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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회의 '영화로 읽는 한국사회' - 블릿 트레인 (3)

잠깐만 생각해보자. 희생과 참사엔 책임 소재가 뒤따를 수밖에 없다. 하지만 같은 사건을 사망이나 사고로 명명하면 책임 소재를 따지는 게 어려워진다. 권력자들은 이태원 참사를 대체 어떤 눈으로 보고 있을까. 이번 편에선 영화 불릿 트레인 속 주인공들의 ‘무책임론’부터 얘기해봐야겠다. 
 

 

탄환열차 속에서 살인청부업자들이 좌충우돌한다. 그러던 중 흥미로운 장면이 하나 나온다. 환상의 2인조 킬러 탠저린과 레몬은 삼합회에 납치된 ‘하얀 사신’의 아들을 구출하는 과정에서 그들이 처치한 삼합회 조직원이 16명이었는지 17명이었는지를 놓고 다툰다.

급기야 둘은 한 장면 한 장면을 손가락 꼽아가며 복기한다. 그 결과, 레몬이 희생자 수에서 한명을 누락했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17번째 희생자는 뒤집힌 차 안에서 사람을 구하려다 차가 폭발하는 바람에 어이없이 죽어버린 ‘착한 사마리아인’이었다. 

탠저린이 레몬을 향해 “무고한 시민의 죽음에 책임지라”고 목소리를 높이지만, 레몬은 손사래를 친다. 레몬의 표정을 보면, 착한 사마리아인에게 조금 미안하긴 한 모양이다. 하지만 레몬은 하필 그 시각에 그 자리에 있다가 죽었으니 ‘자기 팔자’이거나 본인의 책임이지 자기 책임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최근 ‘레고랜드’ 사태로 금융시장에 폭탄을 터뜨린 모 도지사가 ‘조금 미안’하긴 한데 내 책임은 아니라고 하는 모습을 닮았다.

‘늑대’를 죽인 주인공 ‘무당벌레’의 논법도 레몬과 다르지 않다. 늑대는 무당벌레가 자기 애인을 죽인 ‘그놈’이라고 오해해 불문곡직하고 칼을 쥐고 달려든다. 무당벌레는 분명 늑대를 죽일 마음이 없이 방어만 했을 뿐인데 늑대는 자기가 던진 칼이 튕겨 돌아와 죽는다.

‘착한 사마리아인’의 죽음에 책임지는 걸 회피했던 레몬이 이번에는 무당벌레에게 늑대의 죽음에 책임을 지라고 추궁한다. 무당벌레는 그것은 단순한 ‘사고’였을 뿐 자신의 책임은 아니라고 한다.

그렇게 여기저기 죽은 사람은 많은데 죽인 사람은 없다. 레몬과 무당벌레는 그들의 죽음을 ‘운명사’이거나 ‘사고사’로 몰아간다. 레몬과 무당벌레의 논리는 자신들이 ‘의도하지 않은 죽음’엔 책임질 수 없다는 것이다.
 

 

이태원 핼러윈 거리축제에서 젊은이 156명이 압사당하는 참사가 벌어졌다. 사망의 원인이 압사였다는 것은 밝혀졌는데, 그 원인과 책임을 두곤 공방이 벌어진다. 전(前) 정권이나 현 대통령 책임론부터 사고 현장에서 ‘밀어’를 외친 ‘토끼 머리띠 남자’ 책임론까지 백가쟁명이다.

여기서도 ‘전 정권’이 등장하는 것을 보면 전 정권이야말로 현 정권에는 그야말로 만파식적(萬波息笛)이다. 만파식적은 전설로 내려오는 신라의 보물이자 신물(神物)인 피리다. 그 피리를 불기만 하면 뒤집힐 듯 거친 파도가 한순간에 잔잔해지고 몰려오던 외적도 모두 사라졌다고 한다.

이태원 참사의 책임이라는 민감한 문제가 걸려있어서인지 현 정부는 ‘죽음’을 ‘희생자’로 명명할지 ‘사망자’로 명명할지, 이 사건 이름을 ‘참사’로 할지 ‘사고’로 할지를 놓고도 꼼꼼하기 이를 데 없다.

이런 꼼꼼함으로 핼러윈 축제 경비를 미리 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싶다. 희생(victim), 참사(disaster)에는 책임의 소재가 있을 수 있지만 그것을 사망이나 사고(accident)라고 하면 책임 소재를 따질 수 없는 가치중립적인 일이 돼버린다. 그래서인지 ‘근조’라는 말이 빠져버린 신박한 검은 리본도 등장한다. 

레몬과 무당벌레의 항변을 보는 듯하다. 레몬은 ‘착한 사마리아인’을 자기가 직접 죽인 희생자가 아닌 사망자로 분류한다. 그래서 그의 기억에도 없다. 무당벌레도 ‘늑대’의 죽음을 단순 사고로 분류한다. 모두 ‘조금 미안’할 수는 있지만 책임질 일은 아니라고 한다.

예수에게 사형선고를 내린 빌라도가 “나는 이 무고한 자의 피와 무관하니 너희들이 알아봐라”라고 말한 것과 같은 논리다. ‘다른 데 가서 알아봐도’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는 이유를 알 수 없으면 예수의 죽음은 원인을 알 수 없는 의문사로 처리될 수밖에 없다. 이러다 이태원 참사 희생자 156명이 의문사 처리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자연사는 아닌데 원인은 모른다면 의문사가 될 수밖에 없다.

시민안전 주무부처 장관과 관할 구청장은 핼러윈 축제와 같은 이벤트는 하나의 현상(現象)이어서 그 대처가 불가항력적이었다고 설명한다. 현상(phenomenon)이란 인간의 지각(知覺)과 이성으로 가늠할 수 없는 영역을 이른다. 자신들의 면피를 위해 에드문트 후설(Edmund Husserl)의 현상학(phenomenology) 조각까지 동원하니 그 치밀함이 놀랍다. 핼러윈 축제의 성격을 인간이 지각할 수 없는 ‘자연재해’쯤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주문인 모양이다.
 

 

아마 ‘불릿 트레인’의 원작자가 일본인이라서 레몬이나 무당벌레와 같은 무책임한 태도와 항변이 가능한지도 모르겠다. 책임 의식을 강조하고 추궁 또한 엄격한 미국이라면 통하지 않을 태도들이다.

미국에선 살인죄의 적용도 대단히 폭이 넓다. 우리 형법과 달리 미국 형법은 살인죄도 책임의 정도에 따라 3가지로 분류해놓고 폭넓게 적용한다. 1급 살인은 고의나 계획에 의한 살인이고 2급 살인은 고의성은 없었으나 명확한 과실에 의한 살인이며, 3급 살인은 우발적 과실치사다. 의도하지 않은 과실이나 우발적으로 누군가를 죽음으로 몰아가도 모두 살인죄로 처벌한다.

레몬과 무당벌레의 주장은 자신들이 ‘1급 살인죄’를 저지르지 않았다는 것일 뿐, 미국 법정에 서면 분명 2급 살인이나 최소 3급 살인으로 다뤄질 일들이다. 그래서일까. 이태원에서 아들을 잃은 미국 부모들의 우리 정부를 향한 분노가 우리 부모들의 그것보다 더 억누르기 어려운 모양이다. [본사 제휴 The Scoop=김상회 정치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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