)가 ‘탈학교 사회(Deschooling Society)’를 주장하게 됐는지도 모르겠다. 교도소를 은어로 ‘학교’라고 하는 모양인데 일리가 있다. 교도소에서나 학교에서나 나쁜 것만 배워서 나오는 모양이다. 

로버트 풀검(Robert Fulghum)의 「내가 정말 알아야 할 모든 것은 유치원에서 배웠다」는 책이 1988년 뉴욕타임스에서 34주 연속 1위 진기록을 세운 것을 보면 많은 사람이 학교라는 제도가 제공하는 엉망진창 인성교육의 실상을 눈치챈 모양이다. 레몬은 아마 가방끈이 짧은 덕분에 유치원에서 배운 좋은 덕목들을 고이 간직할 수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우리 국회는 판사, 검사, 변호사, 의사, 박사 등 가방끈 길고 굵은 분들로만 꽉꽉 채운 듯한데 그곳에서 나오는 언행들은 평생 읽은 책이라곤 「토마스와 친구들」 그림책 한권뿐인 레몬보다 못해 보이니 어찌 된 영문인지 모를 일이다.
 

 

영국에 어핑엄(Uppingham School)이란 사립고가 있는데 영국인들에게 ‘이튼 스쿨(Eton School)’과 함께 자랑스러운 명문으로 인정받는다고 한다. 이 학교가 몇해 전 개교 200주년을 맞았는데, 기념식에서 교장선생님이 했다는 축사가 인상적이다. 

“아직까지 우리 학교 출신 중에서 장관이 된 사람이 한 사람도 없고, 1000만 파운드 이상 돈을 번 사람이 없다는 것이 너무 자랑스럽다. 출세하고 많은 돈을 벌기 위해선 남들을 밟고 가야 하기 때문이다. 남을 헐뜯지 않고, 남의 이목 끌려 하지 않고, 남의 말을 끝까지 들어주고, 공적인 일에 용기를 내는 사람이라는 어핑엄의 교훈에 따라 여러분들도 평범하지만 예의 바른 영국 시민이 돼달라.” 유치원 졸업식 같은 축사가 명문 사립고등학교의 축사였다니 감동적이다. [본사 제휴 The Scoop=김상회 정치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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